목차
1.머리말
2.탄생설-나의 외가는 신라왕실?
3.해동증자 의자왕
4.영토확장의 싸움
1)옛 가야지역으로의 진출
2)고구려와의 화친과 한강유역으로의 진출
3)신라와의 공방전과 달라진 당외교의 입장
4)고구려와의 연합전선
4.의자왕 치세의 변화
5.뒤집히는 정세
6.마지막을 장식한 영웅들
1)성충(?~656)
2)계백(?~660)
7.맺음말
2.탄생설-나의 외가는 신라왕실?
3.해동증자 의자왕
4.영토확장의 싸움
1)옛 가야지역으로의 진출
2)고구려와의 화친과 한강유역으로의 진출
3)신라와의 공방전과 달라진 당외교의 입장
4)고구려와의 연합전선
4.의자왕 치세의 변화
5.뒤집히는 정세
6.마지막을 장식한 영웅들
1)성충(?~656)
2)계백(?~660)
7.맺음말
본문내용
대담함을 보여준다.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즉위한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자세한 내막은 전하지 않지만 태자 책봉이 늦었던 원인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심을 수습하기위해 642년 주(州).군(郡)을 다니면서 백성을 어루만지고 죄수를 살펴 죽을 죄를 빼고는 모두 용서해주는 자비를 베푼다. 그 후 신라와의 전쟁이 빈번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부터의 전쟁은 백제와 신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관계의 변화에까지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단독적인 전쟁이 아닌 연합전선을 구축한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1)옛 가야지역으로의 진출
의자왕은 무왕대에 집중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옛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내용은 이러하다.
2년7월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서 미후 등 40여성을 함락시키었다.8월에 장군 윤충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쳤다.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매, 윤충이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왕도에 전하였다. 남녀 1천인을 사호 잡아 국서 주현에 분거케 하고 군사를 머물러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28,의자왕2년
미후성을 포함한 40여성은 대야성의 인접한 지역으로 경남 서남부지역과 경북내륙의 일부지역이며, 그 당시 옛 가야지역의 대부분을 확보한 것이였다. 이는 대야성 공격을 위한 준비단계로 볼수 있었던 것이다. 연이어 일어난 대야성 전투 윤충의 부대가 대야성을 함락하여 대야성의 성주인 김품석(김춘추의 사위)과 그 처자를 처단한 전쟁.
이는 신라에게 있어 삼국통일전쟁을 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는 옛 가야지역 진출의 확보한 사건으로 백제가 장악하지 못했던 신라의 마지막 보루였으며, 가야지역을 상징하는 거점이였다.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경남 서부지역의 통치거점으로 삼으면서 전략적 요충지로써의 역활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옛 가야지역의 차지는 경주로의 진출을 할수 있는 전지기지를 마련한 것으로 신라에게는 커다란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2)고구려와의 화친과 한강유역으로의 진출
의자왕이 그 다음으로 목표한 것 역시 무왕과 마찬가지로 한강유역의 진출이였다. 이를 위해 의자왕은 지금까지의 고구려 강경책을 버리고 고구려와의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당항성을 빼앗고 신라의 대중국교통로의 차단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당의 간섭으로 인해 포기하고 말았다.
왕이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을 취하여 입조의 길을 막으려고 군사를 발하여 쳤다. 신라왕 덕만이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하니 왕이 듣고 군사를 파하였다.
-『삼국사기』28,의자왕3년 정월
3)신라와의 공방전과 달라진 당외교의 입장
백제와 신라는 옛 가야지역을 둘러싸고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내용은 이러하다.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공하여 7성을 취하였다. - 『삼국사기』28, 의자왕4년9월
왕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친정하는 동시에 신라의 군사를 징발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7성을 습취하니 신라에서는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내침하였다.
- 동상, 의자왕5년5월
장군 의직이 보기 3천을 이끌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진주하여 군사를 나누어 감물, 동잠의 2성을 쳤다.
신라의 장군 유신이 친히 사졸을 격려하여 결사적으로 싸워 아군을 크게 깨트리고 의직이 필마로 돌아왔다.
- 동상, 의자왕7년10월
의직이 신라 서변의 요차 등 10여성을 빼앗았다. 4월에 옥문곡으로 진군하였는데, 신라 장군 유신이 이를
맞아 두 번 싸워 크게 파하였다.
- 동상, 의자왕8년3월
왕이 좌장 은상에게 명하여 정병7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 등 7성을 쳐 빼앗았다. 신라 장군 유신, 진춘, 천존,죽지 등이 이를 맞아 쳤으나 유리함을 얻지 못하고 흩어진 병졸을 거두어 도살성 아래에 주둔하여, 재차 싸웠는데 아군이 패배하였다.
- 동상, 의자왕9년8월
이와 같이 의자왕 전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신라와의 접전이 적극적으로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8년에 이루어진 전쟁에서는 나당동맹이라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긴밀해진 신라와 당의 사이와는 다르게 당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정관 22년에 또 십여성을 빼앗고, 수년동안 마침내 조공이 끊어지고 말았다. -『구당서』백제전
이러한 백제의 태도는 전선의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심을 수습하기위해 642년 주(州).군(郡)을 다니면서 백성을 어루만지고 죄수를 살펴 죽을 죄를 빼고는 모두 용서해주는 자비를 베푼다. 그 후 신라와의 전쟁이 빈번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부터의 전쟁은 백제와 신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관계의 변화에까지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단독적인 전쟁이 아닌 연합전선을 구축한 싸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1)옛 가야지역으로의 진출
의자왕은 무왕대에 집중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옛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시도한다. 내용은 이러하다.
2년7월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서 미후 등 40여성을 함락시키었다.8월에 장군 윤충을 보내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쳤다.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매, 윤충이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왕도에 전하였다. 남녀 1천인을 사호 잡아 국서 주현에 분거케 하고 군사를 머물러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28,의자왕2년
미후성을 포함한 40여성은 대야성의 인접한 지역으로 경남 서남부지역과 경북내륙의 일부지역이며, 그 당시 옛 가야지역의 대부분을 확보한 것이였다. 이는 대야성 공격을 위한 준비단계로 볼수 있었던 것이다. 연이어 일어난 대야성 전투 윤충의 부대가 대야성을 함락하여 대야성의 성주인 김품석(김춘추의 사위)과 그 처자를 처단한 전쟁.
이는 신라에게 있어 삼국통일전쟁을 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는 옛 가야지역 진출의 확보한 사건으로 백제가 장악하지 못했던 신라의 마지막 보루였으며, 가야지역을 상징하는 거점이였다. 신라가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경남 서부지역의 통치거점으로 삼으면서 전략적 요충지로써의 역활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옛 가야지역의 차지는 경주로의 진출을 할수 있는 전지기지를 마련한 것으로 신라에게는 커다란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2)고구려와의 화친과 한강유역으로의 진출
의자왕이 그 다음으로 목표한 것 역시 무왕과 마찬가지로 한강유역의 진출이였다. 이를 위해 의자왕은 지금까지의 고구려 강경책을 버리고 고구려와의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당항성을 빼앗고 신라의 대중국교통로의 차단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당의 간섭으로 인해 포기하고 말았다.
왕이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을 취하여 입조의 길을 막으려고 군사를 발하여 쳤다. 신라왕 덕만이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하니 왕이 듣고 군사를 파하였다.
-『삼국사기』28,의자왕3년 정월
3)신라와의 공방전과 달라진 당외교의 입장
백제와 신라는 옛 가야지역을 둘러싸고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내용은 이러하다.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공하여 7성을 취하였다. - 『삼국사기』28, 의자왕4년9월
왕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친정하는 동시에 신라의 군사를 징발한다는 말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의 7성을 습취하니 신라에서는 장군 김유신을 보내어 내침하였다.
- 동상, 의자왕5년5월
장군 의직이 보기 3천을 이끌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진주하여 군사를 나누어 감물, 동잠의 2성을 쳤다.
신라의 장군 유신이 친히 사졸을 격려하여 결사적으로 싸워 아군을 크게 깨트리고 의직이 필마로 돌아왔다.
- 동상, 의자왕7년10월
의직이 신라 서변의 요차 등 10여성을 빼앗았다. 4월에 옥문곡으로 진군하였는데, 신라 장군 유신이 이를
맞아 두 번 싸워 크게 파하였다.
- 동상, 의자왕8년3월
왕이 좌장 은상에게 명하여 정병7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 등 7성을 쳐 빼앗았다. 신라 장군 유신, 진춘, 천존,죽지 등이 이를 맞아 쳤으나 유리함을 얻지 못하고 흩어진 병졸을 거두어 도살성 아래에 주둔하여, 재차 싸웠는데 아군이 패배하였다.
- 동상, 의자왕9년8월
이와 같이 의자왕 전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신라와의 접전이 적극적으로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8년에 이루어진 전쟁에서는 나당동맹이라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긴밀해진 신라와 당의 사이와는 다르게 당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정관 22년에 또 십여성을 빼앗고, 수년동안 마침내 조공이 끊어지고 말았다. -『구당서』백제전
이러한 백제의 태도는 전선의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