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장면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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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60년대 장면 정권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 1
Ⅱ. 196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상황 / 1
Ⅱ-1. 세 부류의 정치집단의 형성과 활동 / 1
Ⅱ-2. 장면-민주당 세력의 성장과 집권 / 2
Ⅲ. 장면정권의 지배적 권력연합의 구성과 성격 / 4
Ⅲ-1. 정치사회에 의한 ‘지배적 권력연합’ 구성 / 4
Ⅲ-2. 민주당 정권의 시민사회 ‘융합’ 정책 / 5
Ⅳ. 장면정권의 권력연합 ‘이탈’/ 5
Ⅳ-1. 국가기구 개혁정책과 국가세력 배제 / 5
Ⅳ-1-1. 경찰 및 관료제의 개혁 / 5
Ⅳ-1-2 군부의 개혁요구와 군 배제정책 / 6
Ⅳ-2. 정치사회의 보수화와 시민사회의 균열 / 7
Ⅳ-3. 정치사회의 기능상실과 지배적 권력연합의 분열 / 8
Ⅳ-3-1. 지배적 권력연합의 분열 / 8
Ⅳ-3-2. 정치사회의 대표기능과 국가-시민사회 조절능력 약화 / 8
Ⅴ. 지배적 권력연합의 분열과 장면정권의 붕괴과정 / 9
Ⅴ-1. 재벌의 공세와 장면정권의 교착 / 10
Ⅴ-1-1. 재벌의 반발과 공세 / 10
Ⅴ-1-2. 이데올로기적 공세 / 11
Ⅴ-2. 군부의 정치세력화와 장면정권의 붕괴 / 11
Ⅴ-3. 장면정권 붕괴과정의 특징 / 12
Ⅵ. 결론 / 12

<표-1> 1960년대 초 정치세력 유형 / 1
<표-2> 신파와 구파 비교 / 3
<표-3> 해임된 경찰(1960.9.1-11.30) / 6
<표-4> 군부 내 집단의 비교 / 6
<표-5> 1,2,3차 개각의 내용 / 8

본문내용

초 등장한 장면의 민주당 정권은 시민사회의 분출에 힘입어 선출된 시민사회형 정권이었고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용하고, 세력을 융합하려는 노력을 보였으나 결국 군사쿠데타에 의하여 붕괴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1960년대 초는 중요한 변동기로 인식할 만한 시기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우리 국민들은 최초의 시민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있었으나 곧이어 군부가 지배하는 권위주의 국가로의 역전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과정에서 최초로 시민사회에 기반을 두고 탄생했던 장면정권의 권력연합구조는 어떠했으며, 그것이 변이하도록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초기 시민사회형 정권으로서 가졌던 한계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Ⅱ. 196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상황
1950년대 말 이승만 체제는 권력구조내의 부정부패와 파쟁 그리고 비합리적 속성으로 정치의 효율화를 약화시켰고, 한국전쟁에 의한 국민감정의 자유지향 의식 증대 등은 이승만 통치구조의 종식을 종용했다. 이승만 지배체제의 권위주의적 독재에 대항해 비록 부분적이긴 하나 다시 확장되기 시작한 시민사회는 정치사회의 재조직을 요구하게 되었다.
1960년 4월혁명은 시민사회가 국가권력에 대해 지배정당성을 부인하고 시민사회 성립과 정치사회 재편성의 단초를 마련한 일대사건이었다. 4.19라는 학생-지식인의 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독재의 청산과 민주화의 정착이라는 혁명과업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정치사회상황은 해방 이후 관성처럼 남아있던 좌우대립과는 별개로 독재와 민주의 정치적 대립을 풀어나갈 민주적개혁적 정치세력의 등장을 가능케 하는 토양이 된다.
Ⅱ-1. 세 부류의 정치집단의 형성과 활동
이 당시의 정치집단을 크게 나누어보면, 제도권 밖의 시민운동세력 또는 혁신운동세력과 국가 내의 군부세력, 그리고 기존 제도정치권 내의 보수적 정치세력이 있었다.
영 역
세력 성격
정치그룹(1960년대초)
시민사회
시민/정치사회
일반시민단체들
혁신운동세력
민권수호총연맹 등 시민들
사회대중당, 혁신당, 사회당
국가
군부-경찰 세력
박정희 소장과 정군파 그룹
정치사회
보수세력
개혁적 보수세력
자유당 그룹
민주당 그룹
<표-1> 1960년대 초 정치세력 유형
먼저 혁신세력으로는 사회대중당, 사회혁신당, 한국사회당 등 다수가 등장했으나 끊임없이 분열, 이합집산하면서 활동함에 있어 고전을 면치 못했고, 7.29총선에서 의석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서 정치사회에 진입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내적 원인으로는 혁신계 내에서의 상이한 파벌들 간의 갈등, 탁월한 지도자의 결여 등이라면, 외적원인으로는 남북분단이라는 환경적 조건과 그 동안 국민의식에 정착되어 버린 정치적 보수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군부세력의 대표적인 그룹은 박정희 소장과 육사 8기생 등 이른바 ‘정군파’ 장교들이었다. 군부세력은 사사오입 정치파동, 공공연한 부정선거 지령, 4.19혁명 때에도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개입주의 그룹은 이승만 정권에 반감을 가지고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훗날 5.16쿠데타의 주체가 된 이 세력은 국가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정부세력에 대하여 국가기구에 종사하고 있던 하위세력간의 대립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수적 정치세력을 보면, 시민사회의 요구를 묵살하고 정권을 유지하려는 권위주의 세력인 자유당과 어느 정도의 ‘타협적 공존’을 유지하려는 온건보수세력인 민주당으로 구성된다. 4월혁명 이후 이승만과 자유당 세력이 민심을 잃고 몰락하면서 한민당과 민국당을 잇는 민주당 세력이 부각되어 구 기득권 이미지의 탈피를 통한 새로운 시민사회에의 적응을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Ⅱ-2. 장면-민주당 세력의 성장과 집권
이승만이 한민당과 권력을 나누어 갖기를 거부하였을 때 한민당은 다른 정치세력과의 동맹을 통하여 권력기반의 확충을 꾀하였다. 그 결과 1949년 민주국민당이 해체되고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민주당의 창당은 반 이승만의 기치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주당은 민국당 세력이 중심이 되었기에 보수성을 노정하고 있었다.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 지주적봉건적인 초기자본주의적 색채가 농후하고 전제적 경향에 기인한다. 둘째, 민주당은 민주국민당 인사들과 1952년 정치위기 이후에 이승만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이전의 자유당 인사들과의 연합의 결과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이유는 당시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한 흐름을 차지하고 있던 진보세력을 제외시켰다는 점이다. 혁신세력의 포함에 반대하는 자유민주파와 찬성하는 민주대동파로 분열되던 중 자유민주파만이 민주국민당 내 보수파와 한민당, 흥사단계의 통합만으로 결당시킴으로써 폐쇄성을 면치 못했다.
민주당은 장면, 곽상훈 등의 ‘신파’세력과 한민당-민국당 쪽의 ‘구파’의 두 개 파벌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이들이 제2공화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다. 이들 두 집단의 최고 지도층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구파의 최고 지도자 20명 모두가 남부 및 중부지방 출신인데 반하여 신파 지도자 20명 중 8명이 북서부 등 이북지역 출신이며 신파내의 평안도 지역 출신의 인사들이 가장 큰 단일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사실은 구파의원은 대부분이 정치계에서 명성을 떨친 사람들이고, 신파 의원들은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행정관료로 지냈다는 점이다.
<표-2> 신파와 구파 비교
항목 파벌
구 파
신 파
대표적 지도자
신익희, 조병옥, 백남훈, 김준연, 김도연, 윤보선
장면, 곽상훈, 박순천, 정일형, 한근조
출신지역
남서부(호남), 기호
남동부(영남), 북서부(평안도)
출생년도
1890년대와 1900-1910년대 반반
1890년대 31, 1900-10년대 2/3
교육정도
80%이상 대졸(상)
80%이상 대졸(상)
교육지
80%이상 해외(대부분 일본)
국내, 해외(일본, 미국) 반반
인간관계
김성수와 유대
장면과 유대
성 격
감성적, 타협적, 사교적, 보수적
재사형, 이론적, 개방적-보수적 관료형
경력/직업
정당인, 정치인
관료, 법조인, 금융계 출신
정당배경
한민-민국당계 정통 야당인사
무소속, 원내자유당, 조민당
사회적 배경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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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14
  • 저작시기2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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