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농토를 농민에게... 남한의 농지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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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현대사] 농토를 농민에게... 남한의 농지개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일제 패망을 계기로 실시된 한국의 ‘농지개혁’
 -농지개혁의 배경알기
Ⅲ. 농지개혁의 입법과정과 내용
Ⅳ. 농지개혁의 시행과정과 결과
Ⅴ. 한국농지개혁의 평가와 영향
Ⅵ. 나가며

본문내용

문제가 된다. 한국에서는 낭비적이고 기생적인 존재인 지주계급이 차지하던 소작료를 농지개혁이후 납부하지 않아도 됨으로써 농민들은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고도성장의 원동력을 흔히 양질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이라 하는데 이들 노동력의 대부분 농가의 자녀들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농촌에서 농지개혁을 통해 자작농이 된 농민들의 소득수준 향상이 있었던 것이다. 장상환,<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 발전 - 경남지역의 사례연구를 중심으로 ->, 경제발전연구, 2000년. 참조.
또한 농지개혁은 지주계급이 가졌던 자본을 자본가 계급이 가지도록 함으로써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지주계급은 아무런 농업투자를 하지 않더라고 연말이면 수백 석 수천 석의 소작료를 거둘 수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나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반면 자본가계급은 직접생산자의 잉여노동을 착취한다는 면에서 지주계급과 같지만 기술 혁신을 태만히 하여 경쟁에 탈락해 몰락해버리므로 지주계급은 토지를 상실하고 대신 지가증권을 받았는데 상인들과 자본가계급은 지가증권 지가증권(地價證券 ) -농지개혁 때, 정부가 매수한 농지의 보상으로 지주에게 발행한 유가증권. 액면은 매수한 농지 보상액과 당해 연도의 그 농지에서 생산되는 주생산물의 수량으로 표시하며, 상환방법은 5년간 균분연부로 매년 액면 농산물의 법정가격으로 산출한 통화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가증권으로서 ① 귀족재산 매수시 대금지급가능 ② 담보제공 가능 ③ 양도 가능 등의 법적효력을 가지고 있다
을 달여 귀속재산을 불하 받는 등 자본을 축적 받게 되었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토지개혁 후 자본가계급으로 전신하는데 실패하였지만 그들이 소유하던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어 그 뒤 자본주의화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강만길, 위의책,
그러나 한국의 농지개혁이 자본주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것만을 평가되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자작농이 되었다는 점은 그들의 처지가 일단 개선됐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이 과연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는지는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주계급이 몰락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의 자본주의화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던 반봉건적 생산관계가 해체되고 자작농체제가 창출되었던 것이다.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은 완전히 몰락했다. 농지개혁으로 농지를 직접 분배당한 것 이외에 소유농지를 사전 방매했다 하더라도 지주의 존립기반이 무너진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농지를 분배당한 지주계급은 계급으로서 결집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자본가계급으로의 변신에도 실패했다. 농지개혁법에서는 지주의 전업알선대책까지 마련해 놓았으나 대다수 지주의 영세성 및 경영능력 미흡, 그리고 공업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농촌사회는 자작농체제가 확립되었다.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계급적 지위가 상승한 것이다.
하지만 새로이 창출된 자작농은 이전의 소작지가 자작지로 변동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세농적 계층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1정보 이상의 농가는 농지개혁을 전후하여 계속 감소한 반면, 0.5정보-1.0정보 계층과 0.5정 미만 계층이 늘어나, 전농가의 78.6%가 자급수준에도 미달하는 1정보 미만의 영세농이었다. 요컨대 농지개혁에 의해 지주층이 몰락하고 자작농체제를 창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자작농체제는 영세농구조였다는 점에서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은 이러한 취약한 영세 자작농체제의 농업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전쟁이 장기 소모전으로 되면서 요구된 막대한 전비부담이 농업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농지분배를 받은 농민들은 상환곡을 현물로 내어야 했고, 거기에 임시토지소득세를 비롯한 조세수탈이 농민에 집중되었으며, 미국의 잉여농산물 도입은 농업의 생산기반을 파괴했다. 과중한 조세수탈은 농지개혁으로 갓 창출된 자작농 체제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식량 생산 위주의 한국 농업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정진상, 한국전쟁과 전근대적 계급관계의 해체 참조.
이처럼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으로 대다수의 농민은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계급적 지위는 상승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조세수탈과 곡물 가격의 상대적 하락으로 인해 자기 재생산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받았으며, 실제로 상당수의 농민은 토지를 처분하고 다시 소작농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농촌을 이탈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전환된 농민들은 대부분 빈농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한국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국가의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됨으로써 농촌에서 광범한 과잉인구로 퇴적하고 있었다. 이는 도시에서 산업화가 시작되기만 하면 무진장으로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는 저수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라 60~70년대 우리나라는 급격한 산업화의 과정을 걷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급격한 도시화로 도시는 포화상태에 이르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각종 도시문제를 발생시켰고, 농촌은 급격하게 퇴화되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이처럼 모든 정책의 평가와 영향이 그렇듯이, 농지개혁의 평가와 영향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보였다.
Ⅵ. 나가며
지금까지 농지개혁의 전개과정과 이를 통해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까지를 살펴보았다. 농지개혁을 전반적으로 평가해보자면, 농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고 농민들의 불만과 빈곤만을 온존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해체하여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타파하고자 했으며, 정부가 농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겠다.
하지만 정책의 추진부터 진행 까지 농민을 고려하지 못한 부르주아적 개혁이었다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미군정의 지배가 아니었더라면, 한민당의 고의적인 조종이 아니었다면 보다 실질적이고 농민을 위한 진정한 토지개혁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했더라면 오늘날의 고질적인 농촌문제, 부동산 문제 등등 오늘날까지 따라오는 각종 토지정책의 그늘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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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16
  • 저작시기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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