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_-_6조_발표_골품제(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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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고대사_-_6조_발표_골품제(수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part.1
0. 발표를 시작 하기 앞서
1. 골품제(骨品制)란 무엇인가?
2. 골제(骨制)의 成立
3. 聖骨․眞骨로의 分化
4. 頭品制의 成立
5. 骨品制의 完成

part.2
6. 六頭品, 骨品制의 矛盾아래 억압된 그들
7. 骨品制의 영향
8. 新羅의 骨品制度의 特徵
9. 骨品制度의 退化

본문내용

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遊中華國 奮不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劒佩 出入天子之側 足矣 「삼국사기」 권 47 열전 7 설계두
신라는 사람을 쓸때 골품(신분)을 논한다. 그러므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한계를 넘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바는 서쪽의 중국에 가서 불출(不出)의 지략을 떨치고 비상한 공적을 세워, 이로써 영화의 길을 열고, 고관의 옷에 칼을 차고 천자 곁에 출입하였으면 족하리라.
2.골제(骨制)의 성립
(가)골제성립의 배경
신라의 골제가 성립된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 신라의 초기 국가형성과 연결 시켜 언급해 보고자 한다. 신석기시대 이래로 남한 지역에서는 여러 문화가 중층을 이루면서 발전하였다. 한국사를 논함에 있어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영향은 떼어 놓을 수 없다. 신라의 초기 국가 형성 과정에서도 중국의 정세변동이 부족집단의 이주, 새로운 문화의 유입정착등의 형태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초기 신라의 주된 영역이었던 낙동강 동쪽에 한하여만 보더라도 각 묘제의 분포가 일정한 지역에 나누어 분포하고 있다. 이는 다양한 세력이 일정한 지역에 군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주(周)의 등장과 전국시대의 혼란, 진(秦)한(漢)의 통일, 한사군설치 등과 같은 동아시아의 지각변동에 의해 부족의 이주 현상이 특히 활발했을 것이라 예상해 보면 이 시기를 전후하여 초기 신라지역에 이주민들이 정착 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魏書》東夷傳 辰韓傳에 중국측 이주민에 대한 기록이 있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곳의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옛날에 진나라의 부역에서 도망쳐 그곳(진나라)에서 빠져나와 한국에 이르자 마한이 그 동쪽 경계의 땅을 그들(이주민)에게 내어주었다.
위와 같은 사실은 신라의 국가형성과정에 있어 하나의 민족 의해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여러 유이민 집단의 이주정착과 이들간의 관계속에서 이루어 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주민집단들 중에 세력이 큰 성씨집단 朴昔金 성씨집단은 서로의 연맹방식을 통하여 신라국가체제의 기반을 모색하였다. 초기에 있어 연맹장의 세력은 미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삼국사기》신라본기를 통하여 신라가 신라북방세력의 남하에 저항한 것과 주변 부족국가의 정복으로 영토적 팽창을 단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신라의 연맹체는 정치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발전은 외부세력의 압력에 대항하는 힘을 구축하기 위한 지배체제의 발전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의 내용에 비추어 볼때 대표적으로 신라와 접촉을 가졌던 세력으로는 옥저낙랑고구려말갈등이 있다. 이러한 세력들은 신라와의 접촉시기는 달랐을 것이나 신라에 비해 우월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신라의 팽창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던 반면 신라연맹체내의 대외적 결속을 강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신동하 「신라골품제의 형성과정」p.10
즉, 신라연맹체가 외부적 압력에 대응하는 지배체제를 발전시키게 된 요소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나)부(部)와 성씨집단
삼국사기 신라본기 및 삼국유사 왕력을 통하여 보면 신라 上古의 왕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박,석,김 3성씨의 交立 이다. 金哲埈교수는 신라초기의 박,석,김 3부족의 연맹체제하에서 부족연맹장을 선출하였던 것이어서 상고의 왕세계는 각 부족 출신으로서 연맹장으로 선출되었던 인물의 계통임을 주장라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삼성교립(三姓交立)의 형식으로 기록된 것은 신라의 기원을 끌어 올리기 위하여 박,석 부족의 세계(世系)를 김씨부족의 세계 위로 붙인 결과라 하였다. 신동하 「신라골품제의 형성과정」p.11
앞서 밝힌바와 같이 박,석,김 3성씨부족은 이주시기를 달리 하여 특정한 지역에 정착 하였다. 김씨는 粱部沙粱部 지역에, 박씨는 牟梁部 지역에, 석씨는 해상세력으로서의 성격을 감안할 때 경주 동방의 동해안 지역에 정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동하 「신라골품제의 형성과정」p.16
그렇다면 XX部 할 때 部는 어떠한 것인가 살펴보자. 자연취락의 성격을 띈 이주민들의 거주지를 村이라 하고 대표적인 村 6개가 인위적 의도가 반영된 행정구역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部로 바뀌었다 볼 수 있다. 신동하 「신라골품제의 형성과정」p.18
허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 各村에 특정한 성씨집단이 거주하는 전통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眞興王巡狩碑와 南山新城碑 등에서 인명을 표기하는데 있어 이름, 출신지(部名영)가 포함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국토의 지역적 편제를 추진하던 中古期에 있어서도 특정한 부와 특정한 성씨가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봐도 위와같은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 해준다.
(다) 骨制의 成立
신라연맹체에 있어서 박,석,김 등 성씨집단에 의한 지배체제와 그 신분적인 특권은 배타적 혼인을 통하여 유지 되었다. 신동하 「신라골품제의 형성과정」p.22
《唐書》新羅傳에 보면 배타적 혼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其建官,以親屬上,其族名第一骨、第二骨以自別。兄弟女、姑、姨、從妹,皆聘妻。王族第一骨,妻亦其族,生子皆第一骨,不娶第二骨女,雖娶,常爲妾
관직을 세움에 있어 친속을 으뜸삼고 친족의 명칭에 제1골 제2골로 서로 구별한다. 형제의 딸 및 고모와 이모 및 사촌자매간에 모두 혼인한다. 왕족이 제1골이고 왕비 역시 1골이다. 아들을 낳으면 제1골이 되며 제2골의 여인에게는 장가들지 않으며 비록 장가들더라도 항상 첩으로 삼는다.
비록 위 사료가 8세기 중엽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이상황을 굳이 8세기만의 상황으로 국환 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와같이 박,석,김 3성씨집단에 의해 형성된 배타적 혼인집단을 骨族이라 부르기로 하겠으며 이에 따라 지배신분층을 중심으로 편성된 신분질서를 골제라 일컬을 수 있겠다. 신동하 「신라골품제의 형성과정」p.25
박,석,김 골족들은 자신의 지배를 나름 정당화시키는 방법으로 天孫族이라 스스로 자처하고 시조설화를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같은 시조설화는 나름 세련된 방법으로 골제의 신분적 차등을 합리화 하는데 큰 도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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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28
  • 저작시기2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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