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통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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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머리말
2.후삼국 통일 전쟁의 배경 및 원인
3.후삼국 통일 전쟁의 전개
4.후삼국 통일전쟁의 민족사적 의미
5.맺음말
6.참고문헌

본문내용

조의 사촌 동생인 왕식렴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을 보내어 이를 지키게 했다. 이에 따라 왕건은 즉위한 그 해에 황해도 연안의 여러 고을에 인호(人戶)를 나누어 여기에 옮겨 살게 하고 왕식렴을 보좌하는 관리를 두기도 하였다. 이 조치는 북방 개척의 의지를 보임과 동시에 그들 지역과의 유대 강화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다음 해에는 평양에 성을 쌓았다.
태조 5년인 922년에는 다시 서경을 번영시키기 위해 인근의 민호를 사민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에 서경에 행차하여 개경과 비슷한 관부와 관리를 설치하여 서경을 개경과 비슷한 행정구조로 개편하려하였다. 태조 13년에는 서경에 학교를 설치하여 인재들을 양성하게 하는 조취도 취하였다. 즉 수재로 이름이 높았던 정악(廷顎)을 서경에 파견하여 서학박사(書學博士)로 삼고 학원(學院)을 설치하여 6부의 생도를 모아 가르치게 하였다.
이렇듯 서경은 개경과 비슷한 관부와 성곽이 있었을 뿐 아니라 태조의 인척과 중신들이 포진하고 있는 도시가 되었다. 이것은 서경을 제2의 수도로 삼아 고구려의 구토를 회복하겠다는 태조 왕건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이념은 발해에 대한 친척 의식과 발해 유민의 포용함으로써 진정한 고구려의 후예국가가 되었다.
견훤이 백제의 부흥을 표방하여 후백제를 건국하자 왕건은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는 고구려 계승 이념을 표방하면서도 자신들이 후삼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이념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것이 바로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이념이다. 태조는 신라를 본받아 개경과 서경에 탑을 세워 부처의 공덕으로 삼한일통을 이루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서경에 개경보다 높은 9층탑을 건립하려 하였음은 그가 내면으로는 고구려계승 이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일통(一統)할 것이라는 당위성과 이념을 가지고 후백제와 신라의 유민들을 포섭하려 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쉽지 않았다. 먼저 신라의 경우를 보자면,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신라는 순순히 귀순해 왔다. 신라인들 대부분은 그 동안 신라를 도와주었던 왕건과 고려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신라의 귀족들이나 서민들도 경순왕을 따라 고려에 옴으로써 고려의 백성의 일부를 구성하였다. 이들 중 왕족이나 귀족들은 고려왕실에서 후한대접을 받았다. 먼저 경순왕을 비롯한 왕족들은 고려왕실과 혼인하여 인척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경순왕 본거지였던 경주를 식읍으로 줌과 더불어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를 관할하게 하였다. 고려왕실과 경순왕 계열의 혼인관계로 인해 경순왕 계열은 신라왕족으로써 적어도 현종 대까지는 영화를 누렸다.
또한 신라 귀족들이 고려의 정계에 들어와 활약하는 일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신라인이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마의태자를 비롯한 일부 신라인은 신라의 귀순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강제로 접수되었기 때문에 반발 의식이 강했다. 이것이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한계이기도 했다.
고려태조 왕건이 집권할 당시 중국은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시기였다. 즉 혼란기여서 고려는 중국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후삼국 통일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측면에서 중국의 인정을 받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왕건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하지 않았다. 독자적인 천자의 국가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조 왕건이 자신을 칭할 때 ‘짐(朕)’이란 표현을 썼으며 백성들에게 내리는 문서도 ‘조(詔)’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도 그 증거이다. 이는 하늘이 천명(天命)을 주어 나라를 열었다는 뜻으로 중국과 대등한 천자국임을 표방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후주의 뒤를 이어 강력한 통일국가인 송(宋)이 나타났다. 이에 고려에서는 광종 13년인 962년에 교빙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독자적인 천자의 국가라는 의식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송이 고려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신라의 삼국 통일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즉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통일을 하였으며 신라의 통일의 한계였던 고구려 영토를 훨씬 더 많이 되찾았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정치적, 문화적, 사상적인 면을 실질적으로 아우른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했다. 또 이념상으로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했으며, 고려는 삼한을 통일할 것이라는 ‘삼한일통(三韓一統)’ 이념을 내세웠다. 후삼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천명을 받았기에 이에 따라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신라와 후백제를 포섭하였다.
이에 대해 신라인들은 대체로 고려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며, 강제적으로 통합된 후백제 백성들도 고려의 실체와 이념에 대해 크게 동조하지 않았다. 고려 태조 왕건도 이를 염려하여 「훈요(訓要) 10조」에서 이들을 정계에 등요하지 말 것을 후대 왕들에게 부탁하였다. 한편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동북아시아의 전개에 있어 중국 및 북방 민족과 함께 삼각의 축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 송 - 요(遼) 또는 금(金)의 삼각구도를 형성하여 서로 견제와 균형을 주고 받는 초석이 되었다. 통일 왕조로서 동북아시아의 일원이 되어 요의 침략과 금의 압력을 물리칠 수 있었다.
5.맺음말
통일 신라 하대 상황 속에서 후삼국으로 갈라진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또한 갈라진 국가를 통일하는 것도 필연적이었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했지만 백성들은 별 거부 없이 이를 받들인 것으로 보아 살기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은 한국 최초의 민족적 대통일이었으며 새로운 사회의 전개를 향한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동북아시아의 한 축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6.참고문헌
- 고려의 건국 및 후삼국 통일의 민족사적 의미, 김갑동, 2008
고창전투와 후백제의 정세변화, 유영철, 1999
-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김갑동, 서경문화사, 2010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정 연구, 류영철, 경인문화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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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1.23
  • 저작시기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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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77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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