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서,44) 이는 출교의 정당화에 대한 신학적, 법적인 최종적인 결정을 향한 진행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45) 뻬랭일파에 대한 칼빈의 승리 이후로, 공고화된 제네바 정체는 베른으로부터의 정치적인 독립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제 칼빈의 교의에 대한 전적인 승복의 자세를 보이는 가운데, 제네바시민들에게 있어서 그 정치적인 과제란 칼빈식의 종교개혁의 과제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46) 요동하는 국제적인 사건들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1555년 이후의 십년은 프랑스와 여타 지역에서의 칼빈식 개혁프로그램의 확장의 과정으로 특징지워질만 했다.47) 제네바의 ‘관주도적’ 개혁이 더욱 성숙해가는 동안 이러한 선교적 확장의 추세는 개혁자의 복음주의적 가르침의 내용만이 아니라 제네바식의 모델 자체를 개선시켜나갔다.
Ⅵ. 결론
뻬랭일파에 대한 승리를 통하여 제네바는 ‘거룩한 훈련에 대한 염원을 만족시키는 사례’48)가 되었다는 것을 일단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49)로서의 그 명성은 교회의 정체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여전히 안고 있다. 우리가 칼빈을, ‘교회가 그 고유한 영역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한 투쟁에 있어서의 승리자’50)라고 한다면, 그의 승리란 특히 1553년에서 1555년에 이르는 결정적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전형적으로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승리는, 그의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 반대자에게 그렇게 여겨졌듯이, 종교개혁의 ‘본질적 요소’(essentials)의 일부를 희생시키는 가운데 주어지는 ‘강요된’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강요』 제1판에 벌써 나타나듯이, 그는 예컨데 ‘사적인’ 인간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의무라는 차원과 공적인 집단에 대한 ‘치리’의 차원 사이의 구분이라든지, 또는 교황주의적이고 전제적인 강제조치와 그리스도인의 훈련을 위한 필연적인 질서 사이의 엄연한 구분에 대해 매우 신중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51) 하지만 성서적 복음주의자로서, 그리고 종교개혁의 제1세대의 충실한 제자로서 ‘불가시적 교회’에 대해 강조한 그의 입장은 적어도 당시 제네바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본래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의 개혁 프로그램이 내적으로 겪는 여러 가지 과제들에 덧붙여,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이라는 외적 여건은 ‘개혁된’ 교회들로 하여금, ‘불가시적’ 교회에 대한 교리적인 고백 안에 머무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개념은 충분히 명료하게 되고 심지어 근본적으로 변혁되어야 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가시적’ 구성(formation)을 향해서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져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도시 공화국의 한 ‘요새’로서의 제네바야말로 교회(the ecclesiastical)와 시민(the civil) 사이의 대결의 무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칼빈의 제네바는 그 시초부터 유럽종교개혁의 한 시험대로 온 유럽의 대단한 주목거리였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 사이의 고백적/신학적 구분은 그 유효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오직 교회의 ‘가시적’ 구성만이 하나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의 제네바가 겪는 갈등적 상황 속에서 16세기 복음적 교리의 본질 적 요소들이 어떻게 ‘근대적인’ 사회-정치적 이념들, 혹은 적어도 그 근거로 발전되어가는지를 살피는 것은 의심할 바없는 타당성을 지닌다. 이와 더불어, 칼빈 자신이 이러한 발전적 변화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의 교의는 그것의 공적인 표현을 위해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전용의 근거가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역시 중요하다. 기독교적인 훈련에 대한 ‘권위’의 강조, 그러한 훈련이 지니는 엄격한 도덕성은 ‘관주도적인’ 종교개혁의 강압적 성격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 성격은, 적어도 그의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 실천의 장에서 들어서서는 복음적 교의에 의해 허용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까지’ 그의 개혁 프로그램을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불안한 과정에 대한 사실적 파악을 통해 보건데, 칼빈식의 개혁은 그 전형적인 긴장을 그 자체에 지니고 있으므로써 오히려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네바에서의 그것의 승리는 칼빈주의적 전통의 괄목할만한 진전을 향한 출발점으로서, 그 발전적 진행 속에는 동시에 그것의 내적인 긴장역시 계승되고 있다.
Ⅵ. 결론
뻬랭일파에 대한 승리를 통하여 제네바는 ‘거룩한 훈련에 대한 염원을 만족시키는 사례’48)가 되었다는 것을 일단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49)로서의 그 명성은 교회의 정체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여전히 안고 있다. 우리가 칼빈을, ‘교회가 그 고유한 영역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한 투쟁에 있어서의 승리자’50)라고 한다면, 그의 승리란 특히 1553년에서 1555년에 이르는 결정적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전형적으로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 승리는, 그의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 반대자에게 그렇게 여겨졌듯이, 종교개혁의 ‘본질적 요소’(essentials)의 일부를 희생시키는 가운데 주어지는 ‘강요된’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강요』 제1판에 벌써 나타나듯이, 그는 예컨데 ‘사적인’ 인간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의무라는 차원과 공적인 집단에 대한 ‘치리’의 차원 사이의 구분이라든지, 또는 교황주의적이고 전제적인 강제조치와 그리스도인의 훈련을 위한 필연적인 질서 사이의 엄연한 구분에 대해 매우 신중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51) 하지만 성서적 복음주의자로서, 그리고 종교개혁의 제1세대의 충실한 제자로서 ‘불가시적 교회’에 대해 강조한 그의 입장은 적어도 당시 제네바의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 본래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의 개혁 프로그램이 내적으로 겪는 여러 가지 과제들에 덧붙여,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이라는 외적 여건은 ‘개혁된’ 교회들로 하여금, ‘불가시적’ 교회에 대한 교리적인 고백 안에 머무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개념은 충분히 명료하게 되고 심지어 근본적으로 변혁되어야 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의 ‘가시적’ 구성(formation)을 향해서 어떤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져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도시 공화국의 한 ‘요새’로서의 제네바야말로 교회(the ecclesiastical)와 시민(the civil) 사이의 대결의 무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칼빈의 제네바는 그 시초부터 유럽종교개혁의 한 시험대로 온 유럽의 대단한 주목거리였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 사이의 고백적/신학적 구분은 그 유효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오직 교회의 ‘가시적’ 구성만이 하나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의 제네바가 겪는 갈등적 상황 속에서 16세기 복음적 교리의 본질 적 요소들이 어떻게 ‘근대적인’ 사회-정치적 이념들, 혹은 적어도 그 근거로 발전되어가는지를 살피는 것은 의심할 바없는 타당성을 지닌다. 이와 더불어, 칼빈 자신이 이러한 발전적 변화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그의 교의는 그것의 공적인 표현을 위해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전용의 근거가 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역시 중요하다. 기독교적인 훈련에 대한 ‘권위’의 강조, 그러한 훈련이 지니는 엄격한 도덕성은 ‘관주도적인’ 종교개혁의 강압적 성격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 성격은, 적어도 그의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그 실천의 장에서 들어서서는 복음적 교의에 의해 허용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까지’ 그의 개혁 프로그램을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불안한 과정에 대한 사실적 파악을 통해 보건데, 칼빈식의 개혁은 그 전형적인 긴장을 그 자체에 지니고 있으므로써 오히려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제네바에서의 그것의 승리는 칼빈주의적 전통의 괄목할만한 진전을 향한 출발점으로서, 그 발전적 진행 속에는 동시에 그것의 내적인 긴장역시 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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