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와 ‘mission by love\' 모두 존재했으나 ‘mission by love\'로 더 많이 활동했던 선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교가 성공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축복이다.
1884년 이후 고종의 인정을 받으며 학교, 병원 등의 자선사업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M. F. 스크랜턴는 시병원(施病院),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세웠고 H. G. 언더우드는 고아원, H. G.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웠다.
* 조선의 남녀가 구별된 문화를 인정하며 세운 ‘보구여관(保救女館)’
남자들이 경영하는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수 없는 조선의 여자들을 보호하고 구하기 위하여 1887년 정동에 세웠다. 처음 책임자는 M. Howard였고 그 후임으로 1890년부터 로제타 셔우드 홀(R. S. Hall)이 진료활동을 하였다.
* ‘mission by love\'를 실천했던 홀(Hall) 가족
1. 평양 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홀(W. J. Hall)은 조선에 1891년 12월에 처음 와서 1892년 평양 지방 개척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Gukyung mission)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평양감사 민병석은 금교령(禁敎令)을 내렸지만 고종에 의해 선교사 탄압이 풀어지고 평양감사가 파직당하는 모습을 평양사람들이 보면서 절대권력자인 평양감사보다 powerful한 선교사의 높은 위상을 느끼게 되었다. 청일전쟁 때에는 외교관계로 청나라와 일본이 침입하지 못하는 홀의 집을 조선인들에게 개방하여 피난처가 되어주어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전쟁 중 전염병이 유행하자 환자들을 돌보다 홀도 전염병에 걸려 1894년 사망하였다. 조선인들은 외계인처럼 낯설고 구경거리였던 외국인 선교사가 목숨까지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하게 된다. 그리고 홀은 양화진에 묻혔다.
2.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홀(W. J. Hall)의 별세 후 미망인이 된 로제타 셔우드 홀(R. S. Hall)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로제타 홀은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펼쳤고 점자를 배웠다. 그리고 189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그 모금액으로 평양에 기홀병원(紀忽病院, The Hall Memorial Hospital)을 세웠는데 이것이 평양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현대식 병원이다. 미국에서 배운 점자를 통하여 맹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맹아학교를 세웠다. 점자를 배운 맹인 여성들은 지방에 다니며 맹인 여성에게 전도를 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인 여성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로제타 홀은 김점동(박에스더)과 남편 박유산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교육을 시켰다. 1900년 박에스터는 한국 최초의 의학박사가 되었고 조선에 들어와 의료봉사를 하였다.
3. 셔우드 홀(Sherwood Hall)
결핵을 전공한 의사였던 셔우드 홀(S. Hall)은 부모님을 이어 조선에 와서 의료봉사를 하였다. 해주에 결핵전문병원인 구세요양원을 세우고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환자들의 치료를 돕고 결핵퇴치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1931~1940년에 발행된 크리스마스 씰에는 트리, 산타와 같은 외국의 이미지가 없고 숭례문과 같은 조선의 문화재, 세시풍속과 연관된 이미지로 디자인하여 결핵에 대해 무지했고 두려움을 갖고 있는 조선인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40년 강제 추방될 때까지 봉사를 하였고 그 후 인도에 가서 또다시 의료봉사를 펼쳤다.
홀(W. J. Hall)을 비롯한 부인 로제타 셔우드 홀(R. S. Hall), 아들 셔우드 홀(S. Hall), 그리고 딸까지 가족 모두가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악한 나무인지 선한 나무인지는 열매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데 한국의 초기교회 시기의 열매는 ‘mission by love\'로 선한 사랑의 열매를 맺었다. 이 열매를 통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승리할 수 있었고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며 이기적인 열매를 맺고 있다. 우리는 조선과 조선인들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며 봉사했던 선교사들을 기억하고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한다.
이렇게 해서 이덕주 교수님의 1주차 강의가 끝났습니다. 저는 이강의를 들으면서 진짜 선교사님들이 정말 우리나라에까지 오셔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를 알수 잇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께 감사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놀라
1884년 이후 고종의 인정을 받으며 학교, 병원 등의 자선사업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M. F. 스크랜턴는 시병원(施病院),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세웠고 H. G. 언더우드는 고아원, H. G.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세웠다.
* 조선의 남녀가 구별된 문화를 인정하며 세운 ‘보구여관(保救女館)’
남자들이 경영하는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수 없는 조선의 여자들을 보호하고 구하기 위하여 1887년 정동에 세웠다. 처음 책임자는 M. Howard였고 그 후임으로 1890년부터 로제타 셔우드 홀(R. S. Hall)이 진료활동을 하였다.
* ‘mission by love\'를 실천했던 홀(Hall) 가족
1. 평양 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홀(W. J. Hall)은 조선에 1891년 12월에 처음 와서 1892년 평양 지방 개척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Gukyung mission)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평양감사 민병석은 금교령(禁敎令)을 내렸지만 고종에 의해 선교사 탄압이 풀어지고 평양감사가 파직당하는 모습을 평양사람들이 보면서 절대권력자인 평양감사보다 powerful한 선교사의 높은 위상을 느끼게 되었다. 청일전쟁 때에는 외교관계로 청나라와 일본이 침입하지 못하는 홀의 집을 조선인들에게 개방하여 피난처가 되어주어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전쟁 중 전염병이 유행하자 환자들을 돌보다 홀도 전염병에 걸려 1894년 사망하였다. 조선인들은 외계인처럼 낯설고 구경거리였던 외국인 선교사가 목숨까지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하게 된다. 그리고 홀은 양화진에 묻혔다.
2.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홀(W. J. Hall)의 별세 후 미망인이 된 로제타 셔우드 홀(R. S. Hall)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로제타 홀은 미국에서 모금운동을 펼쳤고 점자를 배웠다. 그리고 189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그 모금액으로 평양에 기홀병원(紀忽病院, The Hall Memorial Hospital)을 세웠는데 이것이 평양에서 제일 먼저 설립된 현대식 병원이다. 미국에서 배운 점자를 통하여 맹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맹아학교를 세웠다. 점자를 배운 맹인 여성들은 지방에 다니며 맹인 여성에게 전도를 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인 여성 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로제타 홀은 김점동(박에스더)과 남편 박유산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교육을 시켰다. 1900년 박에스터는 한국 최초의 의학박사가 되었고 조선에 들어와 의료봉사를 하였다.
3. 셔우드 홀(Sherwood Hall)
결핵을 전공한 의사였던 셔우드 홀(S. Hall)은 부모님을 이어 조선에 와서 의료봉사를 하였다. 해주에 결핵전문병원인 구세요양원을 세우고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환자들의 치료를 돕고 결핵퇴치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1931~1940년에 발행된 크리스마스 씰에는 트리, 산타와 같은 외국의 이미지가 없고 숭례문과 같은 조선의 문화재, 세시풍속과 연관된 이미지로 디자인하여 결핵에 대해 무지했고 두려움을 갖고 있는 조선인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40년 강제 추방될 때까지 봉사를 하였고 그 후 인도에 가서 또다시 의료봉사를 펼쳤다.
홀(W. J. Hall)을 비롯한 부인 로제타 셔우드 홀(R. S. Hall), 아들 셔우드 홀(S. Hall), 그리고 딸까지 가족 모두가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악한 나무인지 선한 나무인지는 열매를 보고 판단할 수 있는데 한국의 초기교회 시기의 열매는 ‘mission by love\'로 선한 사랑의 열매를 맺었다. 이 열매를 통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승리할 수 있었고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들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며 이기적인 열매를 맺고 있다. 우리는 조선과 조선인들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며 봉사했던 선교사들을 기억하고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한다.
이렇게 해서 이덕주 교수님의 1주차 강의가 끝났습니다. 저는 이강의를 들으면서 진짜 선교사님들이 정말 우리나라에까지 오셔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를 알수 잇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께 감사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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