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전쟁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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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갑오농민전쟁 개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갑오농민전쟁 개관


1. 갑오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조선봉건사회는 지주-전호관계를 기축으로 운영되었다. 이 관계는 견고한 봉건적 신분제와 이를 정당화하는 성리학에 의해 유지되었다.

17·18세기 이후 경작기술의 발달 특히 이앙법의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이 발달하였다. 이로인한 잉여농산물의 증가는 자연히 시장경제의 발달을 촉진하였고, 한편 생산자는 시장을 상대로 한 생산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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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부민란

고부는 인근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넓은 평야와 28개의 주변 촌락을 거느린 가장 번성한 고을이었다. 줄포, 염포, 동진, 사포와 같은 주위의 나루들을 통하여 어선과 상선이 활발하게 왕래했고 주변에서 나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이곳에 모였다. 지방 관리들의 학정과 탐학이 극에 달한 상항에서 이곳은 중앙 관리들이 뒷돈과 권세를 동원하여 서로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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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강령(1894년 3월 25일)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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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집강소 통치


농민군은 점령지역에 대한 자치제를 실시하였다. 농민들의 자치기구가 집강소였다. 집강소는 전라도 운봉과 나주를 제외한 53개군에 설치되었다. 전봉준은 금구현 원평을 중심으로, 김개남은 남원을 거점으로 전라좌도를, 손화중은 광주와 장성일대를 중심으로 전라우도를 각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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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지방의 갑오농민전쟁



남원지방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김개남 부대의 주요 근거지였다. 김개남은 그 해 6월 25일부터 10월 14일(날짜는 양력 표기임)까지 남월을 근거로 전라우도의 금산·무주·진안·장수·용당·임실·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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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봉 준

전봉준은 고창의 당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상놈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으나 보잘것 없는 집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전창혁은 유민처럼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이런 여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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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부는 인근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넓은 평야와 28개의 주변 촌락을 거느린 가장 번성한 고을이었다. 줄포, 염포, 동진, 사포와 같은 주위의 나루들을 통하여 어선과 상선이 활발하게 왕래했고 주변에서 나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이곳에 모였다. 지방 관리들의 학정과 탐학이 극에 달한 상항에서 이곳은 중앙 관리들이 뒷돈과 권세를 동원하여 서로 부임하려고 노리던 \'물 좋은\' 고장이었다. 당연히 고부 농민들은 갖가지 세금과 잦은 부역에 시달리며 역대 수령들에게 이모저모로 뜯기느라 고달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892년 5월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부임하면서 그는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특히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우기 위해 돈을 거두는가 하면, 농민을 함부로 징발하여 보를 쌓아 수세를 거두어 들였다. 원래 정읍천 아래에는 배들평 농민들이 쌓아 물을 끌어다 쓰던 만석보가 있었다.
조병갑은 그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 보를 쌓았다. 새로 만든 보는 쓸데없이 높아 홍수가 지면 오히려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이 피해를 입었다. 거기다 가을이 되자,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당 두 말, 나쁜 논에서는 한 말씩 수세를 걷었다. 농민들은 수십명씩 관아로 가서 보세를 감해달라고 진정했으나 조병갑은 오히려 농민을 난민 취급해 처벌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온건한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893년 11월 초순 전봉준 등 19명의 농민 지도자들은 죽산마을(현재는 주산마을)의 송두호의 집에 모여 봉기의 당위성을 알리는 격문과 행동목표를 쓴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사발통문에 적힌 행동강령 4개조항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을 침어한 탐리를 격징할 것.
3. 전주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행할 것.
이런 점에서 갑오농민전쟁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목표를 가지고 계획된 운동이었다.
1893년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이 났으나 뒷손을 써 1894년 1월 9일 다시 고부군수로 재발령받는다.
1월 10일 밤 배들평(梨坪) 말목장터에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향하는 삼거리에 있어서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이었다. 여기서부터 고부관아까지는 20여리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농민군은 1월 11일 새벽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농민군은 옥문을 열고 억울하게 갇힌 농민들을 석방하였고 창고를 헐어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농민군은 1월 25일 지형상 공격과 수비가 용이한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고부봉기가 일어나자 정부는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장흥부사였던 이용태를 고부 안핵사로 파견하였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회유책으로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그런데 이용태는 농민군에 가담했던 농민들을 색출하여 처벌하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3. 제1차 농민전쟁
한편 전봉준은 농민군 해산후 무장현 동학 대접주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원평의 김덕명 등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다가올 싸움을 준비하였다.
3월 20일 무장에 모인 4천여명의 농민군은 호남창의소 이름으로 \'탐학한 관리를 제거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음으로써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살려내는 것\'을 목표로 내세우고 무장의 여시뫼에서 창의문을 선포하였다. 무장을 출발한 농민군은 태인에서 최경선과 연합하고 22일 고부관아를 다시 점령하였다.
3월 25일에는 백산으로 중심 부대를 옮겼다. 이때 농민군들이 죽창을 들고 모여들기 시작하여 백산은 사람산이 되었다. 농민군이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표현이 생길만큼 백산에는 많은 농민군이 모여 들었다.
백산은 해발 47m의 낮은 야산이지만 정상에서는 사방이 탁 트여 주변에 펼쳐진 수십지의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형상 대단히 유리한 고지이다. 정상은 꽤 넓고 평평한 지형으로서 산성을 쌓으면 그 안에 300∼400명의 군사를 주둔시킬수 있고, 성 바깥 주위에 배치할 수 있는 군사까지 합치면 천명 이상도 주둔이 가능한 공격과 수비에 대단히 유리한 요새였다.
농민군은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대장으로,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으로,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로, 최경선을 영솔장으로,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추대하였다. 농민군은 행동지침으로 4대 강령과 농민군에 동참할 것을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3월 26일 전주를 향해 진군하였다.
4대 강령(1894년 3월 25일)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4.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를 모두 없앤다.
격문(1894년 3월 27일)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맏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름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갑오 3월 27일
호남창의대장소 재백산
3월 29일 농민군은 태인을 점령하고 부안 동헌을 공격하여 농민군의 지배아래 두었다.
농민군의 세력이 커지자 전라 감사 김문현은 감영군과 보부상패의 연합군으로 농민군을 진압하러 나섰고, 중앙정부도 홍계훈을 양호 초토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4월초 감영군과 보부상패 연합군이 고부로 진격해오자 지형에 익숙한 농민군은 이들을 황토재로 유인하여 공격하였다. 4월 4일 감영군이 화호나루터에 진을 치자 농민군은 부안에서 매교로 나와 감영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농민군은 패한척 하면서 부안 쪽으로 달아났다. 후퇴하던 농민군은 두패로 나누어 한패는 고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농민군은 감영군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도교산 위로 올라가서 능선을 따라 남쪽의 시사봉으로 옮겼다. 감영군은 농민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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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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