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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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약성서의 종말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가장 중요한 단어이다. 요한복음 안에서 “때”로 번역되는 희랍어는 다음과 같이 3종류의 단어가 있다: 카이로스(kairos), 크로노스(chronos), 호라(hora) 등. 이 단어들 중에서 chronos는 일반적인 시간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고, kairos와 hora는 요한의 종말론적인 시간 개념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A. 종말론적인 사건의 때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오심이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의 “때”는 예수의 첫 번째 오심의 사건을 현재의 시간을 의미하는 “지금”(nun)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된다 :
… 당신들이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될 때(hora)가 옵니다(4,21).
과연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hora)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nun)입니다(4,23).
…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hora)가 오고 있으니 바로 지금(nun)입니다(5,25).
“아버지께 예배할 때,” “죽은 이들의 깨어남의 때”는 모두 하느님이 정하신 종말론적인 시간이다. 하느님에 의해 정해진 때는 정해진 시간보다는 상황이나 징조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때는 종말론적인 사건과 연관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때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으로 실현된다. 사마리아 여자는 이 때를 메시야가 오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4,25), 미래적인 종말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지만, 요한은 종말의 때가 이미 실현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이며(4,26), 그의 오심과 함께 하느님의 종말론적 때가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 실현되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신을 예배하고 죽은 자가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때는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B. 나의 때
요한은 예수의 오심을 “지금”이라는 단어와 함께 종말론적인 때로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예수는 그의 삶 가운데서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시간을 종말론적으로 “나의 때”로 표현한다.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2,4; hora, 7,6; kairos). 유대 당국자들이 예수를 죽일 모의를 하였어도(5,18) 그들이 손을 대지 못하고 붙잡지 못한 것은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고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7,30; 8,20).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의 시간, 즉 예수의 때는 예수가 스스로 결정한다(12,23). 12장 23절 전까지 예수가 스스로 예시했던 “나의 때”가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그 시간은 역사적인 예수 스스로가 견디기 힘든 수난과 고난의 시간이지만 예수는 바로 이 때를 위해서 세상에 왔다(12,27). 예수는 “지금”(nun; 12,27) 자신이 죽음의 시간을 가져야 함을 결단하고 있다.
예수의 현재적인 십자가의 죽음은 곧 아버지께 가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13,1). 위로부터 즉 하늘로부터 내려온(descent) 예수는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 가야함(ascent)을 강조한다(7,33; 8,21). 그 때는 곧 인자가 아버지께로 가는 “떠남”(depatrure)의 때이고(3,13; 6,62), “들리움”(exaltation)의 때이기도 하다(3,14; 8,28). 이 사건은 물론 “지금” 일어난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당신이 지금(nun)은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hysteron) 따라올 것입니다”(13,36)고 말한 것처럼 지금이라는 현재의 시간에 십자가 사건의 우선권을 두고 있다. 이와같이 요한은 예수의 현재적인 십자가의 사건 안에 모든 종말론적인 시각들을 포함시켰다.
더 나아가 예수의 때는 죽음의 때임과 동시에 또한 영광의 때이기도 하다(12,23; 17,1).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영화롭게 되는 시간임을 깨닫고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의 기도,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12,28)는 예수의 삶이 아버지께 복종하는 삶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7,18; 8,50,54). 예수의 죽음의 시간이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때임을 보여 주고 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이 드러나는 순간 예수는 그 때가 곧 영광의 때임을 선언한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인자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얻으셨도다”(13,32). 하느님의 뜻을 따라 죽음을 결심하고 죽음의 시간을 감지한 “지금”(nun)이 곧 영광의 때이다(13,31).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나의 때” 안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모두 결합되어 있다.
C. 심판과 부활의 때
심판, 영생, 부활과 같은 용어들은 모두 전형적인 종말론적인 용어들이다. 공관복음서에서 종말론적인 용어로 쓰이는 “하느님의 나라”와 같은 용어는 요한복음서는 쓰여지지 않는다. 대신에 심판과 부활과 같은 주제가 요한복음의 종말론을 특징지어 주고 있다. 이 용어들은 모두 요한의 종말론적인 시간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심판이라는 단어는 전통적으로 묵시 사상적이며 종말론적인 용어중의 하나이다. 요한은 심판의 때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차원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 전통적인 심판의 때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역사의 마지막 날에 하느님이 심판할 것이라는 묵시 사상적인 미래의 심판에 관해서 언급한다(5,29; 12,48; 6,40.54; 15,2 참조). 특히 요한 복음 15,18-16,4에 언급된 환난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직전에 신앙인들이 핍박을 받는 “메시야적 환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의 이 땅에 오심의 사건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심판의 때”이기도 하다(9,39). 예수의 오심으로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이는 것 자체가 심판이기 때문이다(1,5). 예수의 오심은 어두운 세상을 심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배자인 사탄이 심판 받았음을 의미한다: “이제 이 세상이 심판을 받습니다. 이제야말로 세상의 두목이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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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7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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