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역사와 발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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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태권도 역사와 발전과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고 있었다. 그들은 1946년 7월경 서울의 田祥燮, 李元國, 尹炳仁과 개성의 盧秉直 등이 주동이 되어 산재한 도장들을 총괄하는 협회부터 결성코자 2,3 차 화합을 가졌으나 실패하고, 일단 한국 무도의 표준형과 통일된 지도방법에 합의를 보았다.
그리하여 5, 6년간 각자의 후배만을 육성하고 있던 중 뜻하지 않은 민족의 비극6·25 동란이 터져 온 나라가 전란의 재화에 휩싸이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태권도계도 예외일 수 없이 여러 지도자들이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나 그 중에서 임시수도 부산에 와 있던 李鐘佑, 盧秉直, 黃琦, 玄鐘明, 曺寧柱, 金仁和 등이 주축이 되어 의욕에 찬 대한공수도협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거듭된 단합과 분열, 태권도계 표류
그러나 1개 월도 채 안되어 黃琦가 탈퇴했으며, 그는 서울 환도 후 당수도협회를 조직해 가지고 대한체육회에 가입하려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부산에서 발족된 공수도협회의 그 당시 회장은 李重宰, 부회장은 閔寬植이었다. 그런 한편, 청도관을 중심으로 또 하나의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그 명칭은 태권도협회로서 첫 회장에 崔泓熙 육군소장, 부회장에 尹快炳, 盧秉直, 이사장에 黃琦가 선임되었다. 이와 같이 유사단체가 난립한 가운데 5 · 16 혁명을 맞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포고령 제6호를 내려 사회단체 재등록을 명(命)함으로써 문교부는 1961년 7월 12일자로 공문을 보내 대한수박도회 · 공수도송무관 · 강덕원무도회 · 한무관중앙공수도장의 대표들을 소집해 놓고 통합을 주선했으나 명칭 문제로 결론이 나지 않자 옵서버로 참석했던 李鐘佑가 중재에 나섰다. 결국 嚴雲奎, 李南石, 李鐘佑가 崔泓熙에게 타협안을 내놓음으로써 '대한태수도협회'로 낙찰을 보게 되었다.
마침내 9월 14일 통합창립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업무 추진을 7인위원회에 위촉했다. 9월 19일에는 이사회를 조직하고 임원진을 구성, 대한태수도협회가 공식 출범을 했는데, 회장은 공석, 부회장에는 嚴雲奎, 李鐘佑가 선임되었다. 62년 6월 25일 대한체육회에 가입하고, 10월 5일 사무실도 그곳으로 이전한 대한태수도협회는 그 다음해인 63년 6월 24일 임원을 개선, 회장에 蔡命新, 부회장에 李鐘佑, 전무이사에 嚴雲奎가 선임되었는데, 65년 8월 5일에 와서 대한태수도협회는 대한태권도협회라는 명칭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金雲龍 등장, 태권도계 정립 ·활기
그로부터 대한태권도협회는 66년 1월 30일 회장에 盧秉直, 부회장에 嚴雲奎, 배영기, 김영택, 67년 1월 30일 회장서리에 金 鎔采, 부회장에 盧秉直, 이강익, 68년 1월 회장에 김용채, 부회장에 嚴雲奎, 이강익 69년 1월 12일 회장에 김용채, 부회장에 嚴雲奎, 李南石으로 이어져 왔으며, 태권도가 매년 개최되는 전국체전에 정식 종목으로 참가한 것은 64년 9월 제 45회 대회부터였다.
그 외에도 63년부터 매년 5, 6회 이상의 태권도 경기 대회가 개최되어 왔는데, 66년부터는 대통령기 쟁탈 전국단체대항 태권도 대회(10월 28일), 68년부터는 주한 외국인 개인선수권대회96월 16일), 70년부터는 전국초등학교 태권도 개인선수권대회(10월 24일)와 함께 여자부 태권도 선수권대회가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같이 태권도가 각계 각층의 호응을 받으며 확산되고, 온 국민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자, 군에서도 그 우월성과 국방체육으로서의 가치를 인식, 정식수련 종목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실제로 월남전 등에서 참전 용사들이 태권도 기술을 이용, 실전에서 맹위를 떨치자 한국 태권도는 세계적인 관심거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1971년 급기야 태권도는 무도 스포츠로서 그 가치와 우월성을 인정받아 우리나라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그런 가운데 1971년 1월, 드디어 온 태권도계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다름 아닌, 다방면에 전천후적인 능력과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정력적인 활약으로 명망이 높던 金雲龍 현 국기원 원장이 대한태권도협회의 7대 회장으로 취임한 것.
그 해로 그는 그의 첫 공약 사업이자 모든 태권도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중앙도장 건립에 착수, 바로 그 다음해인 1972년 11월 30일 감격적인 개관 테이프를 끊음으로써 한국 태권도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73년 2월 6일 중앙도장을 태권도의 전당 '국기원'으로 명명(命名). 그 곳을 구심점으로 우리의 태권도는 국내는 물론 지구촌 어디에서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런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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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8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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