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름 아닌 '낯선 우리의 모습'이다. 호기심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긴장하고 경계하며 낯선 사람·문물과 처음 조우하던 순간들…. 흥미로운 과거 기록을 넘어 세계화 시대, 다문화가정이 늘고 있는 현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개항기 한반도 외국공관은 스파이 기지” [동아일보] 2009-01-16
日-러-美 등 침략-수탈 위한 정보 수집 주력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서 펴내
개항기 한반도에 설치된 일본 영사관의 직원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민정을 파악하고 지역의 인구와 면적, 경제상황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이렇게 파악된 정보들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기초 자료로 활용됐다.
루시어스 푸트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비롯해 초기 미국의 외교관들은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각종 사업권을 따내는 데 주력했다. 재한 러시아 공사관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려고 했던 본국의 야심에 따라 동해안과 함경도 지방을 탐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처럼 19세기 말∼20세기 초 개항기 외국공관들은 한반도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본국의 이익 실현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개항기 외국공관을 ‘한반도 침략과 수탈의 전초기지’로 분석한 ‘개항기의 재한 외국공관 연구’를 최근 펴냈다.
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는 “개항기 각국의 공관은 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넘어 우리 사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개항기 재조선 일본공관 연구’에서 “서울 부산 원산 등 7개 일본 영사관에 파견된 일본인들은 곡창지대의 작황, 지역별 특산물, 도량형, 각지의 인구, 지형과 지세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한반도를 조사했다”면서 “영사관의 보고는 조선 침략을 위한 지침서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손정숙 이화여대 강사가 쓴 ‘한국 주재 미국공사관의 외교전략’에 따르면 미국의 외교관들은 한반도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개입은 피하면서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통해 경제 이권을 챙기는 데 주력했다. 푸트 공사는 미국의 회사들 대신 왕실과 직접 교섭을 벌여 왕실 물품 구입 대행권, 증기선 운항권, 궁중 전기 가설 독점권 등을 따냈고 후임인 호러스 앨런 공사도 왕실을 통해 금광 철도 전차 전기 전화 사업권을 가져갔다.
손 강사는 “기존의 많은 연구는 주한 미국공사들을 조선의 독립 보전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하지만 이들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친한적’ 제스처를 취한 것일 뿐이며 이들에게 조선의 독립 보전은 1차 과제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나혜심 성균관대 강사는 ‘개항기 한국의 독일공관 연구’에서 “독일은 과잉 생산과 인구 증가, 원료 부족 등 산업자본주의 후기에 들어 처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아시아로 진출했다”면서 “독일은 조선의 운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독일 영사들은 조선 왕실에 중립국 선언을 부추기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은 사안은 비스마르크 총리에게 직접 보고하면서 한반도의 정세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말했다.
1882년은 조선과 미국이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해이다.
그 전부터 있었던 열강들과의 교류 시도가 외교적으로 공식화된 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에는 많은 서양인들이 혹은 외교관으로 혹은 선교사로 혹은 사업가로 혹은 사기꾼으로 찾아오고 머물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들이 기록으로 남겨졌다. 지금으로부터 127년전의 기록이지만, 그 옛날의 삶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후세들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후손들에게 그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위의 보여주는 '서양인의 조선살이, 1882-1910'이다.
내가 이 책을 손에 잡게 된 것은 작년 연말 덕수궁에서 있었던 한독수교 125주년 기념 사진전시회를 다녀오고 나서, 구한말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127년전부터 약 28년간의 서울 중심의 구한말 모습을 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내용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이 아닌,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들을 통해서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문명화 수준을 떠나서, 문화적 충격을 받던 외국인들의 시선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읽어낼 때, 우리가 미쳐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좀 더 신선한 시각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한말은 열강들의 한반도 점령에 혈안이 되었던 시기로서, 나약해져가는 조선의 조정과 이 조정을 둘렀단 각 열강들의 모습들 속에서, 새로운 문명과 문화 그리고 의학과 기술이 전파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순진했는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모습들을 볼 때, 그 당시의 혼란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천연두를 미신과 관련하여 굿거리로 해결할려고 했다는 부분이나, 사진과 사진기의 소개와 함께 발생한 영아사건 등은 새로운 문물에 대해서 우리가 가진 불필요한 오해나 저항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자동차의 도입에도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혼비백산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증언이다. 물론 새로운 문물에 문화적 충격없이 수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나의 관심은 문화적 충격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적 충격을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한 것이 흥미롭다.
아울러 금광사업을 통해서 단 1 달러도 벌지 못한 고종의 모습이나, 증기선을 도입해서 해운사업을 할려다 사기를 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바라볼 때, 오늘날에도 국제적 외교나 비즈니스에서도 타산지석을 삼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에는 귀한 사진들이나 사진을 근거로 한 삽화들은 책을 읽는 이들에게 흥미를 더해준다. 특히 사진이라는 것은 찍는 사람들의 의도도 중요하겠지만, 그 당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평가를 나름대로 받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들이 가득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민속의 명절 설을 맞이하면서 막연한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조선살이를 했던 서양인들의 기록에 다시금 감사를 드리면서.....
“개항기 한반도 외국공관은 스파이 기지” [동아일보] 2009-01-16
日-러-美 등 침략-수탈 위한 정보 수집 주력 /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서 펴내
개항기 한반도에 설치된 일본 영사관의 직원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민정을 파악하고 지역의 인구와 면적, 경제상황 등을 면밀히 조사했다. 이렇게 파악된 정보들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기초 자료로 활용됐다.
루시어스 푸트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비롯해 초기 미국의 외교관들은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각종 사업권을 따내는 데 주력했다. 재한 러시아 공사관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려고 했던 본국의 야심에 따라 동해안과 함경도 지방을 탐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처럼 19세기 말∼20세기 초 개항기 외국공관들은 한반도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본국의 이익 실현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개항기 외국공관을 ‘한반도 침략과 수탈의 전초기지’로 분석한 ‘개항기의 재한 외국공관 연구’를 최근 펴냈다.
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는 “개항기 각국의 공관은 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넘어 우리 사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그는 ‘개항기 재조선 일본공관 연구’에서 “서울 부산 원산 등 7개 일본 영사관에 파견된 일본인들은 곡창지대의 작황, 지역별 특산물, 도량형, 각지의 인구, 지형과 지세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한반도를 조사했다”면서 “영사관의 보고는 조선 침략을 위한 지침서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손정숙 이화여대 강사가 쓴 ‘한국 주재 미국공사관의 외교전략’에 따르면 미국의 외교관들은 한반도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개입은 피하면서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통해 경제 이권을 챙기는 데 주력했다. 푸트 공사는 미국의 회사들 대신 왕실과 직접 교섭을 벌여 왕실 물품 구입 대행권, 증기선 운항권, 궁중 전기 가설 독점권 등을 따냈고 후임인 호러스 앨런 공사도 왕실을 통해 금광 철도 전차 전기 전화 사업권을 가져갔다.
손 강사는 “기존의 많은 연구는 주한 미국공사들을 조선의 독립 보전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하지만 이들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친한적’ 제스처를 취한 것일 뿐이며 이들에게 조선의 독립 보전은 1차 과제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나혜심 성균관대 강사는 ‘개항기 한국의 독일공관 연구’에서 “독일은 과잉 생산과 인구 증가, 원료 부족 등 산업자본주의 후기에 들어 처한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아시아로 진출했다”면서 “독일은 조선의 운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독일 영사들은 조선 왕실에 중립국 선언을 부추기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은 사안은 비스마르크 총리에게 직접 보고하면서 한반도의 정세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말했다.
1882년은 조선과 미국이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해이다.
그 전부터 있었던 열강들과의 교류 시도가 외교적으로 공식화된 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에는 많은 서양인들이 혹은 외교관으로 혹은 선교사로 혹은 사업가로 혹은 사기꾼으로 찾아오고 머물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들이 기록으로 남겨졌다. 지금으로부터 127년전의 기록이지만, 그 옛날의 삶의 모습을 알지 못하는 후세들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후손들에게 그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위의 보여주는 '서양인의 조선살이, 1882-1910'이다.
내가 이 책을 손에 잡게 된 것은 작년 연말 덕수궁에서 있었던 한독수교 125주년 기념 사진전시회를 다녀오고 나서, 구한말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127년전부터 약 28년간의 서울 중심의 구한말 모습을 보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내용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이 아닌,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들을 통해서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문명화 수준을 떠나서, 문화적 충격을 받던 외국인들의 시선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읽어낼 때, 우리가 미쳐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좀 더 신선한 시각을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한말은 열강들의 한반도 점령에 혈안이 되었던 시기로서, 나약해져가는 조선의 조정과 이 조정을 둘렀단 각 열강들의 모습들 속에서, 새로운 문명과 문화 그리고 의학과 기술이 전파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순진했는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모습들을 볼 때, 그 당시의 혼란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서 천연두를 미신과 관련하여 굿거리로 해결할려고 했다는 부분이나, 사진과 사진기의 소개와 함께 발생한 영아사건 등은 새로운 문물에 대해서 우리가 가진 불필요한 오해나 저항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자동차의 도입에도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혼비백산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증언이다. 물론 새로운 문물에 문화적 충격없이 수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나의 관심은 문화적 충격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적 충격을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한 것이 흥미롭다.
아울러 금광사업을 통해서 단 1 달러도 벌지 못한 고종의 모습이나, 증기선을 도입해서 해운사업을 할려다 사기를 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바라볼 때, 오늘날에도 국제적 외교나 비즈니스에서도 타산지석을 삼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에는 귀한 사진들이나 사진을 근거로 한 삽화들은 책을 읽는 이들에게 흥미를 더해준다. 특히 사진이라는 것은 찍는 사람들의 의도도 중요하겠지만, 그 당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평가를 나름대로 받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들이 가득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민속의 명절 설을 맞이하면서 막연한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그런 면에서 조선살이를 했던 서양인들의 기록에 다시금 감사를 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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