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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조선관’을 읽고
본문내용
에 반대하거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태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러했으니 동시대 일본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겠지요.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 반제 전선에 조선인들의 힘을 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국인들도 한국을 진정으로 도우려 했다기보다는 일본과의 싸움에 우리의 선열들을 이용한 면이 큽니다. 국민당은 의열(義烈)투쟁 등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일본이 항복하기 전까지 우리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한 바 없으며, 공산당도 조선의용군을 자신들의 팔로군 휘하에 두어 써먹었을 뿐 중국 내에서 한국인의 독자적 투쟁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 궈모뤄(郭沫若, 1892~1978)가 지은 항일소설 『목양애화(牧羊哀話)』(1919)는 당시 중국인들의 본심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양반 민숭화(閔崇華)와 민패이(閔佩荑)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우리 민족에 대한 동정을 표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화를 숭상한다”는 뜻인 “숭화”와 “(일제에 항거하는) 오랑캐에 탄복했다”는 의미인 “패이”에 알 수 있듯이, 20세기 들어서도 중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여전히 중국 중심의 우월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식민지시대 일본의 우파들은 기껏해야 자치론을 내비칠 뿐, 한국인의 독립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비판한 일본 최고의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2~1996)까지도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재일동포 문제 등에 대해 침묵할 정도였지요.
물론 박노자 교수님 말씀대로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반제투쟁에서 한국인들과 연대를 모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방침에 따라 일본 내에서 한국인들의 독자 단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인의 반제 투쟁은 일본인의 그것을 대신하는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선사연구회”를 만들어 황국사관 비판에 앞장섰던 하타다 타카시(旗田巍, 1908~1994)의 고백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모멸적 인식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줍니다.
“일본의 공산주의운동ㆍ노동운동의 강령 속에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명문화되어 있기는 했으나, 일본인이 해야 하는 운동에 한국인을 동원하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많은 희생이 예상되는 곤란한 투쟁의 경우 한국인에게 선봉을 맡기는 일이 많았다.”
한 세기 전 우리는 오리엔탈리즘과 중화주의를 표방한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자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약자였습니다. 심지어 일제 침략에 맞서 계급적 연대를 도모하던 중국이나 일본의 사회주의자ㆍ무정부주의자들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 선열들을 동원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멸시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요즘은 예전에 우리를 짓밟은 사람들이 다시는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지 못하도록 와신상담(臥薪嘗膽)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 반제 전선에 조선인들의 힘을 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국인들도 한국을 진정으로 도우려 했다기보다는 일본과의 싸움에 우리의 선열들을 이용한 면이 큽니다. 국민당은 의열(義烈)투쟁 등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일본이 항복하기 전까지 우리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한 바 없으며, 공산당도 조선의용군을 자신들의 팔로군 휘하에 두어 써먹었을 뿐 중국 내에서 한국인의 독자적 투쟁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 궈모뤄(郭沫若, 1892~1978)가 지은 항일소설 『목양애화(牧羊哀話)』(1919)는 당시 중국인들의 본심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양반 민숭화(閔崇華)와 민패이(閔佩荑)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우리 민족에 대한 동정을 표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화를 숭상한다”는 뜻인 “숭화”와 “(일제에 항거하는) 오랑캐에 탄복했다”는 의미인 “패이”에 알 수 있듯이, 20세기 들어서도 중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여전히 중국 중심의 우월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식민지시대 일본의 우파들은 기껏해야 자치론을 내비칠 뿐, 한국인의 독립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비판한 일본 최고의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2~1996)까지도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재일동포 문제 등에 대해 침묵할 정도였지요.
물론 박노자 교수님 말씀대로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반제투쟁에서 한국인들과 연대를 모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방침에 따라 일본 내에서 한국인들의 독자 단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인의 반제 투쟁은 일본인의 그것을 대신하는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선사연구회”를 만들어 황국사관 비판에 앞장섰던 하타다 타카시(旗田巍, 1908~1994)의 고백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모멸적 인식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줍니다.
“일본의 공산주의운동ㆍ노동운동의 강령 속에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명문화되어 있기는 했으나, 일본인이 해야 하는 운동에 한국인을 동원하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많은 희생이 예상되는 곤란한 투쟁의 경우 한국인에게 선봉을 맡기는 일이 많았다.”
한 세기 전 우리는 오리엔탈리즘과 중화주의를 표방한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자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약자였습니다. 심지어 일제 침략에 맞서 계급적 연대를 도모하던 중국이나 일본의 사회주의자ㆍ무정부주의자들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 선열들을 동원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멸시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요즘은 예전에 우리를 짓밟은 사람들이 다시는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지 못하도록 와신상담(臥薪嘗膽)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