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이미지에 담긴 설교
본문내용
된다(요15:3; 엡5:26-27; 시119:9). 또한 하늘에서 내리는 시원한 비와 이슬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하는데 적절한 그림으로 쓰인다(신32:2; 사55:10-11; 호14:5). 반면 폭풍우나 ‘사나운 물결’은 인생의 고난을 가리키는 데 자주 쓰인다(시18:16; 42:7; 46:3; 88:7; 93:3).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해 선지자들이 종종 썼던 이미지는 결혼이다(사43:4; 49:14 이하; 62:4이하; 63:9; 렘2:2, 20-25; 3:6, 13; 30:14; 겔16:23, 33-37; 23:5, 9, 22). 호세아 선지자는 고멜이라는 부정한 여자와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관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숭배(즉 창녀짓)에서 돌이켜 주께로 돌아오라고 권하는 호세아서의 베경을 이룬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그리고 있다(엡5:22-33; 계21:1-4을 보라). 또 아가서가 묘사하는 달콤한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의 백성과 주님 사이에 나누는 체험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꽤 된다.
창세기 3장의 이미지는 뱀, 먹는 행위, 입는 행위 등이다. 여기서 뱀으로 등장하는 사탄(창3:1)은 ‘속이는자’(고후11:3)라는 그림과 연결된다. 또한 사자로 묘사되는 사탄은 파괴자(벧전5:8-9)의 속성을 갖고 있다. 가라지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하신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고 여겨진다. 먹는 행위 이미지(창2:16-17; 3:1이하)는 성경에서 죄 된 행위나 거룩한 행위 모두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야 한다(마5:6). 그러나 죄인들은 악을 삼키고 싶어한다. 이렇듯 맛보는 것, 먹는 것, 삼키는 것, 그리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것 등이 모두 자기 존재 안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은유적 표현으로 오늘날도 쓰인다. “그 많은 재산을 꿀꺽 삼켰단 말야?”하는 말이나 “내가 그 말 좀 곰곰 씹어보고 대답하지”하는 말, 또는 “그렇게 좋은 일이면 나도 한 번 맛좀 보자”와 같은 표현이 다 그런 것들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된다. 악한 자가 악한 것을 탐내어 먹고 삼키면 더욱 악해질 따름이다. 반면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일을 굶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로운 주림을 채워주신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자기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은유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모세의 율법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고 정죄했다(요6:53 이하).
이제 옷 입는 행위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흠이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아담과 이브는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2:25). 그러나 한 번 죄를 짓고 나자 이들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가릴 것을 찾고 있다(창3:7).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몸을 가렸던 무화과나무 잎 대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창3:21). 이 사실에서 아담과 이브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무언가 피를 흘려야만 된다는 사실을 암시받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옷 입는 행위로 인격이나 행동을 묘사한다. 그는 우리에게 옛생활을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벗으라’고 훈계하며, 은혜의 새생활을 ‘입으라’고 권한다(롬13:11-14; 엡4:17-5:21; 골3:1-17). 또한 마귀를 대적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갑옷으로 무장하라고 권유한다(엡6:10-18). 그 외에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여러 부분에서 바울이 무덤에 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수의를 염두에 둔 듯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새로운 출발을 사람들이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는 일로 묘사하고 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올 때 야곱의 가족이 한 일도 그렇고(창35:1-3), 요셉이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도 그렇다(창41:14).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여호와를 뵐 때도 옷을 깨끗이함으로써 자신을 준비시켰다(출19:10,14). 사제나 레위인들이 사역을 할 때는 늘 몸을 깨끗이하고 특별한 옷을 입었다(출29장; 민8:5-7, 21). 또한 부정을 탄 유대인이 자신을 정화하는 의식 가운데 하나가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는 것이었다(민19:17-22).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정결의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슥3장). 대제사장이 불결한 옷을 입고는 주님 앞에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성경 역사에서 의복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가지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는 사무엘상 15장에서 주께서 사울 왕을 버리셨을 때의 사건이다.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삼상15:27-28).
다른 하나는 열왕기상 11:26-39의 사건이다. 본문에서 선지자 아히야는 자기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서 그 열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고 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열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을 상징하는 행위다.
창세기 4장에는 주목해야 할 그림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땅이 입을 벌려 아벨의 피를 받았다’는 표현이다(창4:11). 하나님께서는 피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창9:4-6; 레17:11; 신12:23; 시72:14). 그리고 피를 먹거나 피가 있는 채로 고기를 먹지 말라고 명하신다(레3:17; 신12:16). 이같은 명령에는 건강에 관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피가 장차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실 하나님 아들의 보혈을 가리키기 때문이다(벧전1:18-19). 아벨의 피는 땅에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했다(창4:10).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를 호소한다(히12:24).
이제 ‘냄새’에 관한 이미지를 살펴보자(창34:30).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족속에게 행한 일 때문에 위협을 받게 되자 야곱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창34:30;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조명하기 위해 선지자들이 종종 썼던 이미지는 결혼이다(사43:4; 49:14 이하; 62:4이하; 63:9; 렘2:2, 20-25; 3:6, 13; 30:14; 겔16:23, 33-37; 23:5, 9, 22). 호세아 선지자는 고멜이라는 부정한 여자와 결혼을 하는데, 이 결혼관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숭배(즉 창녀짓)에서 돌이켜 주께로 돌아오라고 권하는 호세아서의 베경을 이룬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그리고 있다(엡5:22-33; 계21:1-4을 보라). 또 아가서가 묘사하는 달콤한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의 백성과 주님 사이에 나누는 체험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꽤 된다.
창세기 3장의 이미지는 뱀, 먹는 행위, 입는 행위 등이다. 여기서 뱀으로 등장하는 사탄(창3:1)은 ‘속이는자’(고후11:3)라는 그림과 연결된다. 또한 사자로 묘사되는 사탄은 파괴자(벧전5:8-9)의 속성을 갖고 있다. 가라지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하신 표현과 일맥 상통한다고 여겨진다. 먹는 행위 이미지(창2:16-17; 3:1이하)는 성경에서 죄 된 행위나 거룩한 행위 모두에 적용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야 한다(마5:6). 그러나 죄인들은 악을 삼키고 싶어한다. 이렇듯 맛보는 것, 먹는 것, 삼키는 것, 그리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것 등이 모두 자기 존재 안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은유적 표현으로 오늘날도 쓰인다. “그 많은 재산을 꿀꺽 삼켰단 말야?”하는 말이나 “내가 그 말 좀 곰곰 씹어보고 대답하지”하는 말, 또는 “그렇게 좋은 일이면 나도 한 번 맛좀 보자”와 같은 표현이 다 그런 것들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된다. 악한 자가 악한 것을 탐내어 먹고 삼키면 더욱 악해질 따름이다. 반면 의로운 사람은 의로운 일을 굶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의로운 주림을 채워주신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자기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은유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모세의 율법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고 정죄했다(요6:53 이하).
이제 옷 입는 행위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흠이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아담과 이브는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2:25). 그러나 한 번 죄를 짓고 나자 이들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가릴 것을 찾고 있다(창3:7).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몸을 가렸던 무화과나무 잎 대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창3:21). 이 사실에서 아담과 이브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무언가 피를 흘려야만 된다는 사실을 암시받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옷 입는 행위로 인격이나 행동을 묘사한다. 그는 우리에게 옛생활을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벗으라’고 훈계하며, 은혜의 새생활을 ‘입으라’고 권한다(롬13:11-14; 엡4:17-5:21; 골3:1-17). 또한 마귀를 대적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갑옷으로 무장하라고 권유한다(엡6:10-18). 그 외에도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여러 부분에서 바울이 무덤에 남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수의를 염두에 둔 듯한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새로운 출발을 사람들이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는 일로 묘사하고 있다. 야곱이 벧엘로 돌아올 때 야곱의 가족이 한 일도 그렇고(창35:1-3), 요셉이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도 그렇다(창41:14).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여호와를 뵐 때도 옷을 깨끗이함으로써 자신을 준비시켰다(출19:10,14). 사제나 레위인들이 사역을 할 때는 늘 몸을 깨끗이하고 특별한 옷을 입었다(출29장; 민8:5-7, 21). 또한 부정을 탄 유대인이 자신을 정화하는 의식 가운데 하나가 목욕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는 것이었다(민19:17-22).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정결의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슥3장). 대제사장이 불결한 옷을 입고는 주님 앞에 나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성경 역사에서 의복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가지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는 사무엘상 15장에서 주께서 사울 왕을 버리셨을 때의 사건이다.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삼상15:27-28).
다른 하나는 열왕기상 11:26-39의 사건이다. 본문에서 선지자 아히야는 자기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서 그 열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고 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열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을 상징하는 행위다.
창세기 4장에는 주목해야 할 그림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땅이 입을 벌려 아벨의 피를 받았다’는 표현이다(창4:11). 하나님께서는 피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창9:4-6; 레17:11; 신12:23; 시72:14). 그리고 피를 먹거나 피가 있는 채로 고기를 먹지 말라고 명하신다(레3:17; 신12:16). 이같은 명령에는 건강에 관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피가 장차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실 하나님 아들의 보혈을 가리키기 때문이다(벧전1:18-19). 아벨의 피는 땅에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호소했다(창4:10).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를 호소한다(히12:24).
이제 ‘냄새’에 관한 이미지를 살펴보자(창34:30).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족속에게 행한 일 때문에 위협을 받게 되자 야곱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창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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