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이 서양에 끼친 사상 스텐포드 리드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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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칼빈이 서양에 끼친 사상 스텐포드 리드편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배경
2. 기독교전래에서 1945년까지
3. 1945년에서 1979년까지
4. 1980년 이후
5. 종합과 정리

본문내용

이 점에 대한 부분적인 정리라고 할 수 있다. 스탠포드 리드가 지적한 바 있지만 서구 사회에서 칼빈의 영향력은 루터에 비해 보다 광범위했다. 16세기 초기에는 루터의 영향력이 지대했고, 빠른 속도로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지만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등 게르만 민족이 우세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곧 루터의 영향력은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빈의 영향력은 보다 광범위했고 영속적이었다. 칼빈의 가르침, 이를 칼빈주의라고 말한다면, 이 사상은 제네바에서 프랑스, 네델란드, 항거리, 그리고 스코틀랜드 등 다양한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때로 루터교를 대신하기도 했다. 정치적 박해, 지리적 한계,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끊임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칼빈과 그의 가르침은 16세기가 다 가기 전에 유럽의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절대주의 정부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집단을 형성했다. 이런 영향력의 확대는 16세기 칼빈주의가 유럽으로 확산되어 간 방식과 지리적 경로에 있다고 리드는 진단했다.
다음 세기 칼빈의 사상은 북미대륙으로 전파되었고, 19세기 선교운동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확산되어 19세기 말엽에는 장로교회의 전파와 함께 한국에도 칼빈이 소개되고 그의 신학과 교회개혁의 이상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과 칼빈주의의 역사적 지리적 확산을 고려해 본다면 칼빈이 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칼빈이 한국에 어떻게 소개되고 수용되었으며, 한국에서의 칼빈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를 역사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크게 3시기, 곧 기독교 전래에서 해방까지(1884-1945), 해방에서 1970년대까지(1945-1979), 그리고 1980년대 이후로 나눠서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 10년, 곧 2000년 이후 한국에도 여러 칼빈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저들의 저작이나 학위논문이 다수 발표되었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언급이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점에 대해 다루지 못했다.
이 글은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보완이 필요하지만 한국에서의 칼빈 연구가 어떻게 수행되어왔고, 칼빈주의 신학체계가 어떻게 수용되어왔던가를 헤아리는 데 작은 안내가 된다면 필자의 부족을 덮어주는 위안이 될 것이다.
2. 기독교전래에서 1945년까지
칼빈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884년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 선교사들의 도래 이후였다. 물론 기독교와 관계없이 서양사를 통하여 칼빈이 한국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 사실성은 매우 희박하다. 서양문물이 한국에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였지만 서양사에 대한 교육이나 지식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전래되는 19세기 후반부터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문호를 개방한 이후 서양의 역사는 이른바 개화사상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근대적 교육의 보급은 서양사 교육의 시작이 된다. 당시의 서양사 서적으로는 위원(魏源, 1794-1856)의 『해국도지(海國圖地)』나 왕도(王韜, 1828-1897)의 『보법전기(普法戰記)』등이 있었다. 전자가 세계 각국의 역사와 지리를 다룬 책인 반면에 후자는 비스마르크 시대의 프로이센의 국가적 발전과정을 유럽의 국제관계 하에서 취급한 책인데, 전자의 경우 16세기 역사를 취급했으나 내용이 간략했을 뿐만 아니라 독서층이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런 역사서가 칼빈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개신교 선교사가 도래한 이후인 1886년에 설립된 배제학당에서는 쉬필드(Sheffield)의 『만국사(萬國史)』번역본이 교습되었으나, 이것이 책으로 출판된 것은 1909년이었고 이때는 『中等萬國史』, 곧 중학교 세계역사교과서였다.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일했던 헐버트(H. B. Hulbert, 1863-1949)가 조선에서의 외국인식의 무지함을 보고 세상 돌아가는 일(時務)을 일깨우기 위해 세계의 역사 지리지인『민필지(士民必知)』를 한글로 집필했다. 이를 통해 종래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보다 넓은 세계를 보게 하려고 했으나, 이런 서양사 서적들도 칼빈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데 기여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사 국정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만국약사(萬國略史)』는 1896년 출판되지만 이 당시 서양사 교제나 학교교육은 일본의 그것을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인명, 지명 등 많은 고유명사들은 일본의 표기 방식을 따랐다. 1895년에서 1910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서양사 서적은 33종에 이르는데, 5권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일본인 학자의 책을 번안한 것이었다.
이런 일본인의 저작에서 ‘The Reformation’은 ‘종교개혁’(宗敎改革)으로 번역되었고, Calvin은 일본식으로 カルヴアン으로 음역되었다. 우리나라는 이 번역을 따라 ‘갈빈,’ ‘갈윈’ 등으로 표기되다가 현재의 ‘칼빈’으로 정리되었다. 말하자면 교회사가 아닌 서양사 서적에서는 16세기 종교적 인물로 칼빈이라는 이름을 거명하기는 했으나 그에 대한 특별한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못했다.
사실상 한국에서 칼빈이라는 인물이 처음 소개된 것은 평양신학교에서였다.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왕길지(G. Engel)와 부두일(William R. Foot, 1869-1930)에 의해 16세기 종교개혁에 관한 책이 쓰여지면서 칼빈과 그의 사적이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평양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첫 인물은 호주선교사 왕길지(G. Engel)였는데, 그는 1902년부터 교회사를 교수했다. 1915년에는 두 권의 교회사서를 편찬했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평양신학교에서의 교수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The Reformation을 ‘갱정사’(更正史), 혹은 ‘교회 개정사’로 번역하였고, 개신교회를 ‘갱정교’(更正敎)라고 불렀다. 또 Calvin을 ‘갈빈’으로 음역했다. 비록 왕길지의 교회사서가 1915년에 간행되었지만 그는 이전부터 이 용어를 채택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898년 내한한 부두일 또한 1925년에는 평양신학교의 대리교수, 1927년의 전임교수가 되지만 그 이전부터 평양의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는데, 1913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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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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