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unnel)\'로 명명된다. 사실상 유로터널(Euro Tunnel)이라는 명칭은 이 터널의 건설과 유지관리를 전담하는 민간회사의 이름이다. 이 회사는 영ㆍ불 양국정부로부터 건설공사 준공 후 운영, 유지관리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권한을 착공시점부터 55년동안 위임받아 관리한 후, 2042년에 양국 정부에 소유권을 넘겨주게 된다.
유로 터널사는 150억불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를 정부의 자금지원이나 보증 없이 주식공모와 은행융자로 조달했다. 이 공사는 국가간의 초대형 인프라건설을 순수민간자본이 주도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그러나 \'94년 터널의 개통이후,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심각한 경영난으로 인해 파산위기에 직면했었다. 당시 보도에 의하면 건설공사와 관련하여 채무액만 약 750억 프랑(한화 12조원)이고, 한해 지불이자액만 60억 프랑(한화 9600억원)이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96년 12월에는 터널 내부에서 차량화재사고가 발생하여 승객과 화물량이 격감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었다. 그러나 최근의 외신에 의하면, \'97년도에 이뤄진 유로 터널사의 구조조정에 이어, 최근 들어 승객과 화물량이 갈수록 폭증하여 머지않아 흑자전환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즉, 2004년경이면 이자 지급을 완료하고 2005년부터는 주주들에게 이익 배당까지 예상된다고 한다.
나아가서, 제2의 해저터널건설계획이 날로 구체화되고 있다고 한다. 기존의 포크스톤과 칼레를 왕래하는 기차전용의 터널은 2015년이면 포화상태에 이를 전망이다. 제2의 터널은 기존의 터널과 나란히 달리는 자동차 전용터널로 건설될 예정이라고 한다.
1. 건설추진 역사
유럽 대륙과 섬나라 영국을 육지로 연결시키려는 계획은 19세기부터 계속된 엔지니어들의 염원이었다. 이 해협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해저 터널, 교량, 잠수튜브 등 다양한 계획들이 제안되어 왔고, 신기술과 수송수단이 발달됨에 따라 보다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등장해왔다. 이 프로젝트는 1850년부터 19세기말까지, 프랑스가 터널건설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영국 의회 안에서는 찬성과 반대의견으로 갈라져 열띤 논쟁거리가 되었다. 영국입장에서는 섬나라 영국이 유럽대륙과 육지로 연결될 경우, 그 옛날 나폴레옹 군대처럼 프랑스가 일시에 침략해 올 수도 있다는 것과 침공시의 적절한 방어책이 크나큰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1) 19세기, 건설논쟁과 시도
■ 1802년 - 최초의 건설계획은 프랑스 엔지니어인 앨버트 파비에르(Albert Mathieu Favier)에 의한 말이 끄는 수레가 다닐 수 있는 터널 건설안이었다. 터널 중간지점에는 인공 섬을 두어 이곳에서 우편물을 나르는 말을 교대시키게 하였다. 또한 터널 내의 조명은 오일램프로 하고 환기용 굴뚝도 중간 중간에 설치되어 있다.
■ 1830년 - 젊은 기술자 드 가몽(De Gamond)은 이 터널 건설계획에 관심을 가진 뒤 무려 40년을 여기에 몰두했다. 그는 직접 수십 번의 바다 속 잠수를 통해 수심측량을 하여 해저의 등고선 지도를 만들고, 또한 해저지층이 터널 굴착에 적합한 백악기층이란 사실을 밝혀내었다. 1856년 드 가몽은 영국의 포크스톤과 캡그리스 구간의 철도용 터널 건설 계획을 제안하였다. 그 이후 1868년 영국 엔지니어 로우, 브럼리, 호크쇼와 공동으로 발전된 터널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당시 영국정부측의 반대가 심했는데, 1858년에 드 가몽이 영국을 방문하면서 만난 로드 파머스톤 수상은 이 프랑스 공학자에게 \"뭐라고요! 우리는 지금도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 거리를 더 가깝게 하는 공사에 우리더러 참여해 달라고 하고 있군요!\" 하는 말로 그 당시 섬 상태 그대로 영국이 남아 있는 것을 바라는 많은 영국인들의 의견을 대변했다. 같은 해에 버밍엄제폭탄으로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해협에 해저 터널을 놓는다는 일에 대한 관심이 식어 버렸고, 또한 대륙의 침략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공포도 다시금 살아났다.
■ 1870년 - 채널터널주식회사가 양국에서 조직되었다. 1860년부터 1880년 사이, 클로넬 F. 뷰몽에 의한 보링머신의 발명과 아더 잉글리쉬에 의한 후속개발 즉, 회전식 굴착선단부, 파쇄한 버럭의 콘베이어운송시스템, 압축공기시스템에 의한 굴착 기계는 현대 터널 공법의 기본 모델을 제공하였다.
■ 1880년 - 당시 개발된 굴착 기계로 영불해협양안에서 터널 굴착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도버 쪽에서 2,000m 굴착과 프랑스의 칼레 쪽 1,600m 굴착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영국의회의 반대로 무기한 중단되었다.
2) 20세기, 유로터널의 실현 과정
■ 1904년 영불협력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되는데, 철도기술의 발전으로 터널 건설에 대한 다양한 계획들이 제안되었다.
■ 1922년 - 포크스톤에서 휘태거가 발명한 보링머신에 의한 시험 굴착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128m 굴착 후 정치적 반대에 의해 공사는 중단되었고, 이후 20년간 건설 찬반논쟁이 벌어졌다. 유명한 정치인 윈스턴 처칠과 베번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터널 건설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는데, 터널 건설에 적극적인 프랑스에 비해 영국은 계속 수세적인 입장에서 반대를 해왔기에 이 당시 프랑스 측이 영국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해서 해안가에서 멀찍한 바다에 터널출구를 하나만 만들어, 출구와 연안 철도 사이는 말밥굽 모양의 거대한 고가 다리로 연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영국 함대는 이 진입로를 통제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접근할 수 없도록 포격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 1947년 - 2차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범국가적 단체에 의한 터널 건설의 타당성검토가 재개되었다. 왜냐 하면 비행기의 등장으로 인해 섬나라의 방어적 이점에 대한 생각들이 상당히 희석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곧바로 설계, 지질조사 재개되었다.
■ 1956년 - 영불연합으로 채널 터널 스터디그룹이 발족되어 해양, 지질, 경제, 공학측면에서 합동연구가 이루어졌고, 1960년 이 그룹에 의해 포크스톤에서 상 가트를 연결하는 터널 건설안 제안되기에 이르렀다.
■ 1974년 - 해협양안에서 공사가 재개되었지만, 섹스피어 클
유로 터널사는 150억불에 달하는 막대한 공사비를 정부의 자금지원이나 보증 없이 주식공모와 은행융자로 조달했다. 이 공사는 국가간의 초대형 인프라건설을 순수민간자본이 주도한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그러나 \'94년 터널의 개통이후,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심각한 경영난으로 인해 파산위기에 직면했었다. 당시 보도에 의하면 건설공사와 관련하여 채무액만 약 750억 프랑(한화 12조원)이고, 한해 지불이자액만 60억 프랑(한화 9600억원)이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96년 12월에는 터널 내부에서 차량화재사고가 발생하여 승객과 화물량이 격감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었다. 그러나 최근의 외신에 의하면, \'97년도에 이뤄진 유로 터널사의 구조조정에 이어, 최근 들어 승객과 화물량이 갈수록 폭증하여 머지않아 흑자전환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즉, 2004년경이면 이자 지급을 완료하고 2005년부터는 주주들에게 이익 배당까지 예상된다고 한다.
나아가서, 제2의 해저터널건설계획이 날로 구체화되고 있다고 한다. 기존의 포크스톤과 칼레를 왕래하는 기차전용의 터널은 2015년이면 포화상태에 이를 전망이다. 제2의 터널은 기존의 터널과 나란히 달리는 자동차 전용터널로 건설될 예정이라고 한다.
1. 건설추진 역사
유럽 대륙과 섬나라 영국을 육지로 연결시키려는 계획은 19세기부터 계속된 엔지니어들의 염원이었다. 이 해협을 연결하는 방법으로 해저 터널, 교량, 잠수튜브 등 다양한 계획들이 제안되어 왔고, 신기술과 수송수단이 발달됨에 따라 보다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등장해왔다. 이 프로젝트는 1850년부터 19세기말까지, 프랑스가 터널건설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영국 의회 안에서는 찬성과 반대의견으로 갈라져 열띤 논쟁거리가 되었다. 영국입장에서는 섬나라 영국이 유럽대륙과 육지로 연결될 경우, 그 옛날 나폴레옹 군대처럼 프랑스가 일시에 침략해 올 수도 있다는 것과 침공시의 적절한 방어책이 크나큰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1) 19세기, 건설논쟁과 시도
■ 1802년 - 최초의 건설계획은 프랑스 엔지니어인 앨버트 파비에르(Albert Mathieu Favier)에 의한 말이 끄는 수레가 다닐 수 있는 터널 건설안이었다. 터널 중간지점에는 인공 섬을 두어 이곳에서 우편물을 나르는 말을 교대시키게 하였다. 또한 터널 내의 조명은 오일램프로 하고 환기용 굴뚝도 중간 중간에 설치되어 있다.
■ 1830년 - 젊은 기술자 드 가몽(De Gamond)은 이 터널 건설계획에 관심을 가진 뒤 무려 40년을 여기에 몰두했다. 그는 직접 수십 번의 바다 속 잠수를 통해 수심측량을 하여 해저의 등고선 지도를 만들고, 또한 해저지층이 터널 굴착에 적합한 백악기층이란 사실을 밝혀내었다. 1856년 드 가몽은 영국의 포크스톤과 캡그리스 구간의 철도용 터널 건설 계획을 제안하였다. 그 이후 1868년 영국 엔지니어 로우, 브럼리, 호크쇼와 공동으로 발전된 터널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당시 영국정부측의 반대가 심했는데, 1858년에 드 가몽이 영국을 방문하면서 만난 로드 파머스톤 수상은 이 프랑스 공학자에게 \"뭐라고요! 우리는 지금도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 거리를 더 가깝게 하는 공사에 우리더러 참여해 달라고 하고 있군요!\" 하는 말로 그 당시 섬 상태 그대로 영국이 남아 있는 것을 바라는 많은 영국인들의 의견을 대변했다. 같은 해에 버밍엄제폭탄으로 나폴레옹 3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해협에 해저 터널을 놓는다는 일에 대한 관심이 식어 버렸고, 또한 대륙의 침략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공포도 다시금 살아났다.
■ 1870년 - 채널터널주식회사가 양국에서 조직되었다. 1860년부터 1880년 사이, 클로넬 F. 뷰몽에 의한 보링머신의 발명과 아더 잉글리쉬에 의한 후속개발 즉, 회전식 굴착선단부, 파쇄한 버럭의 콘베이어운송시스템, 압축공기시스템에 의한 굴착 기계는 현대 터널 공법의 기본 모델을 제공하였다.
■ 1880년 - 당시 개발된 굴착 기계로 영불해협양안에서 터널 굴착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도버 쪽에서 2,000m 굴착과 프랑스의 칼레 쪽 1,600m 굴착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영국의회의 반대로 무기한 중단되었다.
2) 20세기, 유로터널의 실현 과정
■ 1904년 영불협력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되는데, 철도기술의 발전으로 터널 건설에 대한 다양한 계획들이 제안되었다.
■ 1922년 - 포크스톤에서 휘태거가 발명한 보링머신에 의한 시험 굴착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128m 굴착 후 정치적 반대에 의해 공사는 중단되었고, 이후 20년간 건설 찬반논쟁이 벌어졌다. 유명한 정치인 윈스턴 처칠과 베번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터널 건설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는데, 터널 건설에 적극적인 프랑스에 비해 영국은 계속 수세적인 입장에서 반대를 해왔기에 이 당시 프랑스 측이 영국의 공포를 덜어주기 위해서 해안가에서 멀찍한 바다에 터널출구를 하나만 만들어, 출구와 연안 철도 사이는 말밥굽 모양의 거대한 고가 다리로 연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영국 함대는 이 진입로를 통제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접근할 수 없도록 포격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 1947년 - 2차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범국가적 단체에 의한 터널 건설의 타당성검토가 재개되었다. 왜냐 하면 비행기의 등장으로 인해 섬나라의 방어적 이점에 대한 생각들이 상당히 희석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곧바로 설계, 지질조사 재개되었다.
■ 1956년 - 영불연합으로 채널 터널 스터디그룹이 발족되어 해양, 지질, 경제, 공학측면에서 합동연구가 이루어졌고, 1960년 이 그룹에 의해 포크스톤에서 상 가트를 연결하는 터널 건설안 제안되기에 이르렀다.
■ 1974년 - 해협양안에서 공사가 재개되었지만, 섹스피어 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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