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한국영화, 그 반성과 모색
Ⅰ 들어가며 1
Ⅱ 영화운동의 역사적 전개와 한계 1
70년대 이전 1
1970년대: ‘다른’ 것을 ‘보기’ 위한 엘리트적 도피 2
1980-1987: 새로움을 예비하는 작은 움직임 2
1/ 억압적 국가 장치의 재구조화 3
2/ 작은 영화, 작은 시작 3
1987-1992: 변혁의 무기? 3
1/ 헤게모니적 배제전략 3
2/ 영화주위 여건의 변화상 4
3/ 독립영화, 정치적 내용 5
1993-1995: 난파, 그리고 정체성의 흔들림 6
1/ 문민 정부의 출현과 사회주의권의 몰락 6
2/ 문화론(신세대․영상세대론)의 폭증과 영화담론의 과잉 6
3/ 표류하는 영화제작 7
4/ 씨네마떼끄와 수용자 8
Ⅲ 뉴미디어 시대의 정체성 찾기 8
‘뉴’미디어와 ‘오랜’ 과제 8
<독립영화> - 각 단체의 정체성 확보 / 대안적 배급구조들에 대한 모색 9
<씨네마데끄> - 진보적 영화의 확보와 유통망 구축 / 건강한 영화담론의 생산 10
Ⅳ 결론을 대신하여 11
Ⅰ 들어가며 1
Ⅱ 영화운동의 역사적 전개와 한계 1
70년대 이전 1
1970년대: ‘다른’ 것을 ‘보기’ 위한 엘리트적 도피 2
1980-1987: 새로움을 예비하는 작은 움직임 2
1/ 억압적 국가 장치의 재구조화 3
2/ 작은 영화, 작은 시작 3
1987-1992: 변혁의 무기? 3
1/ 헤게모니적 배제전략 3
2/ 영화주위 여건의 변화상 4
3/ 독립영화, 정치적 내용 5
1993-1995: 난파, 그리고 정체성의 흔들림 6
1/ 문민 정부의 출현과 사회주의권의 몰락 6
2/ 문화론(신세대․영상세대론)의 폭증과 영화담론의 과잉 6
3/ 표류하는 영화제작 7
4/ 씨네마떼끄와 수용자 8
Ⅲ 뉴미디어 시대의 정체성 찾기 8
‘뉴’미디어와 ‘오랜’ 과제 8
<독립영화> - 각 단체의 정체성 확보 / 대안적 배급구조들에 대한 모색 9
<씨네마데끄> - 진보적 영화의 확보와 유통망 구축 / 건강한 영화담론의 생산 10
Ⅳ 결론을 대신하여 11
본문내용
11개 도시에서 상영하여 30만명 이상 관람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 냈다. <장산곶매>는 <파업전야> 외에도 89년도에는 <오! 꿈의나라>, 91년도에는 <닫힌 교문을 열며> 등 광주, 노동, 교육 등의 사회문제를 16mm 필름에 담아 냈다. 그리고 <노동자뉴스제작단>은 노동운동에 밀접하게 결합하여 <노동자뉴스> 시리즈(89-91)를, 〈영화제작소 청년〉은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제작했다. 한편 <상계동올림픽>은 김동원이라는 개인이 제작한 것으로 86~88년에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된 철거민들의 삶을 비디오에 기록한 다큐멘터리였다. 이러한 영화들은 정부의 심의를 거치지 않은 영화였다. 이들에 대한 좀더 자세한 계보는 한국독립영화를 말한다, 씨네 21 제32호, pp.43~45.
거의 검열에 가까운 심의를 거부하며 정부에서 껄끄러워 하는 노동, 광주, 교육 등 정치적 색채가 강한 소재나 주제를 주로 다루었기에 영화운동단체들이 제작한 영화들은 정부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특히 영화법상 심의를 거치지 않은 영화는 상영을 금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파업전야> 등의 상영은 정부와의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고 영화의 상영을 강행할 때에는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영화운동단체가 제작한 독립영화들은 기존의 배급망을 통한 유통이 불가능했고 대학가나 사회운동단체들을 통해서만 보급이 가능했으며 상영하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는 공권력이 개입되어 대단히 전투적인 분위기에서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와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영화운동세력들은 독립영화를 제작하고 정부에 대항하는 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파업전야>의 성과가 가시화되던 90년대 전반은 영화운동단체들의 독립영화 제작활동이 가장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으나, 그러한 불꽃같은 점화는 한편으로 오히려 영화운동의 침체를 의미하고 있었다. 이는 진보운동이 노동, 통일 문제 외에 교육, 여성, 환경 등 다각도로 분화되는 사회적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립영화 또한 ‘소재’를 통한 차별점 외에 뚜렷한 대안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좋았던 과거’로부터의 질적 도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예로 ‘리얼리즘에 대한 믿음,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통한 전형화의 원칙의 지배’를 전제로 하면서 민중민주운동세력내의 정파의 이해관계와 얽혀 소모적 성격의 영화운동론 논쟁을 펼쳤던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정치상황, 이념, 소재주의에 좌우되었던 탓에, “80년대 후반 비제도권 독립영화를 가능케 했던 바로 그 시대적 조건이 이번에는 장애물로 등장” 이정하, 독립영화가 걸어 온 길, 한국영화씻김, 열린책들, p.153.
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정치적인 영화는 내용에서의 정치성만이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그리고 제작방식과 과정에 있어서도 정치적이어야만 한다” 변영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반영의 현실이다, 오늘예감 3호에서 재인용
는 고다르의 전언이 귓가에 더더욱 안타깝게 들린다.
1993-1995: 난파, 그리고 정체성의 흔들림
1/ 문민 정부의 출현과 사회주의권의 몰락
국내적으로 91년 계급투쟁의 패배와 92년 대선의 패배로 인해 전반적인 운동의 수세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상징으로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지난 시기의 영화 운동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가 군부 독재 등의 정치적인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었다면 독립영화계는 하나의 큰 주제를 잃어버린 셈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국외적으로는 소연방과 동구권의 몰락에 동반한, 세계를 전일적으로 해석했던 체계의 붕괴라는 결정타를 맞게 되면서 이제까지 모든 것을 이끌어 온 정치적 메시지의 종착점이 불분명하게 되어 버렸다. 민중민주운동이 침체되면서 흔히 말하듯 ‘이념의 시대는 갔다, 모든 것이 변화했다’라는 정리, 회고, 후일담의 형식이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2/ 문화론(신세대영상세대론 이것은 지배집단만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진보적 이론계에서의 알튀세주의의 득세가 한몫 했음도 분명하다. “때늦은 열정”으로 믿었던 교리가 무너지고 난 이후의 대응이 “점차 이론이데올로기문화 등의 상부구조적 현상에 주로 관심을 갖는 지적 경향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들이 맑스 이론을 받아들였던 애초의 출발점과 이들의 사회적 존재조건에서 이미 예비되고 있었다.” 김동춘,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맑스주의이론의 성격변화와 한국 사회과학, 창작과 비평 1993년 겨울, PP. 315~319. 문화과학은 그 대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중심의 문화분석에 대한 비판은 김현경, 또 하나의 문화상품: 대중문화논의의 반성을 위하여, 학회평론 제5호을 보라. 한편 주은우, 90년대 한국의 신세대와 소비문화, 경제와 사회 1994년 봄에서와 같은 거리를 유지한 분석이 나타나면서 차츰 그 거품은 걷히게 된다.
)의 폭증과 영화담론의 과잉
92년 후반기부터 여기저기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문화론이 갑자기 붐을 타기 시작하면서, ‘신세대’라는 말이 언론 등에 자주 등장을 하게 된다. 보통 신세대는 80년 이후의 물질적 풍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며, 또 우리 나라가 TV의 대대적인 보급과 더불어 맞게 된 영상의 제3단계의 세대들로 규정된다. 이들 신세대는 흔히 감각적, 비사고적, 육체적 문화에 익숙한 세대라 말해지는 바 여기에 영상 매체들 또한 충분히 부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바람은 곧바로 ‘영화’에의 집중되고 그것은 대중들이 갖고 있던 지배적 관심의 변환을 불러 온다.
구체적으로는 영상 관련 비평‘글’이 과잉적으로 양산된다. 신문의 문화면 증가와 더불어 이루어진 영화비디오 소개 코너의 급증에 더하여 <씨네 21>, <키노> 등을 비롯한 영화잡지는 단기간에 여러 종류가 출간되면서 이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산책’이나 ‘-에세이’류의 가벼운 영화 관련 서적 출간이 늘어나는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크게 한 몫을 하는 것이 비디오 관람문화의 정착이다. 예술 영화들의 비디오 출시(분도씨네마떼끄, 중앙비디오
거의 검열에 가까운 심의를 거부하며 정부에서 껄끄러워 하는 노동, 광주, 교육 등 정치적 색채가 강한 소재나 주제를 주로 다루었기에 영화운동단체들이 제작한 영화들은 정부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특히 영화법상 심의를 거치지 않은 영화는 상영을 금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파업전야> 등의 상영은 정부와의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고 영화의 상영을 강행할 때에는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영화운동단체가 제작한 독립영화들은 기존의 배급망을 통한 유통이 불가능했고 대학가나 사회운동단체들을 통해서만 보급이 가능했으며 상영하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하는 공권력이 개입되어 대단히 전투적인 분위기에서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와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영화운동세력들은 독립영화를 제작하고 정부에 대항하는 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파업전야>의 성과가 가시화되던 90년대 전반은 영화운동단체들의 독립영화 제작활동이 가장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으나, 그러한 불꽃같은 점화는 한편으로 오히려 영화운동의 침체를 의미하고 있었다. 이는 진보운동이 노동, 통일 문제 외에 교육, 여성, 환경 등 다각도로 분화되는 사회적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립영화 또한 ‘소재’를 통한 차별점 외에 뚜렷한 대안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좋았던 과거’로부터의 질적 도약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예로 ‘리얼리즘에 대한 믿음,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통한 전형화의 원칙의 지배’를 전제로 하면서 민중민주운동세력내의 정파의 이해관계와 얽혀 소모적 성격의 영화운동론 논쟁을 펼쳤던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정치상황, 이념, 소재주의에 좌우되었던 탓에, “80년대 후반 비제도권 독립영화를 가능케 했던 바로 그 시대적 조건이 이번에는 장애물로 등장” 이정하, 독립영화가 걸어 온 길, 한국영화씻김, 열린책들, p.153.
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정치적인 영화는 내용에서의 정치성만이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그리고 제작방식과 과정에 있어서도 정치적이어야만 한다” 변영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반영의 현실이다, 오늘예감 3호에서 재인용
는 고다르의 전언이 귓가에 더더욱 안타깝게 들린다.
1993-1995: 난파, 그리고 정체성의 흔들림
1/ 문민 정부의 출현과 사회주의권의 몰락
국내적으로 91년 계급투쟁의 패배와 92년 대선의 패배로 인해 전반적인 운동의 수세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상징으로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지난 시기의 영화 운동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가 군부 독재 등의 정치적인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었다면 독립영화계는 하나의 큰 주제를 잃어버린 셈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국외적으로는 소연방과 동구권의 몰락에 동반한, 세계를 전일적으로 해석했던 체계의 붕괴라는 결정타를 맞게 되면서 이제까지 모든 것을 이끌어 온 정치적 메시지의 종착점이 불분명하게 되어 버렸다. 민중민주운동이 침체되면서 흔히 말하듯 ‘이념의 시대는 갔다, 모든 것이 변화했다’라는 정리, 회고, 후일담의 형식이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2/ 문화론(신세대영상세대론 이것은 지배집단만이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진보적 이론계에서의 알튀세주의의 득세가 한몫 했음도 분명하다. “때늦은 열정”으로 믿었던 교리가 무너지고 난 이후의 대응이 “점차 이론이데올로기문화 등의 상부구조적 현상에 주로 관심을 갖는 지적 경향으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들이 맑스 이론을 받아들였던 애초의 출발점과 이들의 사회적 존재조건에서 이미 예비되고 있었다.” 김동춘,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맑스주의이론의 성격변화와 한국 사회과학, 창작과 비평 1993년 겨울, PP. 315~319. 문화과학은 그 대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중심의 문화분석에 대한 비판은 김현경, 또 하나의 문화상품: 대중문화논의의 반성을 위하여, 학회평론 제5호을 보라. 한편 주은우, 90년대 한국의 신세대와 소비문화, 경제와 사회 1994년 봄에서와 같은 거리를 유지한 분석이 나타나면서 차츰 그 거품은 걷히게 된다.
)의 폭증과 영화담론의 과잉
92년 후반기부터 여기저기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문화론이 갑자기 붐을 타기 시작하면서, ‘신세대’라는 말이 언론 등에 자주 등장을 하게 된다. 보통 신세대는 80년 이후의 물질적 풍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며, 또 우리 나라가 TV의 대대적인 보급과 더불어 맞게 된 영상의 제3단계의 세대들로 규정된다. 이들 신세대는 흔히 감각적, 비사고적, 육체적 문화에 익숙한 세대라 말해지는 바 여기에 영상 매체들 또한 충분히 부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바람은 곧바로 ‘영화’에의 집중되고 그것은 대중들이 갖고 있던 지배적 관심의 변환을 불러 온다.
구체적으로는 영상 관련 비평‘글’이 과잉적으로 양산된다. 신문의 문화면 증가와 더불어 이루어진 영화비디오 소개 코너의 급증에 더하여 <씨네 21>, <키노> 등을 비롯한 영화잡지는 단기간에 여러 종류가 출간되면서 이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산책’이나 ‘-에세이’류의 가벼운 영화 관련 서적 출간이 늘어나는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크게 한 몫을 하는 것이 비디오 관람문화의 정착이다. 예술 영화들의 비디오 출시(분도씨네마떼끄, 중앙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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