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성령의 본질
Ⅲ. 성령세례
Ⅳ. 성령충만
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
Ⅵ. 결론
참고문헌
Ⅱ. 성령의 본질
Ⅲ. 성령세례
Ⅳ. 성령충만
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성도들의 삶속에서 발생하는 경험인 것이다.하지만 오순절 신학에서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구별되는 제이차적인 세례로 보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하다고 함으로써 신자들을 \"완성된 신자\"와 \"미완성 신자\"로 나누어 신자들간에 화합과 일치를 깨뜨리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분열을 가져올 염려와 위험성이 크다. R.A. Torrey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의어로 똑같은 것인데 두가지 표현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고 있다.Torrey는 \"세례를 받는다\"는 것과 \"충만하다\"는 말이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하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성령에 의해 사용되어진 성경의 요어를 불확실하게 사용하실리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강조하는 곳은 없다.하지만 성령충만하라는 명령은 나타난다.
2.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르게 보는 견해
오순절 성령세례 이후 3000명에게 성령이 임했다.그들은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충만을 받았다.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인 것이다.세례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고,단하나밖에 없는 최초의 체험이며,반복도 상실도 없다.하지만 성령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며,계속적이고 영속적인 결과와 규범을 뜻하며,반복도 상실도 가능한 것이다.결국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이고 성령내주가 지속적 상태라면 성령충만은 반복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충만에 관하여 명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라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엡5:18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계속해서 충만해야 한다는 명령이 나온다.여기 나오는 동사의 네가지 유의점을 알아보자. 첫째,그 동사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즉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주느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기독교인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둘째,그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있다.이 글은 전 기독교 공동체를 대상으로 쓴 것이다.즉,성령의 충만은 어떤 사람에게만 예약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 의무이다. 세째,그 동사는 수동태이다.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중요한 조건은 무조건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네째,그 동사는 현재시제이다.헬라어에서는 명령법이 현재형이면 그 행동은 계속적인 것이다.즉 계속적인 충만을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시 할 수 없는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성령세례는 일회적인데 반해 성령충만은 계속적이며 반복적이다.
둘째,성령세례는 체험적으로 느낄 수 없으나 성령충만은 원할 때에 주시는 체험이다.
세째,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명령이 없으나 성령충만의 명령은 나온다.
네째,성령세례는 기독교인의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성령충만은 그렇지 않다.성령충만의 명령은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증거이다.
다섯째,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결과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지체가 되게 하지만(롬6:3-4;고전12:13) 성령충만은 말씀 증거와 봉사를 힘있게 하도록 한다.
여섯째,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조건이 전혀 다르다.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누구나 받으나 성령충만은 개인적 죄에서 떠나 성령에게 전적으로 맡겨질 때 이루어진다.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은혜의 사역이요 성령충만은 은사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점의 증거로 보아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Ⅵ. 결론
솔직히 말해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비록 글의 방법이 전통적인 견해 즉 개혁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견해 역시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보면,
첫째로,체험을 너무 무시한다.이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내에서도 많은 지적이 나오고 있고,오순절로부터도 가정 공격을 많이 받는 것 중의 하나이다.
둘째로,신자들의 영적인 고통을 너무 도외시한다.오순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원한 대답으로 영적 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세째로,교회의 영적인 침체이다.영적고통이 개인의 문제라면 영적침체는 현대교회,특히 개혁주의의 고민거리이다.
네째로,성령세례의 유사개념이다.오순절주의자의 성령세례의 의미와 유사한 개념,즉 전통개념의 성령충만보다 더 깊고 뜨거운 영적 체험의 상태를 전통견해자들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이것을 Stott와 홍정길 목사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설명한다.물론 완전하게 인정은 안하지만 은근히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개혁주의의 견해에 몇몇 모순점이 발견되지만 따르게 되는 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크기 때문이다.물론 오순절운동이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을 깨트렸고,타락되는 교회를 갱생시켰으며 기존 교단의 침체와 무감각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이론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이 뒤따른다.
첫째,오랜 동안의 기독교 역사가 소위 성령세례적 은사와 방언에 의해서 유지된 적은 없다.그것은 방언과 은사가 아닌 보혜사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
둘째,삼위일체중 성령의 사역만을 강조하고 있다.
세째,체험을 너무 강조하므로 유치하고 천박하다.
네째,체험을 강조하지만 자기네 것만 내세운다.
다섯째,성령충만을 감격 일색으로 대치하려 한다.
어느 쪽의 견해가 옳으냐 하는 이 문제가 확실히 해결되자면 많은 연구의 땀을 퍼붓는 다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왜냐하면 이 문제의 답은 \'연구\'보다는 \'시간\'에 달려있을테니까.아니 어쩌면 주님이 오실 그 때까지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내게 굳이 한 쪽의 견해를 택하라고 한다면 내 좁은 지식으로 바라보고 연구한 결과 성경에 비추어 볼 때,비록 모순점은 있지만,좀더 성경의 진리에 가까운 전통적인 견해 즉 성령세례는 곧 중생이며 성령충만과는 구별되어진다는 성령론을 택하면서 이 글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참고문헌
김은종, [문답식 성령론]. 서울 : 목회자료사, 1981.
박윤선, [사도행전]. 서울 : 영음사, 1974.
, [성령신학]. 서울 : 영음사, 1984.
박형용, [사도행전]. 서울 : 성광문화사, 1984.
2.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르게 보는 견해
오순절 성령세례 이후 3000명에게 성령이 임했다.그들은 성령세례의 결과로 성령충만을 받았다.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인 것이다.세례는 예수께서 행하신 것이고,단하나밖에 없는 최초의 체험이며,반복도 상실도 없다.하지만 성령충만은 그들이 받은 것이며,계속적이고 영속적인 결과와 규범을 뜻하며,반복도 상실도 가능한 것이다.결국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이고 성령내주가 지속적 상태라면 성령충만은 반복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충만에 관하여 명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라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엡5:18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령으로 계속해서 충만해야 한다는 명령이 나온다.여기 나오는 동사의 네가지 유의점을 알아보자. 첫째,그 동사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다.즉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주느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기독교인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다. 둘째,그 동사는 복수형으로 되어있다.이 글은 전 기독교 공동체를 대상으로 쓴 것이다.즉,성령의 충만은 어떤 사람에게만 예약된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 의무이다. 세째,그 동사는 수동태이다.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중요한 조건은 무조건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네째,그 동사는 현재시제이다.헬라어에서는 명령법이 현재형이면 그 행동은 계속적인 것이다.즉 계속적인 충만을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시 할 수 없는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성령세례는 일회적인데 반해 성령충만은 계속적이며 반복적이다.
둘째,성령세례는 체험적으로 느낄 수 없으나 성령충만은 원할 때에 주시는 체험이다.
세째,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명령이 없으나 성령충만의 명령은 나온다.
네째,성령세례는 기독교인의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성령충만은 그렇지 않다.성령충만의 명령은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증거이다.
다섯째,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결과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지체가 되게 하지만(롬6:3-4;고전12:13) 성령충만은 말씀 증거와 봉사를 힘있게 하도록 한다.
여섯째,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조건이 전혀 다르다.성령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누구나 받으나 성령충만은 개인적 죄에서 떠나 성령에게 전적으로 맡겨질 때 이루어진다.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은혜의 사역이요 성령충만은 은사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점의 증거로 보아 서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Ⅵ. 결론
솔직히 말해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비록 글의 방법이 전통적인 견해 즉 개혁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견해 역시 모두 옳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를 보면,
첫째로,체험을 너무 무시한다.이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내에서도 많은 지적이 나오고 있고,오순절로부터도 가정 공격을 많이 받는 것 중의 하나이다.
둘째로,신자들의 영적인 고통을 너무 도외시한다.오순절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원한 대답으로 영적 고통의 문제를 잘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세째로,교회의 영적인 침체이다.영적고통이 개인의 문제라면 영적침체는 현대교회,특히 개혁주의의 고민거리이다.
네째로,성령세례의 유사개념이다.오순절주의자의 성령세례의 의미와 유사한 개념,즉 전통개념의 성령충만보다 더 깊고 뜨거운 영적 체험의 상태를 전통견해자들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이것을 Stott와 홍정길 목사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라고 설명한다.물론 완전하게 인정은 안하지만 은근히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개혁주의의 견해에 몇몇 모순점이 발견되지만 따르게 되는 것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크기 때문이다.물론 오순절운동이 성령론에 대한 무관심을 깨트렸고,타락되는 교회를 갱생시켰으며 기존 교단의 침체와 무감각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이론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이 뒤따른다.
첫째,오랜 동안의 기독교 역사가 소위 성령세례적 은사와 방언에 의해서 유지된 적은 없다.그것은 방언과 은사가 아닌 보혜사의 인도하심 때문이었다.
둘째,삼위일체중 성령의 사역만을 강조하고 있다.
세째,체험을 너무 강조하므로 유치하고 천박하다.
네째,체험을 강조하지만 자기네 것만 내세운다.
다섯째,성령충만을 감격 일색으로 대치하려 한다.
어느 쪽의 견해가 옳으냐 하는 이 문제가 확실히 해결되자면 많은 연구의 땀을 퍼붓는 다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왜냐하면 이 문제의 답은 \'연구\'보다는 \'시간\'에 달려있을테니까.아니 어쩌면 주님이 오실 그 때까지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내게 굳이 한 쪽의 견해를 택하라고 한다면 내 좁은 지식으로 바라보고 연구한 결과 성경에 비추어 볼 때,비록 모순점은 있지만,좀더 성경의 진리에 가까운 전통적인 견해 즉 성령세례는 곧 중생이며 성령충만과는 구별되어진다는 성령론을 택하면서 이 글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참고문헌
김은종, [문답식 성령론]. 서울 : 목회자료사, 1981.
박윤선, [사도행전]. 서울 : 영음사, 1974.
, [성령신학]. 서울 : 영음사, 1984.
박형용, [사도행전]. 서울 : 성광문화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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