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정약전(丁若銓) 1758(영조34)∼1816(순조16) 23세
2. 정약전의 자산어보
3. 현대어로 복원된 정약전의 ‘생물도감’
4. 한국 최고(最古)의 어류학서(魚類學書).
5. 정약전의 ‘자산어보’ 진본 미스터리
참고문헌
2. 정약전의 자산어보
3. 현대어로 복원된 정약전의 ‘생물도감’
4. 한국 최고(最古)의 어류학서(魚類學書).
5. 정약전의 ‘자산어보’ 진본 미스터리
참고문헌
본문내용
확인한 것은 2002년 서울대 근처의 고서점 주인이자 재야 고문서 연구가인 송부종씨가 정약전의 또 다른 간찰(사진2)을 발견하면서다. 진옹이 보기엔 자산어보를 쓴 인물과 절대 다른 사람의 필체일 수 없는 글씨였다. 송씨는 “진씨가 찾아와 이 편지를 본 후 ‘당신이 나와 무슨 인연이 있길래 이런 좋은 일을 했냐’며 엉엉 울었다. 이 편지에는 정약전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씌어 있을 뿐 아니라 내용으로도 이 편지가 정약전의 글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전했다. 문화재청 고문서 감정위원이기도 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우 교수는 “이 간찰은 정약용 가계의 글씨와도 닮은 점이 많고, 전주박물관 소장본 간찰과 비교해봐도 한 사람의 글씨로 볼 수 있다. 정약전의 글씨임에 틀림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편지에 대해선 많은 필적 감정가, 고문서 감정가도 이론(異論)을 제기하지 않았다.
진옹의 자산어보 진본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쪽은 고문서 전문가가 아니라 오히려 생물학도들이었다. 1998년부터 흑산도를 비롯해 정약전의 유배지를 샅샅이 뒤진 후 2002년 ‘현산어보를 찾아서’라는 책을 쓴 이태원씨는 “진기홍씨 소장본 자산어보는 다른 필사본보다 오히려 틀린 부분이나 빠진 부분이 더 많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자산어보라는 책이 정약전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李晴)과의 공저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자산어보 진본은 정약전이 쓴 친필 원고를 이청이 주석을 달아 새로 쓴, 즉 이청의 글씨로 쓰인 책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씨는 자신의 저서 ‘현산어보를 찾아서’에서 자산어보 곳곳에 보이는 ‘청안(案, 사진3 원 안)’이라는 용어가, 정약용의 제자 이청이 정약전이 직접 보고 들어서 쓴 부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대목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이청은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18제자 중 가장 사랑을 받은 제자로, 정조 때 교리를 지냈으며 주로 천문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여유당전서나 다산의 책 곳곳에 ‘청안’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이는 다산의 작품에 제자 이청이 주석을 붙인 것으로, 자산어보에 나오는 ‘청안’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다. 실제 기존 자산어보 번역자들은 ‘案’의 ‘’자가 옥편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라 이 부분만 빼놓고 번역해왔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측”
자산어보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국내 최초로 조선시대 농촌기술 서적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번역하고 있는 정명현(숭실대 강사·생물학)씨도 “자산어보는 이청과의 공저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 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진기홍씨 소장 자산어보가 진본이라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즉, 이들의 주장은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자산어보 초고를 쓴 뒤 이를 강진에 있는 동생 정약용에게 보냈고, 정약용은 중국 문헌에 밝은 제자 이청에게 주석을 붙이게 한 뒤 책을 새로 쓰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옹은 이런 주장에 대해 “일고의 가치가 없는 억측”이라고 잘라 말한다. 진옹은 “청안이라는 부분은 이청이 정약전의 과학적 연구 성과에 대해 중국 문헌에 나와 있는 것과 비교하거나 고증한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게 없다”며 “섬지역인 흑산도에 중국 문헌이 없었기 때문에 정약전이 강진에 있는 동생(제자 이청)의 자료를 넘겨받아 자신이 직접 써 넣은 것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즉, 정약전이 흑산도 근해 동식물에 대한 중국 문헌의 내용을 참조하기 위해 정약용의 제자를 시켜 자료를 조사하게 한 후 이를 흑산도로 보내게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청의 공(功)을 인정해 ‘이 부분의 조사는 이청이라는 사람이 했다’는 사실을 자산어보에 밝혀놓은 게 ‘청안’의 실체”라는 것.
감정을 의뢰해보니…
진옹은 “자산어보에는 물고기 관찰과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 흑산도 주민 장창대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이청, 장창대 세 사람의 공저가 돼야 한다. 또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다산의 저서 중 청안이라는 대목이 나오는 책은 모두 이청과의 공저가 돼야 하는 것 아니냐”며 후학들의 주장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학교수가 논문을 쓰면서 제자에게 자료수집을 부탁하고, 논문의 공동저자로 올려주는 것과 같죠. 정약전은 이런 의미에서 보면 대단히 양심적인 학자였던 듯합니다.”
그렇다면 왜 진옹은 이런 논란 속에서도 지금껏 자산어보에 대한 진위 감정을 문화재청에 공식 의뢰하지 않았을까.
“그게 1980년대 중반이던가…내가 소장한 반계(磻溪)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원고본(유형원 자필본)에 대한 진위 판정을 받기 위해 서울시에 문화재 감정을 의뢰했는데 ‘목판본 글씨와 필체가 다르다’며 위작(僞作)으로 판정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반계수록은 목판본인데 이것은 인쇄를 하기 전에 반계가 직접 쓴 것이기 때문에 필체가 같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반계의 다른 필체와 비교하지 않고 인쇄본과 비교해서 다르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감정위원들의 수준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자산어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보는 눈이 가장 정확합니다.”
진옹은 반계수록 위작 감정 이후 자신이 다른 문서를 감정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 감정을 맡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신동아’는 진옹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산어보에 대한 필적 감정을 의뢰하기로 했다. 필적감정은 전주박물관 소장 정약전 간찰, 송부종씨 소장 정약전 간찰, 그리고 진기홍 소장 자산어보의 필체를 서로 비교해 같은 사람의 필체임을 확인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감정단은 문화재청의 고문서 감정위원이었거나 현재 위원인 사람, 서예·고문서 관련학계에서 추천한 사람들로 구성했다. 하지만 고문서 감정분야에서도 서예계와 비평가 그룹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어 감정단의 이름만 공개하고 각자의 평을 그대로 게재하지는 않기로 했다. 진기홍 옹 소장 자산어보의 진본 감정에 참여한 감정단은 다음과 같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순조실록』; 『일성록』; 『국조방목』; 『한국천주교회사』; 『한국인명대사전』, 신구문화사, 197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1991.
진옹의 자산어보 진본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선 쪽은 고문서 전문가가 아니라 오히려 생물학도들이었다. 1998년부터 흑산도를 비롯해 정약전의 유배지를 샅샅이 뒤진 후 2002년 ‘현산어보를 찾아서’라는 책을 쓴 이태원씨는 “진기홍씨 소장본 자산어보는 다른 필사본보다 오히려 틀린 부분이나 빠진 부분이 더 많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자산어보라는 책이 정약전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李晴)과의 공저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자산어보 진본은 정약전이 쓴 친필 원고를 이청이 주석을 달아 새로 쓴, 즉 이청의 글씨로 쓰인 책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씨는 자신의 저서 ‘현산어보를 찾아서’에서 자산어보 곳곳에 보이는 ‘청안(案, 사진3 원 안)’이라는 용어가, 정약용의 제자 이청이 정약전이 직접 보고 들어서 쓴 부분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대목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이청은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18제자 중 가장 사랑을 받은 제자로, 정조 때 교리를 지냈으며 주로 천문지리에 밝은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여유당전서나 다산의 책 곳곳에 ‘청안’이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이는 다산의 작품에 제자 이청이 주석을 붙인 것으로, 자산어보에 나오는 ‘청안’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다. 실제 기존 자산어보 번역자들은 ‘案’의 ‘’자가 옥편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라 이 부분만 빼놓고 번역해왔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측”
자산어보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국내 최초로 조선시대 농촌기술 서적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번역하고 있는 정명현(숭실대 강사·생물학)씨도 “자산어보는 이청과의 공저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 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진기홍씨 소장 자산어보가 진본이라는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즉, 이들의 주장은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자산어보 초고를 쓴 뒤 이를 강진에 있는 동생 정약용에게 보냈고, 정약용은 중국 문헌에 밝은 제자 이청에게 주석을 붙이게 한 뒤 책을 새로 쓰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옹은 이런 주장에 대해 “일고의 가치가 없는 억측”이라고 잘라 말한다. 진옹은 “청안이라는 부분은 이청이 정약전의 과학적 연구 성과에 대해 중국 문헌에 나와 있는 것과 비교하거나 고증한 것으로, 전혀 새로운 게 없다”며 “섬지역인 흑산도에 중국 문헌이 없었기 때문에 정약전이 강진에 있는 동생(제자 이청)의 자료를 넘겨받아 자신이 직접 써 넣은 것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즉, 정약전이 흑산도 근해 동식물에 대한 중국 문헌의 내용을 참조하기 위해 정약용의 제자를 시켜 자료를 조사하게 한 후 이를 흑산도로 보내게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청의 공(功)을 인정해 ‘이 부분의 조사는 이청이라는 사람이 했다’는 사실을 자산어보에 밝혀놓은 게 ‘청안’의 실체”라는 것.
감정을 의뢰해보니…
진옹은 “자산어보에는 물고기 관찰과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 흑산도 주민 장창대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이청, 장창대 세 사람의 공저가 돼야 한다. 또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다산의 저서 중 청안이라는 대목이 나오는 책은 모두 이청과의 공저가 돼야 하는 것 아니냐”며 후학들의 주장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학교수가 논문을 쓰면서 제자에게 자료수집을 부탁하고, 논문의 공동저자로 올려주는 것과 같죠. 정약전은 이런 의미에서 보면 대단히 양심적인 학자였던 듯합니다.”
그렇다면 왜 진옹은 이런 논란 속에서도 지금껏 자산어보에 대한 진위 감정을 문화재청에 공식 의뢰하지 않았을까.
“그게 1980년대 중반이던가…내가 소장한 반계(磻溪)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원고본(유형원 자필본)에 대한 진위 판정을 받기 위해 서울시에 문화재 감정을 의뢰했는데 ‘목판본 글씨와 필체가 다르다’며 위작(僞作)으로 판정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반계수록은 목판본인데 이것은 인쇄를 하기 전에 반계가 직접 쓴 것이기 때문에 필체가 같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반계의 다른 필체와 비교하지 않고 인쇄본과 비교해서 다르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감정위원들의 수준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자산어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보는 눈이 가장 정확합니다.”
진옹은 반계수록 위작 감정 이후 자신이 다른 문서를 감정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사람이나 기관에 감정을 맡기지도 않았다고 한다.
‘신동아’는 진옹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산어보에 대한 필적 감정을 의뢰하기로 했다. 필적감정은 전주박물관 소장 정약전 간찰, 송부종씨 소장 정약전 간찰, 그리고 진기홍 소장 자산어보의 필체를 서로 비교해 같은 사람의 필체임을 확인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감정단은 문화재청의 고문서 감정위원이었거나 현재 위원인 사람, 서예·고문서 관련학계에서 추천한 사람들로 구성했다. 하지만 고문서 감정분야에서도 서예계와 비평가 그룹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있어 감정단의 이름만 공개하고 각자의 평을 그대로 게재하지는 않기로 했다. 진기홍 옹 소장 자산어보의 진본 감정에 참여한 감정단은 다음과 같다.
참고문헌 『정조실록』; 『순조실록』; 『일성록』; 『국조방목』; 『한국천주교회사』; 『한국인명대사전』, 신구문화사, 197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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