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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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1 요약
2 다양한 호칭
3 배경
4 한국 전쟁 전에 있던 전투
5 원인
5.1 김일성의 남침
5.2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5.2.1 스탈린 주도설
5.2.2 한미 공모설
5.2.3 내란 확전설
6 전쟁준비
6.1 조·소 비밀회담
6.2 조선인 의용군 입북
6.3 준비 과정
7 경과
7.1 경위
7.2 발발
7.2.1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7.3 유엔군의 참전
7.4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수복
7.5 중국의 참전과 1.4 후퇴
7.6 정전 협정
7.7 정전 협정 이후의 충돌
7.8 망명 정부 계획
8 피해
8.1 남한
8.2 북한
8.3 미국
8.4 중국
8.5 기타 국가
8.6 터키
9 사용되었던 무기

본문내용

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15]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
북한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이 엇갈리고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 평가하고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 제기된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이론이다.
스탈린 주도설 .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은 소련의 지배아래 있던 부리야드 공화국(현 몽골)의 기갑부대 요원 1,500여 명을 파견했으며, 전쟁 초 서울에 나타난 북한군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설도 소련의 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였으며 그런 스탈린에게 김일성이 무려 48번이나 한국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했다. 48번씩이나 거절한 스탈린은 김일성의 강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결국 전쟁을 승인하고 만다.
한미 공모설 .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북한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14]
내란 확전설 .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 북한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남한)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북한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함.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해으나 대답이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곧 국제연합군(UN군)도 진격시작, 평양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군 참전으로 이어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듬.
고착 전쟁(1951년 6월 ~ ) : 중공군의 2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당황한 공산측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임.
북한 위주이거나 북한을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북한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평가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전쟁준비 .
조·소 비밀회담 .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였고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회의에는 북한과 중공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로 북한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북한정권 수립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코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북한의 수뇌부는 방문기간인 3월 17일에 동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인 의용군 입북 .
한국전쟁을 앞두고 김일성의 요청과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팔로군(八路軍)중 한인 출신들로 ‘조선의용군’을 만들어 입북 시켰다. 이중 팔로군 제 4 야전군 휘하 제 55군단 164 사단은 만주지역에 주둔해 있는 한인들로만 구성된 단일부대로 1949년 7월 20일 입북하여 조선인민군 제 5사단으로 개편 되었다. 입북한 사단 인원은 10821명이다.
제 4 야전군 휘하 제 55군단 166사단은 국민당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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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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