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Ⅰ. 예당금석과안록의 저술 및 출현배경
1. 추사의 금석학에 대한 인식
1)인식에 대한 근본적 동기
2)학문적 성향
2. 북한산비에 이르게 된 과정
3. 추사 이전 조선의 금석학 연구
Ⅱ. 예당금석과안록의 내용분석
1. 체재분석
1)체재
2)소문단별 분석
2. 내용분석
Ⅲ. 예당금석과안록의 가치
1. 금석학적 가치
2. 역사적 가치
Ⅳ. 예당금석과안록 이후의 금석학
맺음말
Ⅰ. 예당금석과안록의 저술 및 출현배경
1. 추사의 금석학에 대한 인식
1)인식에 대한 근본적 동기
2)학문적 성향
2. 북한산비에 이르게 된 과정
3. 추사 이전 조선의 금석학 연구
Ⅱ. 예당금석과안록의 내용분석
1. 체재분석
1)체재
2)소문단별 분석
2. 내용분석
Ⅲ. 예당금석과안록의 가치
1. 금석학적 가치
2. 역사적 가치
Ⅳ. 예당금석과안록 이후의 금석학
맺음말
본문내용
유린당한 시대의 공통현상으로 파악해야만 할 듯 하다. 최완수, 1972, 「김추사의 금석학」, 『간송문화3』,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세창은 서도금석학적인 측면에서나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겨 놓았으므로 필자는 위창을 추사학파의 마지막 후손이라고 칭하고 싶다.
그리고 홍양호는 그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에 삼국, 고려의 주요 금석문 목록을 실었고,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고대~조선의 유명한 금석문 이름과 소재지, 건립 연대 등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이밖에 금석문을 수집, 연구한 대표적 인물로 이익, 안정복, 조인영, 정약용을 들 수 있다.
이렇듯 조선의 금석학은 18~19세기 김정희의 등장으로 한 때 “조선금석학의 절정기”를 보내지만 19세기 후반부터의 국정의 혼란과 민족 시련기인 일제치하로 인하여 그 학맥이 전수되지 못하게 된다. 찬란하게 꽃 피웠던 조선 금석학이 당시 수준에서나마 우리의 손으로 조선금석학의 정리가 완성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한편 청의 유희해는 조인영의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를 바탕으로 최초의 종합적인 한국금석문의 정리라고 할 수 있는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 관한 책의 발간에 관한 전모는 유홍준의 완당평전 250~252쪽을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을 간행하였다. 『해동금석원』은 청에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증보 수정되어 간행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문적조사와 연결을 가지면서 행정조직을 움직여 한국금석문의 정리가 진행되었다. 바로 『조서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이 그것이다. 허흥식, 1982,「한국금석문의 정리현황과 전망」, 『민죽문화논총2,3권(모산 심재완 박사 정년퇴임 기념호)』,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39~240쪽
『해동금석원』과 『조선금석총람』의 간행과 보급은 한국사 연구에 큰 활기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당시 한국의 금석문의 정리가 우리의 손이 아니라 전자는 청에 의해 후자는 일본인의 손에 정리된 것이다. 우리의 금석문이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정리되었다는 사실은 부끄럽고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된 『조선금석총람』이 지금의 학자들에 利用度가 가장 높은 것으로 되어있음은 부끄럽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해방이후 수집정리된 금석문은 황수영의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 이난영의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의 책들이 대표된다. 하지만 『遺文』과 『追補』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모두 『조선금석총람』에 실리지 않은 것만 수록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금석문에 있어서『조선금석총람』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허흥식의 『한국금석문전문』이 간행되었고, 원광대학교의 조동원의 『한국금석문대계』가 79년부터 간행되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각 도시별로 금석문을 정리하여 책을 많이 내고 있다. 조동원의 『한국금석문대계』는 앞의 여러 금석문 책들이 활자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를 탈피하여 직접탁본된 것을 사진으로 첨부하여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 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금석문의 소개, 금석문의 연구, 탁본소개, 금석문찾기, 금석문체험의 메뉴를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맺음말
조선의 금석학은 크게 3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전기 서예의 보조수단으로 금석문을 모았던 첫 번째 시기, 17~18세기 금석문 수집에 대한 열기의 두 번째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19세기를 전후하여 금석학의 활발한 논의가 있었던 마지막 시기의 구분이다. 지금까지 본 고에서 살펴본 것 과 같이 19세기 금석학의 절정기에 완당 김정희가 활동했던 것이다. 『예당금석과안록』은 추사 금석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 논문의 출현 배경과 의미 등을 본고에서 살펴보았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국제적 교류가 그리 쉽지 많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추사는 당시 청과 교류하여 국제적으로 명망을 쌓았고 학문적 성취도 이룰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쌓아둔 금석학의 학문적인 토대가 이어오지 못하고 청과 일본의 학자에 의해 우리나라의 금석학이 정리 되었다는 것은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비단 추사의 학문 뿐만이 아니라 여러 전통문화의 뿌리가 개항기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그리고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수입으로 단절 되었다는게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일만으로 해결 될 사안은 아니다. 그 끈을 이어가는 역할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몫인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金石文은 『삼국사기』나 『고려사』등의 정사를 보완하는 자료 로 이용되어 왔다. 최근에 와서는 그 1차적인 사료의 가치를 중요시 하면서 금석문은 학계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에 추사의 『예당금석과안록』은 그 빛을 더 발휘하고 있다. 추사를 뿐만아니라 우리의 선학들이 쌓아 놓은 훌륭한 학문적 업적을 다시금 이어 그 학맥을 이어 나가는 것이 우리 후세 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해보면서 짧게 졸고를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유홍준, 2002,『완당평전12』, 학고재
임창순, 1969,「금석과안록」,『한국을 움직인 古典百選』, 신동아
최완수, 1972, 「김추사의 금석학」, 『간송문화3』, 한국민족미술연구소
한국국한진흥원, 2002,「특집-한국금석문의 세계」『국학연구(창간호)』, 한국국학진흥원
-임세권, 「조선시대 금석학 연구의 실태」
-이완우, 「비첩으로 본 한국 서예사」
논문
김남두, 1990「예당금석과안록의 분석적 연구」, 『사학지』, 단국사학회
김인규, 2004「추사 김정희의 학문관」, 『온지논총』, 온지학회
김태욱, 1999「추사의 실사구시설의 교육철학적 논의」, 『교육철학』, 한국교육철학회
허흥식, 1982,「한국금석문의 정리현황과 전망」, 『민죽문화논총2,3권(모산 심재완 박사 정년퇴임 기념호)』,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참고사이트
민족문화추진회 (www.minchu.or.kr)
한국금석문종합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gsm.nricp.go.kr)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세창은 서도금석학적인 측면에서나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겨 놓았으므로 필자는 위창을 추사학파의 마지막 후손이라고 칭하고 싶다.
그리고 홍양호는 그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에 삼국, 고려의 주요 금석문 목록을 실었고,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고대~조선의 유명한 금석문 이름과 소재지, 건립 연대 등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이밖에 금석문을 수집, 연구한 대표적 인물로 이익, 안정복, 조인영, 정약용을 들 수 있다.
이렇듯 조선의 금석학은 18~19세기 김정희의 등장으로 한 때 “조선금석학의 절정기”를 보내지만 19세기 후반부터의 국정의 혼란과 민족 시련기인 일제치하로 인하여 그 학맥이 전수되지 못하게 된다. 찬란하게 꽃 피웠던 조선 금석학이 당시 수준에서나마 우리의 손으로 조선금석학의 정리가 완성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한편 청의 유희해는 조인영의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를 바탕으로 최초의 종합적인 한국금석문의 정리라고 할 수 있는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 관한 책의 발간에 관한 전모는 유홍준의 완당평전 250~252쪽을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을 간행하였다. 『해동금석원』은 청에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증보 수정되어 간행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문적조사와 연결을 가지면서 행정조직을 움직여 한국금석문의 정리가 진행되었다. 바로 『조서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이 그것이다. 허흥식, 1982,「한국금석문의 정리현황과 전망」, 『민죽문화논총2,3권(모산 심재완 박사 정년퇴임 기념호)』,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39~240쪽
『해동금석원』과 『조선금석총람』의 간행과 보급은 한국사 연구에 큰 활기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당시 한국의 금석문의 정리가 우리의 손이 아니라 전자는 청에 의해 후자는 일본인의 손에 정리된 것이다. 우리의 금석문이 다른 이들의 손에 의해 정리되었다는 사실은 부끄럽고 깊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된 『조선금석총람』이 지금의 학자들에 利用度가 가장 높은 것으로 되어있음은 부끄럽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해방이후 수집정리된 금석문은 황수영의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 이난영의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의 책들이 대표된다. 하지만 『遺文』과 『追補』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모두 『조선금석총람』에 실리지 않은 것만 수록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금석문에 있어서『조선금석총람』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허흥식의 『한국금석문전문』이 간행되었고, 원광대학교의 조동원의 『한국금석문대계』가 79년부터 간행되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각 도시별로 금석문을 정리하여 책을 많이 내고 있다. 조동원의 『한국금석문대계』는 앞의 여러 금석문 책들이 활자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를 탈피하여 직접탁본된 것을 사진으로 첨부하여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 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금석문의 소개, 금석문의 연구, 탁본소개, 금석문찾기, 금석문체험의 메뉴를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맺음말
조선의 금석학은 크게 3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전기 서예의 보조수단으로 금석문을 모았던 첫 번째 시기, 17~18세기 금석문 수집에 대한 열기의 두 번째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19세기를 전후하여 금석학의 활발한 논의가 있었던 마지막 시기의 구분이다. 지금까지 본 고에서 살펴본 것 과 같이 19세기 금석학의 절정기에 완당 김정희가 활동했던 것이다. 『예당금석과안록』은 추사 금석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 논문의 출현 배경과 의미 등을 본고에서 살펴보았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국제적 교류가 그리 쉽지 많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추사는 당시 청과 교류하여 국제적으로 명망을 쌓았고 학문적 성취도 이룰 수 있었다. 다만 그가 쌓아둔 금석학의 학문적인 토대가 이어오지 못하고 청과 일본의 학자에 의해 우리나라의 금석학이 정리 되었다는 것은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비단 추사의 학문 뿐만이 아니라 여러 전통문화의 뿌리가 개항기와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그리고 서양문화의 무분별한 수입으로 단절 되었다는게 무척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일만으로 해결 될 사안은 아니다. 그 끈을 이어가는 역할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몫인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金石文은 『삼국사기』나 『고려사』등의 정사를 보완하는 자료 로 이용되어 왔다. 최근에 와서는 그 1차적인 사료의 가치를 중요시 하면서 금석문은 학계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에 추사의 『예당금석과안록』은 그 빛을 더 발휘하고 있다. 추사를 뿐만아니라 우리의 선학들이 쌓아 놓은 훌륭한 학문적 업적을 다시금 이어 그 학맥을 이어 나가는 것이 우리 후세 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해보면서 짧게 졸고를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유홍준, 2002,『완당평전12』, 학고재
임창순, 1969,「금석과안록」,『한국을 움직인 古典百選』, 신동아
최완수, 1972, 「김추사의 금석학」, 『간송문화3』, 한국민족미술연구소
한국국한진흥원, 2002,「특집-한국금석문의 세계」『국학연구(창간호)』, 한국국학진흥원
-임세권, 「조선시대 금석학 연구의 실태」
-이완우, 「비첩으로 본 한국 서예사」
논문
김남두, 1990「예당금석과안록의 분석적 연구」, 『사학지』, 단국사학회
김인규, 2004「추사 김정희의 학문관」, 『온지논총』, 온지학회
김태욱, 1999「추사의 실사구시설의 교육철학적 논의」, 『교육철학』, 한국교육철학회
허흥식, 1982,「한국금석문의 정리현황과 전망」, 『민죽문화논총2,3권(모산 심재완 박사 정년퇴임 기념호)』,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참고사이트
민족문화추진회 (www.minchu.or.kr)
한국금석문종합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gsm.nric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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