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 창덕궁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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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답사보고서] 창덕궁 답사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창덕궁은 어떤 궁 인가?
 창덕궁 소개
 창덕궁은 왜 지어졌는가?
 창덕궁의 규모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과 관련된 역사물

Ⅱ. 창덕궁 답사 계획
 21세기 새로운 시대, 시대 활용하기

Ⅲ. 창덕궁 답사 과정
 창덕궁의 시작,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조선 왕의 첫관문, 인정문
 인정전 품계석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 선정전
 낯설게 느껴지는 서양식 가구, 희정당
 경술국치, 비극의 현장, 대조전
 세도정치의 왕의 소박한 서재 낙선재
 르네상스 왕,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Ⅳ. 창덕궁 답사 후기

본문내용

가장 오래된 것이이라고 합니다. 돈화는 큰 덕은 백성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라는 뜻을 가지며 조선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조선 왕의 첫관문, 인정문
인정문에서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습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었습니다.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동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과 나무로 만든 곡병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약병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러져 있었고,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인정전 품계석
인정전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바로 ‘품계석’이었습니다. 나라의 행사 때,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간이 중앙을 향해 도열 있었습니다.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 선정전
성정전은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선정전은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제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에 인왕 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제목으로 개건하였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고 합니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었습니다.
낯설게 느껴지는 서양식 가구, 희정당
희정당은 원래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되었다. 1917년 대화제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다. 조선의 한옥 건물에 놓여져 있는 서양식 가구는 나에게 이질감을 주었다. 하지만 서양식 가구가 들어오는 시대에 조선과 어울리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조선이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정당과 효명세자 이야기
희정당은 순조의 아들이며 현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외모와 총명함은 물론이고 책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와 빼닮았다고 전해지는 효명세사,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세력과 맞서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떨쳤지만 아버지의 희망, 할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염원을 채우지 못한 체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세도정치의 왕의 소박한 서재 낙선재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1847년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 등을 지어 수강재와 나란히 두었습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황후를 위한 지었습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었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아서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습니다.
비록 꺽였지만 꿋꿋히 버티는 궐내각사 옆 향나무
궐내 각사 옆에 비록 꺽였지만 꿋꿋하게 서 있는 향나무를 볼 수 있었다.
궐내각사는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 대유재, 소유재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왕,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규장각은 다른 이름으로 내각 또는 이문원이라고도 했다. 정조 즉위 초에 역대왕들의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는 왕실 자료실을 지었다. 왕권확립, 개혁정치, 문예부흥을 표방한 정조가 특별한 의지와 관심을 쏟은 곳이기에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엣 도총부 건물을 차지했다. 규장각의 실무자는 문예와 학식이 뛰어난 서얼 출실들을 주로 임명하여 관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서얼 출식으로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뛰어난 실학자들이 여기서 배출되었습니다.
Ⅳ. 창덕궁 답사 후기
자연과 함께하는, 창덕궁
태어나서 창덕궁을 처음 가봤습니다. ‘제가 살았던 ’위도‘라는 섬에도 관아가 하나 있습니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위도관아‘가 제가 본 유일한 한옥 건축물이었습니다. 대학에 오고 나서 덕수궁 서포터즈 활동을 하면서 한옥 건축물을 종종 보았지만 창덕궁은 남달랐습니다.
덕수궁과 다르게 자연 그대로를 유지했다는 것이 느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있는 건축에서는 요즘에 자연 그대로를 유지한 체 자연과 조화할 수 건축물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창덕궁을 보면서 바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허동현 교수님이 말씀대로 역사를 통해,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나아간다는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답사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창덕궁 그 자체가 자연과 어울리지만 그 중 으뜸이 창덕궁 후원이라고 들어서 꼭 가보고 싶었지만 개방시간을 맞추지 못해 들어 가보지 못했습니다.
현재 조선 왕실을 사라졌습니다. 전주에 이씨종가가 남아있다고 하지만 5백년을 이어온 조선 왕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선 왕실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습니다. 창덕궁은 조선의 27명의 왕들이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왕궁이기에 사라진 조선의 왕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사라졌지만 옛 우리 선조들의 자연과 어울리고 조화하는 선조들에 자세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근대화라는 격동에 시기, 시대가 변화듯이 이 창덕궁도 근대화라는 시대에 따라서 서양식으로 변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왠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시대에 변했을 때, 시대에 맞춰어 변화하지 못했다면 뒤떨어 질 수 밖에 없다고, 창덕궁의 서양식 흔적은 아마도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격동의 시대에 의해 옛 모습 그대로에 모습을 조금이라도 변해지라도 창덕궁은 여전히 현대의 자연과 함께하는 아름다운과 선조들에 지혜가 가득 담아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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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03.03
  • 저작시기2012.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32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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