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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하서 양주의 고장성을 보면 궁북시남이며 이것은 원래 흉노가 건축한 것이 었는데 후에 전량 장씨가 그대로 증축한 것이다.
이상에서 현재까지 나와 있는 낙양성의 파격에 대한 두 견해를 소개하였지만 그 세부적 내역은 달라도 호족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낙양성의 파격 자체를 부정하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가 보기에는 호족의 영향을 부정하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낙양의 가장 기본적인 구역단위를 방이라고 한다. 이방의 숫자는 AD 501년 낙양건설 당시 5만명이 징발되어 40일간에 220개가 건설되었다. 하나 낙양가람기에는 35개 방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실재로는 성내에 8개, 성 밖 곽내의 서쪽 수구리에 약 30개, 동쪽 소시지역, 남쪽 사통시 지역을 합치면 대락 200개의 1/3개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대 이 방 조직의 특성은 당시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리와 합치된다는 점이다. 태화 18년 효문제가 낙양 서궁에 행행했을 때 한현종은 낙양의 경영방침으로 사서구별의 원칙을 거론하였고 그것이 가납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낙양의 거주지역이 종족의 차별보다 사서사
이상에서 현재까지 나와 있는 낙양성의 파격에 대한 두 견해를 소개하였지만 그 세부적 내역은 달라도 호족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물론 이런 주장에 대해 낙양성의 파격 자체를 부정하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가 보기에는 호족의 영향을 부정하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낙양의 가장 기본적인 구역단위를 방이라고 한다. 이방의 숫자는 AD 501년 낙양건설 당시 5만명이 징발되어 40일간에 220개가 건설되었다. 하나 낙양가람기에는 35개 방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실재로는 성내에 8개, 성 밖 곽내의 서쪽 수구리에 약 30개, 동쪽 소시지역, 남쪽 사통시 지역을 합치면 대락 200개의 1/3개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대 이 방 조직의 특성은 당시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리와 합치된다는 점이다. 태화 18년 효문제가 낙양 서궁에 행행했을 때 한현종은 낙양의 경영방침으로 사서구별의 원칙을 거론하였고 그것이 가납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낙양의 거주지역이 종족의 차별보다 사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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