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김부식에 대하여
1. 김부식의 출생
2. 김부식의 활동 및 업적
3. 반란을 핑계로 문적 정지상을 제거
4. 김부식과 윤언이의 갈등
5. 김부식의 평가
참고자료
1. 김부식의 출생
2. 김부식의 활동 및 업적
3. 반란을 핑계로 문적 정지상을 제거
4. 김부식과 윤언이의 갈등
5. 김부식의 평가
참고자료
본문내용
며 당태종의 침략을 비난했었습니다. 오히려 넓게 보면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잘못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본기라고 표기 했습니다. ‘황제의 나라 역사는 본기라 칭하고 제후의 역사는 세가’라 칭하는데 김부식은 당당하게 고려를 황제의 나라로 여겨 세가가 아닌 본기라 칭한 것입니다. 이는 중국의 시각에서 보면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로서는 당당히 우리의 역사를 적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조선시대의 고려사나 동국통감의 경우 세기로서 중국을 천자로 여기고 고려를 제후의 역사로 봄으로써 더욱 더 사대주의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앞에서 말했다 싶이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요.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신채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말입니다. 신채호 선생님은 민족 독립 운동가였기 때문에 자주적인 독립 투쟁심이 매우 강했기에 묘청의 금나라 정벌에 찬성하는 경향을 보이고 김부식을 비판한 것인데 만약에 우리가 고려시대마저 일제치하처럼 금나라에 정벌당해 버렸다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넷째, 김부식은 이전 왕조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가였습니다. 역사가로서 그는「예종실록」과「인종실록」, 그리고「삼국사기」를 편찬하였는데요,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본기와 연표, 지, 열전 등으로 이루어진 기전체 사서로, 현존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삼국사기」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 고대사는 암흑에 빠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삼국사기가 가진 의의와 가치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가 신라에 대한기록이 가장 많기에 김부식이 신라 왕족의 후손이어서 삼국사기는 신라위주로 만들어졌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요 하지만 통일신라기를 제외하고 삼국이 함께 있던 시기의 기록만을 분석하면 신라보다 오히려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더 많고! 고구려의 열전은 자료가 없어, 본기에 이미 나왔던 기록을 그대로 다시 열전에 실으면서까지 고구려의 기록을 늘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즉 삼국의 균형을 위해 노력한 김부식에게 신라위주로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3. 반란을 핑계로 문적 정지상을 제거
앞서 말했듯이 김부식은 1126년 어사대부 추밀원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게
넷째, 김부식은 이전 왕조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가였습니다. 역사가로서 그는「예종실록」과「인종실록」, 그리고「삼국사기」를 편찬하였는데요,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본기와 연표, 지, 열전 등으로 이루어진 기전체 사서로, 현존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삼국사기」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 고대사는 암흑에 빠졌을지도 모를 정도로 삼국사기가 가진 의의와 가치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가 신라에 대한기록이 가장 많기에 김부식이 신라 왕족의 후손이어서 삼국사기는 신라위주로 만들어졌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요 하지만 통일신라기를 제외하고 삼국이 함께 있던 시기의 기록만을 분석하면 신라보다 오히려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더 많고! 고구려의 열전은 자료가 없어, 본기에 이미 나왔던 기록을 그대로 다시 열전에 실으면서까지 고구려의 기록을 늘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즉 삼국의 균형을 위해 노력한 김부식에게 신라위주로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3. 반란을 핑계로 문적 정지상을 제거
앞서 말했듯이 김부식은 1126년 어사대부 추밀원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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