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1483-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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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루터 [1483-1520]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할 것이다.)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의 파문서를 공공장소에서 불태우며 더욱더 투지를 강하게 보였으며,그에 관한 문제의 그 위협 교서뿐만이 아니라 교회법령집, 기타 교황권을 지지하는 책과 문서들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1521년 1월 3일 루터에 대한 파문과 출교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1517년 10월말에 한 무명의 수도사에 의해 비교적 조용히 시작된 한 사건이 그 3년 후에 걷잡을 수 없는 대 사건으로 진전되었다.
1525-34년 사이 Warburgfh 도피하여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옮겨 적었다. 한편 이시기의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의 발달은 성경을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525년 결혼을 금기했던 성직자의 특권을 깬 카타리나 수녀와의 결혼은 성직자로서의 특권을 무너뜨리고 사회자체에도 개혁을 이루었으며 카타리나 수녀와의 사이에 2남 2녀의 자제를 두었다. 루터는 이중적 성직자의 생활 또한 결혼을 통하여 모순을 극복하며 건강한 기독교적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이에 대한 많은 언급을 하였다. “만인 제사장”을 부르짖어 누구 나가 다 제사장이 될 수 있다. 즉 누구나 가정을 가지면 가정을 이끄는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1532년 “뉘른베르그 평화협정”, 1536년 “비텐베르그 협약”의 성립은 프로테스탄트의 개신교회의 존립을 가능케 하였다. 구교에 의해 신교의 승인을 그의 생전에 보게되었으며 혁명적인 교육의 실천가였으나 개신교의 승인 뒤 그의 보수적인 성향의 성격을 보였다 한다.
루터는 1546년 2월18일 아이슬레벤에서 사망하였다.
3. 루터와 두 번의 논쟁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
1518년 4월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인류의 죄성,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지의 노예성, 인간의 협력이 배제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 그리고 일상적인 시간논쟁과 무관한 신앙에 관한 종교개혁 신학의 기초를 제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영광의 신학`을 반대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주장하였다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면죄부 문제 지적 ‘사상의 올가미 찢다’
1519년 7월의 어느날,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교황청의 대리인 에크 교수와 오전 내내 논쟁을 벌이던 루터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 대학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에크 교수가 집요하게 그를 후스파로 몰아갔기 때문에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콘스탄츠 종교회의 기록을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발단이야 다 알다시피 면죄부의 부당성에 대해 루터가 반박문을 공개한 것이었다. 하지만 교황청과의 대립이 커지면서 논점은 로마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느냐 않느냐라는 것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고 생각한 루터를 에크는 당시 이단 심판을 받은 위클리프나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였다. 에크는 그런 역사적 선례에 근거하여 루터 스스로 이단임을 고백하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위클리프나 후스는 구원받기 위해서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선다는 것을 꼭 믿을 필요는 없다는 등의 주장을 했던 인물들이니 루터를 공격하는 데 동원하기에는 맞춤이었다.
하지만 이런 에크의 논변에 대해 루터는 정면으로 대응했다. 후스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고 오후 논쟁에 들어선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후스의 내용을 살펴보니 보편적인 교회로서는 정죄할 수 없는, 분명히 그리스도교적이요 복음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이제 그는 에크의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었다. 하지만 올가미를 더욱 죈 것은 루터 자신이었다. “소박한 평신도가 성경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우리는 성경이 없는 교황이나 종교 회의보다 그 평신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로써 교황청 대리인 에크 교수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하지만 18일간이나 계속된 이 라이프치히 논쟁의 말미에 루터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더 큰 목적을 달성했다. “나는 자유롭게 믿고 싶으며…카톨릭 신자의 주장이든 이단의 주장이든, 교회회의의 인준을 받은 것이든 징계를 받은 것이든 내게 참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당당히 거기에 동의하겠소.” 이후 루터는 로마 교회로부터 파문당했지만, 루터는 공개적으로 파문장을 불살라버림으로써 올가미를 찢어버렸다.
4. 루터의 가정
-루터의 임상적인 절망은 아버지 한스가 바라던 대로 그가 <영향력 있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법률가>가 되었을 때 나타난다. 한스의 선대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농부들이었고, 한스 자신은 그보다 조금 나은(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보잘 것 없는)광부였다. 한스는 아들에게 땅(속)에서는 전혀 흙을 만지지 않고도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법률가가 되기를 강요했고-그 강요는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결국 루터는 당대의 최고 명문인 에어푸르트대학법학부 석사학위를 따낸다 .그러나 막상 보장받은 꽃방석에 앉게 되자 그는 갑자기 무기력의 늪에 빠져 일종의 정서적 식물인간이 된다. 그는 귀향 후 돌아오는 길에 벼락을 맞는다. 이 지극히 우발적이고 발작적인 사건의 묵시적인 의미가 그를 세속의 안락에서 수도원의 묵상으로 가게 한다. 에릭 에릭슨은 여기서 루터의 부상(父像)이 땅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하늘에 있는 아버지로 옮겨간 것으로 이해한다. 말하자면 루터에게 둘 다 억압적으로 나타났던 이두부상에 대한 반항이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폭발물의 뇌관을 때린 것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실제로 교황과 황제로 대표되는 보편적 세계에 대한 공개적 도전을 뜻하는 것이지만 에릭 에릭슨은 이것을 부친 살해, 거세 공포증, 항문기적 고착 등 프로이드의 개념에 의해 탐침(探針)하는 것이다. 이 침을 뚫고 나온 역사의 현실적 차원에서 볼 때 루터의 반항은 르네상스와 함께<교육과 계몽>의 시대, 체계적인,표현의 시대가 뚫고 나오는 균열의 사건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똑똑히 말하려 했고, 또 그것이 말하는 바를 의미하려 했으며, 바로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 주체성을 제공했던 <인쇄 언어 시대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참고도서-
롤란드 베인톤(Roland H. Bainton).“마르틴 루터의 생애”.생명의말씀사
에릭 에릭슨.“청년루터”.인간
연세대학교 교육철학연구회.“위대한 교
  • 가격2,6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13.06.30
  • 저작시기2013.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5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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