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민중운동, 역사를 뒤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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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민중운동, 역사를 뒤흔들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조선후기 정치적상황과 삼정의 문란
  1) 세도정치와 통치 질서의 와해
  2) 수취체제의 문란
  3) 농민의식의 성장

Ⅱ. 본론
 2. 홍경래의 난

 3. 진주민란(壬戌民亂)과 민란의 전국적 확산
  1) 진주민란
  2) 민란의 전국적 확산

Ⅲ. 결론
 4. 민란의 의의


※ 참고문헌

본문내용

배계층의 주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조직체계를 바탕으로 항쟁을 전개하였다. 농민들의 공격은 삼정의 수탈과 관련 있는 수령과 아전 그리고 향촌 내 지배계층인 토호와 지주에게 주로 가해졌다. 봉기를 일으킨 농민들은 보통 동헌으로 몰려가 수령들에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농민들은 관아나 부호들의 집을 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을 관철하고자 했다. 특히 중앙에서 파견한 사신들에게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함평의 정한순은 안핵사 이정현에게 10개 조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고, 금구 농민들은 선무사 조구하에게 민폐 시정 요구 12개조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밖에 전면 봉기 이후 농민들에 의해 지방행정권이 장악되는 경우도 있다. 순창의 경우에는 농민들이 군수 이승백의 귀로를 막고 자신들이 향리를 임면하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충청도지역의 민란 충청도 농민 항쟁은 1862년 3,4월에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의 여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5월에 집중되었다. 5월 10일 회덕 공주 은진을 시작으로 13일 청주, 14일에는 회인 문의 그리고 17일에는 임천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으며, 5월 중순경에는 진천 연산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농민항쟁이 일어난 지역은 대부분 공주와 청주 인근의 군현이었다. 이는 감영과 병영에서의 농민 수탈이 그 원인으로 추정된다.
충청도 민란의 주체 역시 초군과 농민들이었다. 항쟁이 발생한 11개 지역 가운데 공주 회덕 회인 청주 연산 등지에서는 초군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일반 농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초군은 농민항쟁을 일으키는 데 가장 중요한 조직이었다. 초군들은 통문을 돌리고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양반가나 관청을 공격하였다.
농민들의 공격 대상에는 관청이나 향리층만이 아니라, 향촌을 지배하고 있던 유력 양반들도 포함되었다. 특히 은진 진잠 천안의 경우에는 관청에 대한 공격은 없고 양반들에 대한 공격만이 보고되었다.
충청도에서는 농민항쟁이 군현 단위의 국지적 규모에서 벗어나 이웃군현까지 공격 목표로 확대되고 있었다. 은진 민란의 경우에는 농민들이 전라도 여산부를 습격한 것으로 보아, 그것이 이웃 군현간의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농민항쟁은 전국적 규모로 연대하여 발전되지는 않았으나, 농민들의 의식이 이웃 군현을 공격할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항쟁은 군현 단위로 이루어졌으나, 항쟁의 발발은 이웃한 군현 간에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Ⅲ. 결론
4. 민중운동의 의의
1862년 2월 초 경상도 단성과 진주에서 시작하여 그해 말까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조선말기의 가장 큰 반봉건투쟁이었다. 이를 통하여 농민들은 삼정의 조세제도가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여 이를 시정하였고, 수령과 아전 등 수취 담당자들에 대한 공격과 지방행정권 장악을 통해 봉건적 통치체제를 부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에서는 농민항쟁으로 야기된 체제붕괴의 위기를 삼정이정책의 시행을 통해 모면하고자 하였고, 농민항쟁이 수그러들자 다시 그 이전으로 환원하였다.
1862년의 농민항쟁은 결과적으로 보아 실패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으나 19세기 농민항쟁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첫째, 이전의 농민항쟁에서 나타난 고립성과 분산성은 여전히 이어졌으나, 민란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점차 극복되어 가고 있었다. 둘째, 항쟁 주도세력의 주체적 역량이 점차 강화되었다. 예를 들면 적극적인 항쟁을 위해 주동층이 구성되고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일정한 계획에 따라 목표물을 공격하고 상당한 기간 동안 지방 행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셋째, 주도층은 몰락한 양반 또는 초군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전통 있는 양반이나 부호층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초군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단순히 항쟁의 확대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조직 활동을 강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1862년의 민란이 가졌던 한계로는 첫째, 그들은 신분 또는 계급적인 인식이 부족하여 사회의 전반적인 모순 시정만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공격이 끝난 후에는 쉽게 해산을 하였다. 이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를 확실히 보장받지 못하였고, 곧 탄압을 받게 되었다. 둘째, 무장력이 미약하였다. 대개의 경우 이들이 지닌 것은 몽둥이가 전부였다. 같은 시기에 명화적들이 말을 타고 총을 갖고 다닌 것에 비하면 매우 빈약하였다. 셋째, 농민들은 조세수취체제의 개혁 즉 지주제의 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지주제 개혁과 농민적 토지 소유의 실현에 대한 요구는 반봉건투쟁의 전반적인 강도와 수준에 비하여 미약하였다.
민란이 갖는 이러한 한계는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이 민족모순이 부가되면서 아래로부터의 변화와 저항의 주체로서 결집되어, 이후 동학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농민항쟁을 통하여 극복되어 나갔다.
지금까지 조선후기에 들어서 빈번해진 민란에 대해 알아보았다. 가혹한 수탈과 삼정의 문란 등으로 고통 받던 백성들이 결국은 몽둥이를 들어야만 했던 조선 후기의 민중항쟁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삶을 위한 경제투쟁으로서의 농민항쟁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규모의 농민봉기를 수반한 진정한 의미의 농민항쟁이 폭발한 것은 19세기 중엽에 들어서의 일이다. 이러한 민란의 정형을 앞에서 알아 본 홍경래의 난, 1862년 진주를 비롯한 전국적인 농민항쟁을 통하여 찾을 수 있었다.
이때의 농민항쟁은 전국에 걸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진행과정상 거의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었다. 관리들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다 못한 일부의 농민들은 뜻을 모아 현실문제에 대처하기로 했고, 이에 먼저 집회를 열어 모든 주민들의 의견을 모은 다음, 대표를 뽑고, 관아에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한다. 이때 관아에서는 대체적으로 농민들의 뜻을 받아들일 것으로 약속하지만, 대부분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다시금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한다. 이에 농민들은 더 이상의 관용을 베풀지 않고 봉기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 참고문헌
고성훈, 『민란의 시대』, 가람기획, 2000
국사편찬위원회, 「조선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한국사』36, 1997
변태섭, 『한국사통론』, 삼영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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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01
  • 저작시기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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