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시조와 시조작가
Ⅲ. 시조와 시조집
1. 시조집 편찬
2. 3대 시조집
1) <청구영언>(1728, 영조 4년)
2) <해동가요>(1763, 영조 39년)
3) <가곡원류>(1763, 영조 39년)
3. 기타 가집
1) <고금가곡>
2) <동가선>
3) <남흥태평가> 등
4) <악학습령>
5) <풍아>
Ⅳ. 시조와 도가
Ⅴ. 시조와 변신모티브
Ⅵ. 시조와 고구려시조
Ⅶ. 시조와 고대시조
Ⅷ. 시조와 현대시조
Ⅸ. 시조와 생활시조
참고문헌
Ⅱ. 시조와 시조작가
Ⅲ. 시조와 시조집
1. 시조집 편찬
2. 3대 시조집
1) <청구영언>(1728, 영조 4년)
2) <해동가요>(1763, 영조 39년)
3) <가곡원류>(1763, 영조 39년)
3. 기타 가집
1) <고금가곡>
2) <동가선>
3) <남흥태평가> 등
4) <악학습령>
5) <풍아>
Ⅳ. 시조와 도가
Ⅴ. 시조와 변신모티브
Ⅵ. 시조와 고구려시조
Ⅶ. 시조와 고대시조
Ⅷ. 시조와 현대시조
Ⅸ. 시조와 생활시조
참고문헌
본문내용
가가 적게 알려졌다고 생각하며 조선후기 작가 중에서 고산 윤선도를 제외하고 특출한 작가가 없다고 본다.임란이후부터 신문학이 전개되기까지 시조 작가의 수는 약 100여명으로 알려진다.
Ⅲ. 시조와 시조집
일반평민에서 임금에 이르기까지 多樣했다. 처음에는 주로 양반들이 짓고 부르던 것이 조선 영.정조 이후에는 농민들도 짓고 불렀다.
이런 점에서 時調는 國文學의 대표적 쟝르라고 할 수 있다.
시조를 전문적으로 부르는 전문가객의 출현시기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운데 17세기를 지나면서 시조의 작가 층이 중인 및 서민층으로 확대되고, 委港人 (또는 閭港人)들이 시조의 창작과 가창에 대거 참여하게 되며 이들은 전문가단을 형성하여 활동한다.
<소대풍요>에서 <풍요삼선>에 이르기까지 위항시인은 800여명이고 가객과 겹치는 사람은 정내교, 주의식, 김유기 등이며 전문가객의 선두로 보인다.
숙종 이후에 시조는 주로 평민가객들에 의해 창작·가창·전승되고 그 가치가 보존되었는데 전문가객의 문학사적 공로는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① 시조 창법의 개발을 통한 시조음악 발달에 공헌 김성기, 한유신등이 시조 창법 개발에 노력하였다.
② 전문가단을 만들어 지속적 활동을 모색하였고 후진 양성에 노력. 김천택 등에 의한 ‘경정산 가단’과 ‘노가제 가단’등이 주로 활약하였다.
③ 가집편찬으로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등이 모두 평민 가객에 의한 것들이다.
1. 시조집 편찬
시조문학의 융성기 이후에 시조집에 찬집시대가 도래하였는데 동인을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시조 발생 약 300년이 흐르면서 역사적으로 시조작품을 정리할 단계에 왔으며, 임란이후 자아각성, 숙종 이후 크게 발달한 평민문학 등으로 뚜렷한 문학관을 가졌으므로 시조집 편찬이 가능했다.
2. 3대 시조집
1) <청구영언>(1728, 영조 4년)
김천택 편찬. 현존하는 시조집 가운데 편찬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수록작품도 비교적 많다. 내용체제는 권두에 정윤경 서문, 편자의 서문 등이며 전체를 대략적으로 곡조에 의해 분류하였다. 오장환본, 최남선본, 이가원본, 송석하, 이희승 소장본 등이 있다.
2) <해동가요>(1763, 영조 39년)
<청구영언> 다음으로 이루어진 김수장 편찬의 시조집. 편찬방법은 작가별 배열이며 작가의 성명을 밝혀서 비교적 체제가 잘 정비됨.
3) <가곡원류>(1763, 영조 39년)
<청구영언>, <해동가요>뒤에 나타난 시조문학의 총결산 시조집으로 박효관, 안민영이 편찬함. 시조집 명칭이 <가곡원류>, <청구악장>, <가사집>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시조집이 원본을 찾는 일과 명칭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3. 기타 가집
1) <고금가곡>
편자, 편찬연대, 가집의 이름이 모두 미상인 시조집으로 이 책의 끝에 수록된 편자의 시조 가운데 “..... 고금가곡을 쓰는 뜻은 여기에나 흥을 부쳐 소일 코자 하노라.”라는 작품이 있어 <고금가곡>을 시조집의 명칭으로 삼았다. 권말에 “甲申春松桂烟月翁”이라는 기명이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고 이 시조집은 내용상의 분류법을 쓴 것이 특이하다. 302수의 작품이 실렸는데 그 중 120수가 3대 시조집에 실리지 않은 것이다.
2) <동가선>
순조 20년 혹은 정조 5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며 편자는 백경현이고 331수를 하였으며 곡조에 의해 분류하였다.
3) <남흥태평가> 등
<남흥태평가>, <객악보>, <근화악부>, <화원악보> 등은 편자와 편찬연대를 알 수 없는 시조집이며 <남흥태평가>는 현존하는 가집 중에서 유일한 목판본 가집이다.
4) <악학습령>
이형선이 편찬. 영조대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특이한 것은 다른 시조집에 보이지 않는 오음도와 음절도의 기록이 있다.
5) <풍아>
이세보의 시조집으로 1860년에서 1862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세보는 458수의 시조를 지은 고시조 작가이다.
Ⅳ. 시조와 도가
도가사상에는 원천적으로 은일 사상이 들어있다. 이는 도가사상이 비현실적이고 초현세적인 데 기인한다고 하겠다.
시조에도 현실을 도피하여 은둔생활을 했거나, 혹은 직접 은둔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현실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은일 생활을 동경하고 이상으로 여겼다. 은둔의 장소가 바로 자연이었고 대상이었기 때문에 자연은 그들의 시적 소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자연 속에서 신선을 동경하고 노래한 것은 그들이 신선사상에 이미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신선의 거처는 천상과 현세의 선경을 말하는데, 현세의 선계를 흔히 무릉도원이라 한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는 중국문학상에도 높이 평가된 작품이지만 선계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그래서 승경은 곧 무릉이요, 무릉은 곧 선계다.
옛 신선의 자취를 그리며, 혹은 지상의 선계를 꿈꾸는 일은 은일의 구체적 표징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앞선 이들의 자취를 통해 스스로의 처신의 거울로 삼으려 했고, 현실의 질곡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진세의 속물적 가치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공간을 관념화함으로써 구체적 은일의 장이 그들 앞에 펼쳐지기를 고대하였다.
西湖 눈 진 밤의 비치 낫 제
鶴을 님의고 江皐로 나려 가니
蓬海에 羽衣仙人을 마조 본 예라.
- <許(1520~1592), 出典 松湖遺稿> -
눈이 내려 낮과 같은 西湖 강가를 鶴을 여미어 입고 강 언덕을 내려가니 봉래산의 깃 옷을 입은 신선을 마주 본 듯하다고 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선계에서의 유선이 아니라 현실적 삶의 공간에서 유선이다. 곧 현상계에 있으면서 신선세계를 동경하여 그것을 관념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西湖의 자연 경관물은 이미 현상으로 나타나는 자연물이 아니라 許에 있어서는 仙境이며, 자신은 선계에 오른 신선이 된 듯하다. 자아 흥취가 이미 도도한 상태여서 굳이 선계를 꿈꿀 필요가 없다.
소재적 측면에서도 蓬海 즉 蓬萊山이 등장하고 있다. 신선설의 기원에 대해서 고대 山岳信仰과 결부시켜 齊國의 동북 연안의 명산을 제사하는 八神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들 명산의 제사를 맡은 巫祝 祝徒들 사이에서 먼저 蓬萊方丈瀛州의 三神山 설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시인은 仙的 공간인 봉래산을 소재로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Ⅲ. 시조와 시조집
일반평민에서 임금에 이르기까지 多樣했다. 처음에는 주로 양반들이 짓고 부르던 것이 조선 영.정조 이후에는 농민들도 짓고 불렀다.
이런 점에서 時調는 國文學의 대표적 쟝르라고 할 수 있다.
시조를 전문적으로 부르는 전문가객의 출현시기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운데 17세기를 지나면서 시조의 작가 층이 중인 및 서민층으로 확대되고, 委港人 (또는 閭港人)들이 시조의 창작과 가창에 대거 참여하게 되며 이들은 전문가단을 형성하여 활동한다.
<소대풍요>에서 <풍요삼선>에 이르기까지 위항시인은 800여명이고 가객과 겹치는 사람은 정내교, 주의식, 김유기 등이며 전문가객의 선두로 보인다.
숙종 이후에 시조는 주로 평민가객들에 의해 창작·가창·전승되고 그 가치가 보존되었는데 전문가객의 문학사적 공로는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① 시조 창법의 개발을 통한 시조음악 발달에 공헌 김성기, 한유신등이 시조 창법 개발에 노력하였다.
② 전문가단을 만들어 지속적 활동을 모색하였고 후진 양성에 노력. 김천택 등에 의한 ‘경정산 가단’과 ‘노가제 가단’등이 주로 활약하였다.
③ 가집편찬으로 김천택의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등이 모두 평민 가객에 의한 것들이다.
1. 시조집 편찬
시조문학의 융성기 이후에 시조집에 찬집시대가 도래하였는데 동인을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시조 발생 약 300년이 흐르면서 역사적으로 시조작품을 정리할 단계에 왔으며, 임란이후 자아각성, 숙종 이후 크게 발달한 평민문학 등으로 뚜렷한 문학관을 가졌으므로 시조집 편찬이 가능했다.
2. 3대 시조집
1) <청구영언>(1728, 영조 4년)
김천택 편찬. 현존하는 시조집 가운데 편찬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수록작품도 비교적 많다. 내용체제는 권두에 정윤경 서문, 편자의 서문 등이며 전체를 대략적으로 곡조에 의해 분류하였다. 오장환본, 최남선본, 이가원본, 송석하, 이희승 소장본 등이 있다.
2) <해동가요>(1763, 영조 39년)
<청구영언> 다음으로 이루어진 김수장 편찬의 시조집. 편찬방법은 작가별 배열이며 작가의 성명을 밝혀서 비교적 체제가 잘 정비됨.
3) <가곡원류>(1763, 영조 39년)
<청구영언>, <해동가요>뒤에 나타난 시조문학의 총결산 시조집으로 박효관, 안민영이 편찬함. 시조집 명칭이 <가곡원류>, <청구악장>, <가사집>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시조집이 원본을 찾는 일과 명칭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3. 기타 가집
1) <고금가곡>
편자, 편찬연대, 가집의 이름이 모두 미상인 시조집으로 이 책의 끝에 수록된 편자의 시조 가운데 “..... 고금가곡을 쓰는 뜻은 여기에나 흥을 부쳐 소일 코자 하노라.”라는 작품이 있어 <고금가곡>을 시조집의 명칭으로 삼았다. 권말에 “甲申春松桂烟月翁”이라는 기명이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고 이 시조집은 내용상의 분류법을 쓴 것이 특이하다. 302수의 작품이 실렸는데 그 중 120수가 3대 시조집에 실리지 않은 것이다.
2) <동가선>
순조 20년 혹은 정조 5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하며 편자는 백경현이고 331수를 하였으며 곡조에 의해 분류하였다.
3) <남흥태평가> 등
<남흥태평가>, <객악보>, <근화악부>, <화원악보> 등은 편자와 편찬연대를 알 수 없는 시조집이며 <남흥태평가>는 현존하는 가집 중에서 유일한 목판본 가집이다.
4) <악학습령>
이형선이 편찬. 영조대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특이한 것은 다른 시조집에 보이지 않는 오음도와 음절도의 기록이 있다.
5) <풍아>
이세보의 시조집으로 1860년에서 1862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세보는 458수의 시조를 지은 고시조 작가이다.
Ⅳ. 시조와 도가
도가사상에는 원천적으로 은일 사상이 들어있다. 이는 도가사상이 비현실적이고 초현세적인 데 기인한다고 하겠다.
시조에도 현실을 도피하여 은둔생활을 했거나, 혹은 직접 은둔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현실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은일 생활을 동경하고 이상으로 여겼다. 은둔의 장소가 바로 자연이었고 대상이었기 때문에 자연은 그들의 시적 소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자연 속에서 신선을 동경하고 노래한 것은 그들이 신선사상에 이미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신선의 거처는 천상과 현세의 선경을 말하는데, 현세의 선계를 흔히 무릉도원이라 한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는 중국문학상에도 높이 평가된 작품이지만 선계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그래서 승경은 곧 무릉이요, 무릉은 곧 선계다.
옛 신선의 자취를 그리며, 혹은 지상의 선계를 꿈꾸는 일은 은일의 구체적 표징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앞선 이들의 자취를 통해 스스로의 처신의 거울로 삼으려 했고, 현실의 질곡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진세의 속물적 가치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공간을 관념화함으로써 구체적 은일의 장이 그들 앞에 펼쳐지기를 고대하였다.
西湖 눈 진 밤의 비치 낫 제
鶴을 님의고 江皐로 나려 가니
蓬海에 羽衣仙人을 마조 본 예라.
- <許(1520~1592), 出典 松湖遺稿> -
눈이 내려 낮과 같은 西湖 강가를 鶴을 여미어 입고 강 언덕을 내려가니 봉래산의 깃 옷을 입은 신선을 마주 본 듯하다고 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선계에서의 유선이 아니라 현실적 삶의 공간에서 유선이다. 곧 현상계에 있으면서 신선세계를 동경하여 그것을 관념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西湖의 자연 경관물은 이미 현상으로 나타나는 자연물이 아니라 許에 있어서는 仙境이며, 자신은 선계에 오른 신선이 된 듯하다. 자아 흥취가 이미 도도한 상태여서 굳이 선계를 꿈꿀 필요가 없다.
소재적 측면에서도 蓬海 즉 蓬萊山이 등장하고 있다. 신선설의 기원에 대해서 고대 山岳信仰과 결부시켜 齊國의 동북 연안의 명산을 제사하는 八神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들 명산의 제사를 맡은 巫祝 祝徒들 사이에서 먼저 蓬萊方丈瀛州의 三神山 설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시인은 仙的 공간인 봉래산을 소재로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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