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되었다. 유럽의 분열에서 비롯된 이 같은 결과는 중국의 통일이 빚어낸 결과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 조정은 해외 항해 이외의 활동에 대해서도 이따금씩 중단 결정을 했다. 14세기에는 정교한 수력방적기의 개발을 포기함으로써 산업혁명의 문턱에서 물러났고, 세계의 시계 제작 기술을 선도하고 있던 기계식 시계를 파기 또는 사실상 전폐해버렸으며, 15세기 말 이후에는 기계장치나 기술 전반에 걸쳐 후퇴하게 되었다. 통일의 이 같은 잠재적 해로움은 현대 중국에서도 다시 위력을 발휘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휩쓴 분화대혁명의 강기 속에서 한 명 또는 소수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정 때문에 전국의 모든 학교가 5년 동안 문을 닫았던 것이다.
중국은 통일되어 있을 때가 많았고 유럽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는데, 두 경우 모두 역사가 깊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지역들은 B. C. 211년에 처음으로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고, 그때부터 대체로 그 상태를 유지했다. 중국에서는 문자가 처음 생길 때 문자 체계라고는 하나 뿐 이었으며, 장장 2000년 동안이나 문화적 통일성을 지켜왔다.
그러나 유럽은 먼발치에서조차 정치적 통일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유럽은 14세기까지도 1000개에 달하는 독립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500년에는 500개의 소국이 있었으며,1980년대에는 최소 25개국까지 줄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늘어나40개국에 가깝다. 유럽에는 아직도 45개 언어가 존재하고 그 모두가 나름대로 변경시킨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는 더욱 다양하다. 유럽경제 공동체 EEC를 통해 조금이나마 통일을 꾀하려던 시도조차 좌절되고 말 정도로 유럽은 오늘날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같은 현상은 유럽에 뿌리박혀 있는 분열 지향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중략
B.C. 211년 마침내 중국이 통일되자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다른 독립국가가 창건되어도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물론 B.C. 211년 이후에도 몇 차례 분열 시대가 있었지만 언제나 재통일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샤를마뉴대제, 나폴레옹, 히틀러 등 강력한 정복자들의 노력에도 유럽은 통일되지 않았다. 심지어 절정기의 로마제국도 유럽 면적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지 못했다.
중국이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내부의 장애물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은 처음에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북중국, 남중국 해안 내륙이 각각 다른 농작물, 가축, 기술, 문화적 특징을 낳아서 그 모두가 차후 통일된 중국에 보탬이 되었다. 예를 들면 기장 재배, 청동 기술, 문자 등은 북중국에서 시작되었고 벼농사와 주철 기술 등은 남중국에서 발생했다. 이 책에서 나는 대체로 강력한 장애물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 기술 확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의 연결성은 불이익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어느 한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럽의 지리적 분할 상태는 서로 경쟁하는 수십 또는 수백 개의 독립 소국과 혁신의 중심지들을 만들어 냈다. 그 중에서 어떤 국가가 특정 혁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일을 했고, 따라서 이웃 국가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정복당하거나 경제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장애물들은 정치적 통일을 막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지만 기술과 아이디어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처럼 유럽 전역의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과 중국의 정치체제 차이 뿐 아니라 지정학적 위치요서, 자연환경이 자본주의의 이행으로의 차이를 발생시켰다는 부분을 확인 할 수 있다. 유럽은 통일되지 않은 인적군가 끼리의 경쟁으로 인하여 해외로 눈을 돌려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 국가에 의해서 뒤처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경쟁적 환경에 노출됨으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전해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통일된 국가가 거의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쟁적 환경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되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이행으로의 논쟁에서 좀 더 진일보한 개념으로 그렇다면 어떻게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중세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하는 당시의 국가는 현대의 국가와는 사뭇 다른 형태의 국가였다. 그 개념은 “국민국가”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지금의 국가의 모습이 정립된 것은 1900년대 이다.
\"1947년 미국 동부의 벨 연구소에서 발명된 트렌지스터가 단숨에 13,000km를 건너뛰어 일본에서 전자 산업을 촉발시켰다.그러나 그보다 가까운 자이르나 파라과이에서는 트렌지스터가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늘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나라들도 따지고 보면 이미 수 천년 전부터 식량생산을 바탕으로 한 옛 중심지에 편입되어 있던 지역이거나 아니면 그 같은 중심지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자이르나 파라과이와 달리 일본을 비롯한 신흥강국들이 재빨리 트랜지스터를 이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국민들이 이미 전부터 문자, 금속기계류,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 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식량 생산을 시작한 두 중심지(비옥한 초승달지대와 중국)가 아직도 현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에서 나아가 동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유럽 국가에 비해 상당히 발달된 문명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세시대에 이미 독자적으로 문자를 개발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다양한 과학기술을 발달시켰다. 따라서 어떤 혁신적인 발달에 있어서 급속한 도입이 없었다는 것이다. 유교문화 등 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러한 문물들의 도입이 정체 되었다는 식의 논리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문자에 대해서 더욱 깊게 살펴보면
\"중국 어린이들을 연구해보면 수천 개의 기호가 있는 전통적인 중국 문자(=한자)보다 중국어 발음을 알파
중국은 통일되어 있을 때가 많았고 유럽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는데, 두 경우 모두 역사가 깊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지역들은 B. C. 211년에 처음으로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고, 그때부터 대체로 그 상태를 유지했다. 중국에서는 문자가 처음 생길 때 문자 체계라고는 하나 뿐 이었으며, 장장 2000년 동안이나 문화적 통일성을 지켜왔다.
그러나 유럽은 먼발치에서조차 정치적 통일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유럽은 14세기까지도 1000개에 달하는 독립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500년에는 500개의 소국이 있었으며,1980년대에는 최소 25개국까지 줄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늘어나40개국에 가깝다. 유럽에는 아직도 45개 언어가 존재하고 그 모두가 나름대로 변경시킨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는 더욱 다양하다. 유럽경제 공동체 EEC를 통해 조금이나마 통일을 꾀하려던 시도조차 좌절되고 말 정도로 유럽은 오늘날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같은 현상은 유럽에 뿌리박혀 있는 분열 지향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중략
B.C. 211년 마침내 중국이 통일되자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다른 독립국가가 창건되어도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물론 B.C. 211년 이후에도 몇 차례 분열 시대가 있었지만 언제나 재통일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샤를마뉴대제, 나폴레옹, 히틀러 등 강력한 정복자들의 노력에도 유럽은 통일되지 않았다. 심지어 절정기의 로마제국도 유럽 면적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지 못했다.
중국이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내부의 장애물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은 처음에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북중국, 남중국 해안 내륙이 각각 다른 농작물, 가축, 기술, 문화적 특징을 낳아서 그 모두가 차후 통일된 중국에 보탬이 되었다. 예를 들면 기장 재배, 청동 기술, 문자 등은 북중국에서 시작되었고 벼농사와 주철 기술 등은 남중국에서 발생했다. 이 책에서 나는 대체로 강력한 장애물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 기술 확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의 연결성은 불이익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어느 한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럽의 지리적 분할 상태는 서로 경쟁하는 수십 또는 수백 개의 독립 소국과 혁신의 중심지들을 만들어 냈다. 그 중에서 어떤 국가가 특정 혁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일을 했고, 따라서 이웃 국가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정복당하거나 경제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장애물들은 정치적 통일을 막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지만 기술과 아이디어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처럼 유럽 전역의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과 중국의 정치체제 차이 뿐 아니라 지정학적 위치요서, 자연환경이 자본주의의 이행으로의 차이를 발생시켰다는 부분을 확인 할 수 있다. 유럽은 통일되지 않은 인적군가 끼리의 경쟁으로 인하여 해외로 눈을 돌려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 국가에 의해서 뒤처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경쟁적 환경에 노출됨으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전해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통일된 국가가 거의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쟁적 환경에 상대적으로 덜 노출되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이행으로의 논쟁에서 좀 더 진일보한 개념으로 그렇다면 어떻게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중세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하는 당시의 국가는 현대의 국가와는 사뭇 다른 형태의 국가였다. 그 개념은 “국민국가”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지금의 국가의 모습이 정립된 것은 1900년대 이다.
\"1947년 미국 동부의 벨 연구소에서 발명된 트렌지스터가 단숨에 13,000km를 건너뛰어 일본에서 전자 산업을 촉발시켰다.그러나 그보다 가까운 자이르나 파라과이에서는 트렌지스터가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늘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나라들도 따지고 보면 이미 수 천년 전부터 식량생산을 바탕으로 한 옛 중심지에 편입되어 있던 지역이거나 아니면 그 같은 중심지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자이르나 파라과이와 달리 일본을 비롯한 신흥강국들이 재빨리 트랜지스터를 이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국민들이 이미 전부터 문자, 금속기계류,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 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식량 생산을 시작한 두 중심지(비옥한 초승달지대와 중국)가 아직도 현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에서 나아가 동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유럽 국가에 비해 상당히 발달된 문명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세시대에 이미 독자적으로 문자를 개발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다양한 과학기술을 발달시켰다. 따라서 어떤 혁신적인 발달에 있어서 급속한 도입이 없었다는 것이다. 유교문화 등 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러한 문물들의 도입이 정체 되었다는 식의 논리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문자에 대해서 더욱 깊게 살펴보면
\"중국 어린이들을 연구해보면 수천 개의 기호가 있는 전통적인 중국 문자(=한자)보다 중국어 발음을 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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