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소설과 리얼리즘
Ⅱ. 소설과 소설론
Ⅲ. 소설과 작가
Ⅳ. 소설과 조정자
Ⅴ. 소설과 로맨스
Ⅵ. 소설과 서사문학
Ⅶ. 소설과 희곡
Ⅷ. 소설과 영화
Ⅸ. 소설과 게임
Ⅹ. 소설과 액자구조
참고문헌
Ⅱ. 소설과 소설론
Ⅲ. 소설과 작가
Ⅳ. 소설과 조정자
Ⅴ. 소설과 로맨스
Ⅵ. 소설과 서사문학
Ⅶ. 소설과 희곡
Ⅷ. 소설과 영화
Ⅸ. 소설과 게임
Ⅹ. 소설과 액자구조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 과정을 밟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글을 읽을 때보다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고체계의 중심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무척 인상깊고 매우 의미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 글 쓰는 사람 모두의 욕망임을 감안하다면 소설쓰기는 글쓰기의 전형적인 예라 할 것이다. 이 점을 좀더 교육 현실과 관련된 차원에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게임과 유사하다. 우선 작품은 그 속에 작가와 독자 간에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약속이 있다는 점에서 규칙을 필수 요건으로 하는 게임의 장이 된다. 또한 작품의 내용이 작가나 독자가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진진해야 한다는 게임의 내용과 상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이다. 게임은 일방적인 힘의 우열관계가 드러나면 더 이상 게임으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소설 읽기와 대응된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작가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독자는 그 정보를 어렵게 찾아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지나치게 정보를 움켜쥐고 있음으로 해서 독자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한 나머지 글읽기를 포기한다면 작가 또한 글을 읽도록 해야 하는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 되기 때문에 작가의 우위를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독자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끝까지 읽어 나갈 수 있는 소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상당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읽어 낼 수 있는 소설일 때 그것을 읽는 행위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소설이 그러해야 한다는 조건의 충족은 우리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능력과 감각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 소설가의 몫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문제는 독자인데 독자들은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소설이라는 양식의 규칙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물론 작가가 고심 끝에 선택한 언어들의 형상물을 읽어 내는데 필요한 언어적 감각과 상상력을 키우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그래야만 작가와 독자 간에 정당하고 흥미있고 유익한 게임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교육의 한 방향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소설작품을 당위적으로 배워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 즐겨 배우고자 하는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방법을 탐구하는데 어드벤처 게임과 같은 전자오락게임을 줄기는 학생들의 심리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것에서 출발해서 점점 복잡한 게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는 원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핵심이 된다. 그리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어느덧 마니아로 변모하게 되고 여유를 가지고 즐기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스스로의 활용할 수 있는 원리의 터득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는 일이다. 전자가 지식의 문제라면 후자는 태도의 문제라 할 수 있는데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다.
Ⅹ. 소설과 액자구조
『난장이』는 영수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집단의 각성과 그 마지막(이자 효율적인) 실천으로서의 살인과 자기희생의 이야기만으로도 그 리얼리즘적 성취를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독특한 서사적 전달의 회로에 담아냄으로써 또 다른 하나의 의미를 겨냥한다. 『난장이』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시작되어 「에필로그」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 고등학교 수학교사의 수업시간을 다루고 있는 이 두 편이 난쟁이 가족과 영수 및 경훈의 이야기들을 감싸 안는 일종의 틀-이야기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이 작품집의 도입부가 되는 「뫼비우스의 띠」에서는 교사가 뫼비우스의 띠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구체화될 수 있는 입체의 가능성을 학생들에게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클라인씨의 병이 갖는 상징적 의미에 대한 영수의 인식과 직접적으로 연장된다는 의미에서 그 상관성은 아주 긴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뫼비우스의 띠」와 「에필로그」에서 반복적으로, 그러나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꼽추와 앉은뱅이의 삽화를 그러한 수업의 진행과 어떻게 연관시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즉, 같은 시점(時點)에 서로 다른 공간에서 벌어진 행복동 사람들의 이야기와 경우가 수업을 받는 교육현장을 병치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며, 아니면 「뫼비우스의 띠」와 「에필로그」에서 반복되어 제시되는 꼽추와 앉은뱅이의 삽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수를 중심으로 전개된 위와 같은 저항의 각성과 저항의 이야기가 중간에서 일종의 내부 이야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가능성도 물론 존재한다. 난쟁이 가족의 이야기와 수학교사의 수업시간을 일종의 동시적 사건으로 간주할 경우라면, 그것은 영수의 발언에서 보는 것처럼 학교/사회의 전혀 이질적인 질서와 논리를 드러내는 구조로 읽힐 것이며, 그것은 그것대로 단일한 의미망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수업 장면에 포함된 꼽추와 앉은뱅이의 삽화가 영수네 가족에게 닥친 삶의 변화(그 시간적 경과)를 감안하면, 『난장이』는 넓은 의미에서의 액자 형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보다 타당하고, 또 그래야만 이 작품이 독자들에 대한 서사적 전달의 구조에 있어서의 특정한 목적론을 이야기할 수가 있게 된다.
참고문헌
김근호 - 현대소설 작가 비평의 문학교육적 실천 모형, 한국어교육학회, 2010
김형중 - 소설의 정의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 시론 현대문학이론학회, 2003
구인환 - 서사와 소설, 크리스챤서적·창조문예사, 2004
김효정 - 소설과 영화의 서술 양상 연구, 한국말글학회, 2010
박철석 - 한국 리얼리즘 소설 연구, 동아대학교, 1991
조보라미 - 소설에서 희곡으로의 각색 연구, 형설출판사, 2007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여러 가지 면에서 게임과 유사하다. 우선 작품은 그 속에 작가와 독자 간에 관습적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약속이 있다는 점에서 규칙을 필수 요건으로 하는 게임의 장이 된다. 또한 작품의 내용이 작가나 독자가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진진해야 한다는 게임의 내용과 상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이다. 게임은 일방적인 힘의 우열관계가 드러나면 더 이상 게임으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일방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소설 읽기와 대응된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작가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독자는 그 정보를 어렵게 찾아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지나치게 정보를 움켜쥐고 있음으로 해서 독자가 많은 어려움에 봉착한 나머지 글읽기를 포기한다면 작가 또한 글을 읽도록 해야 하는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 되기 때문에 작가의 우위를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독자가 별다른 노력 없이도 끝까지 읽어 나갈 수 있는 소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상당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읽어 낼 수 있는 소설일 때 그것을 읽는 행위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소설이 그러해야 한다는 조건의 충족은 우리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능력과 감각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는 소설가의 몫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문제는 독자인데 독자들은 자신의 몫을 다하기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소설이라는 양식의 규칙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물론 작가가 고심 끝에 선택한 언어들의 형상물을 읽어 내는데 필요한 언어적 감각과 상상력을 키우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그래야만 작가와 독자 간에 정당하고 흥미있고 유익한 게임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교육의 한 방향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소설작품을 당위적으로 배워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 즐겨 배우고자 하는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방법을 탐구하는데 어드벤처 게임과 같은 전자오락게임을 줄기는 학생들의 심리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것에서 출발해서 점점 복잡한 게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는 원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핵심이 된다. 그리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어느덧 마니아로 변모하게 되고 여유를 가지고 즐기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스스로의 활용할 수 있는 원리의 터득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줄이는 일이다. 전자가 지식의 문제라면 후자는 태도의 문제라 할 수 있는데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다.
Ⅹ. 소설과 액자구조
『난장이』는 영수의 죽음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집단의 각성과 그 마지막(이자 효율적인) 실천으로서의 살인과 자기희생의 이야기만으로도 그 리얼리즘적 성취를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작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독특한 서사적 전달의 회로에 담아냄으로써 또 다른 하나의 의미를 겨냥한다. 『난장이』는 「뫼비우스의 띠」에서 시작되어 「에필로그」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 고등학교 수학교사의 수업시간을 다루고 있는 이 두 편이 난쟁이 가족과 영수 및 경훈의 이야기들을 감싸 안는 일종의 틀-이야기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이 작품집의 도입부가 되는 「뫼비우스의 띠」에서는 교사가 뫼비우스의 띠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구체화될 수 있는 입체의 가능성을 학생들에게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은 클라인씨의 병이 갖는 상징적 의미에 대한 영수의 인식과 직접적으로 연장된다는 의미에서 그 상관성은 아주 긴밀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뫼비우스의 띠」와 「에필로그」에서 반복적으로, 그러나 다소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꼽추와 앉은뱅이의 삽화를 그러한 수업의 진행과 어떻게 연관시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즉, 같은 시점(時點)에 서로 다른 공간에서 벌어진 행복동 사람들의 이야기와 경우가 수업을 받는 교육현장을 병치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며, 아니면 「뫼비우스의 띠」와 「에필로그」에서 반복되어 제시되는 꼽추와 앉은뱅이의 삽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수를 중심으로 전개된 위와 같은 저항의 각성과 저항의 이야기가 중간에서 일종의 내부 이야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가능성도 물론 존재한다. 난쟁이 가족의 이야기와 수학교사의 수업시간을 일종의 동시적 사건으로 간주할 경우라면, 그것은 영수의 발언에서 보는 것처럼 학교/사회의 전혀 이질적인 질서와 논리를 드러내는 구조로 읽힐 것이며, 그것은 그것대로 단일한 의미망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수업 장면에 포함된 꼽추와 앉은뱅이의 삽화가 영수네 가족에게 닥친 삶의 변화(그 시간적 경과)를 감안하면, 『난장이』는 넓은 의미에서의 액자 형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보다 타당하고, 또 그래야만 이 작품이 독자들에 대한 서사적 전달의 구조에 있어서의 특정한 목적론을 이야기할 수가 있게 된다.
참고문헌
김근호 - 현대소설 작가 비평의 문학교육적 실천 모형, 한국어교육학회, 2010
김형중 - 소설의 정의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 시론 현대문학이론학회, 2003
구인환 - 서사와 소설, 크리스챤서적·창조문예사, 2004
김효정 - 소설과 영화의 서술 양상 연구, 한국말글학회, 2010
박철석 - 한국 리얼리즘 소설 연구, 동아대학교, 1991
조보라미 - 소설에서 희곡으로의 각색 연구, 형설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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