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불교적 세계관
Ⅲ.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참전무사
Ⅳ.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조선정벌론
Ⅴ.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임진왜란
참고문헌
Ⅱ.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불교적 세계관
Ⅲ.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참전무사
Ⅳ.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조선정벌론
Ⅴ.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임진왜란
참고문헌
본문내용
대로주의”, “되는대로 주의”라고 하여 성격을 나타낸다. 어떠한 현실이든지 긍정되는 무비판적인 현실찬미가 불교적 사상기반 위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상계 전체가 영향을 받았고, 문학 예술도 영향이 나타난다.
한편 불교의 말세사상과 함께 12세기 후반부터 호넨(法然 : 1133-1212)에 의해 淨土敎가 나타났다. 專修 염불을 주장한 淨土敎는 천태종과 진언종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무사와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정토사상은 本覺思想과 결부되면서, 현실 그대로의 세계에 淨土를 설정한다. 本覺思想에 의하면 이 세상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이니까 그것과 별개로 淨土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정토로 이어지는 세계가 중세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일본 불교의 세계가 얼마나 민중의 삶과 유리되어 나타나는지를 잘 말해준다.
이후 淨土宗은 신란(親鸞 : 1173-1262)에 의해 淨土眞宗으로 분화되어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淨土眞宗은 오늘날까지 일본의 불교종파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한 종파가 되었다. 중세의 末法思想과 함께 일본 불교는 극도로 세속화되었는데, 淨土眞宗을 연 親鸞이 공공연하게 帶妻하였던 것도 이 때부터이다.
한편 중세의 무사문화에 크게 이바지 한 것이 禪宗이다. 禪은 불교가 백제로부터 일본에 전래될 때부터 있었지만, 13세기 초에 에이사이(榮西 : 1141-1215)의 臨濟宗과, 도겐(道元:1200-1253) 曺洞宗이 나타나 새로운 종파로 자리 잡았다. 일본 중세 후기에 임제종은 무사들의 지지에 힘입어, 五山을 중심으로 크게 성행하였으나, 불교적 교리는 귀족들의 한가한 유희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臨濟宗의 한가로운 취미적 활동은 시문에 대한 관심에서 잘 나타난다. 전란의 와중에서 ‘모노가타리 승려(物語僧)‘ 이나 ‘문학승(文學僧)’으로 불리는 승려들에 의해서 문학이 크게 일어났다. 불교의 본래적인 구도의 세계를 대체할 만큼의 무게를 문학이 떠맡은 것이다. 이들 승려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온 詩歌의 표현세계에 침잠하여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려 하였다. 와카(和歌)나 한시문을 통해서 현실을 표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꽃피운 고잔(五山) 문학은 당시 승려들이 문학에 얼마나 심취하였는지를 알게 해 준다.
임진왜란 전란 가운데서 승려들은 비전투요원으로 무장들을 보좌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 승려들은 전란에 참가하여 주군의 전승을 기원하고 죽은 자의 영혼을 서방정토로 안내하고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들 禪家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삶과 죽음의 차별 자체도 없는 것이기에 전장에서 죽고 사는 인간 현실에 대해서도 특별히 종교적 회의를 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그 때 그 때의 현실세계에서의 교감을 문학적 표현으로 나타내는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승려들이 뛰어 일어나 무도한 일본군의 침략에 몸으로 항거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豊臣秀吉은 승려들에게도 종군을 명령하였다. 이들 승려들은 평화시에는 일본 왕실을 둘러싼 귀족들과 와카(和歌) 모임을 가질 뿐 아니라, 고급 무사들로부터 문인의 자격으로 우대 받았다. 이들이 전쟁에 동원된 것은 무장들의 자문을 맡고, 문서를 작성하는 등 참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인과의 필담을 통한 의사소통에도 이들이 동원되었다.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편찬한 『豊臣秀吉譜』 1592년 3월조에,
(부하들이)大明, 조선과 서신왕래가 많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文才있는 사람을 데리고 가야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서신이 왔을 때 어찌 그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하고 진언하였다. 秀吉은 “大明 조선인이 그 문자를 포기하고 모두 우리나라의 ‘以呂波(いろは)’를 알게 하면 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 어찌 쓸데없이 학생(學生)을 데리고 가겠느냐”고 했다. 여러 부하들이 다시 품의를 하지 못했는데, 그 날 밤 豊臣秀吉이 고민하다가 쇼코쿠사(相國寺) 승려 쇼타이(承兌), 난젠사(南禪寺) 승려 레이산(靈三), 도후쿠사(東福寺) 승려 에이테츠(永哲)를 나고야(名護屋)에 수행하게 했다.
豊臣秀吉을 수행한 五山의 승려들은 豊臣秀吉을 따라 규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 진지에 머물렀고 일부는 조선에 건너오기도 했다. 일본군은 제 1군에서부터 제 9군까지 약 2만 명 단위로 나뉘어 조선을 침략하고 있는데, 각 군마다 종군승을 대동하여 조선과의 의사소통에 활용하고 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종자를 거느린 종군승들은 비전투요원으로서의 여유를 기반으로 시가를 읊어 감회를 나타낼 수 있었다. 당시 최고의 지식인 계층이었던 이들 승려들의 진중일기의 성격을 살피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문학의식의 단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Ⅲ.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참전무사
일본은 오랜 戰國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무사들이 양산되었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귀족의 아래에 있었으나, 무사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실질적인 지배층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었다. 이들은 직업 戰士로서 부하나 하인들은 거느리고 각지의 전투에서 참가하였고, 전과에 따라서 장래가 보장되었다. 전공을 세우게 되면 약탈한 토지나 재산 그리고 더 많은 인원을 배당받았다. 따라서 이들 무사들은 전투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공을 다투게 됨으로써 전장에서 직업 전사로서의 잔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전쟁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이들은 언제 적의 손에 죽게 될지 모르는 삶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전투에서의 기록은 자신들의 용맹을 후대에 전하고, 자손들의 번영을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었다. 加藤淸正의 軍記인 淸正高麗陣覺書 가운데서는 무사들의 전과 기록의 중요성을 이렇게 나타낸다.
각 부대가 인원 5백, 3백 명씩 淸正의 뒤를 따라가보게 하였는데, 이들이 늦게 가 강가에 와서 강에 빠져 반생반사하는 자를 끌어 올려, 한 사람이서 2명 3명씩의 목을 따고, 또한 장수의 목도 베고는 각자 강가에 목을 늘여놓고 있었다. 그 때 淸正이 유희츠(祐筆) 수십인을 골라서 감사장(感狀)을 적어주게 하였는데, 그 문장에 “그대는 이번에 개성 천변에서
한편 불교의 말세사상과 함께 12세기 후반부터 호넨(法然 : 1133-1212)에 의해 淨土敎가 나타났다. 專修 염불을 주장한 淨土敎는 천태종과 진언종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무사와 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정토사상은 本覺思想과 결부되면서, 현실 그대로의 세계에 淨土를 설정한다. 本覺思想에 의하면 이 세상은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이니까 그것과 별개로 淨土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정토로 이어지는 세계가 중세의 전쟁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일본 불교의 세계가 얼마나 민중의 삶과 유리되어 나타나는지를 잘 말해준다.
이후 淨土宗은 신란(親鸞 : 1173-1262)에 의해 淨土眞宗으로 분화되어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淨土眞宗은 오늘날까지 일본의 불교종파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확보한 종파가 되었다. 중세의 末法思想과 함께 일본 불교는 극도로 세속화되었는데, 淨土眞宗을 연 親鸞이 공공연하게 帶妻하였던 것도 이 때부터이다.
한편 중세의 무사문화에 크게 이바지 한 것이 禪宗이다. 禪은 불교가 백제로부터 일본에 전래될 때부터 있었지만, 13세기 초에 에이사이(榮西 : 1141-1215)의 臨濟宗과, 도겐(道元:1200-1253) 曺洞宗이 나타나 새로운 종파로 자리 잡았다. 일본 중세 후기에 임제종은 무사들의 지지에 힘입어, 五山을 중심으로 크게 성행하였으나, 불교적 교리는 귀족들의 한가한 유희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臨濟宗의 한가로운 취미적 활동은 시문에 대한 관심에서 잘 나타난다. 전란의 와중에서 ‘모노가타리 승려(物語僧)‘ 이나 ‘문학승(文學僧)’으로 불리는 승려들에 의해서 문학이 크게 일어났다. 불교의 본래적인 구도의 세계를 대체할 만큼의 무게를 문학이 떠맡은 것이다. 이들 승려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온 詩歌의 표현세계에 침잠하여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려 하였다. 와카(和歌)나 한시문을 통해서 현실을 표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꽃피운 고잔(五山) 문학은 당시 승려들이 문학에 얼마나 심취하였는지를 알게 해 준다.
임진왜란 전란 가운데서 승려들은 비전투요원으로 무장들을 보좌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 승려들은 전란에 참가하여 주군의 전승을 기원하고 죽은 자의 영혼을 서방정토로 안내하고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들 禪家의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삶과 죽음의 차별 자체도 없는 것이기에 전장에서 죽고 사는 인간 현실에 대해서도 특별히 종교적 회의를 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그 때 그 때의 현실세계에서의 교감을 문학적 표현으로 나타내는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승려들이 뛰어 일어나 무도한 일본군의 침략에 몸으로 항거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豊臣秀吉은 승려들에게도 종군을 명령하였다. 이들 승려들은 평화시에는 일본 왕실을 둘러싼 귀족들과 와카(和歌) 모임을 가질 뿐 아니라, 고급 무사들로부터 문인의 자격으로 우대 받았다. 이들이 전쟁에 동원된 것은 무장들의 자문을 맡고, 문서를 작성하는 등 참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인과의 필담을 통한 의사소통에도 이들이 동원되었다.
하야시 라잔(林羅山)이 편찬한 『豊臣秀吉譜』 1592년 3월조에,
(부하들이)大明, 조선과 서신왕래가 많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文才있는 사람을 데리고 가야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서신이 왔을 때 어찌 그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하고 진언하였다. 秀吉은 “大明 조선인이 그 문자를 포기하고 모두 우리나라의 ‘以呂波(いろは)’를 알게 하면 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 어찌 쓸데없이 학생(學生)을 데리고 가겠느냐”고 했다. 여러 부하들이 다시 품의를 하지 못했는데, 그 날 밤 豊臣秀吉이 고민하다가 쇼코쿠사(相國寺) 승려 쇼타이(承兌), 난젠사(南禪寺) 승려 레이산(靈三), 도후쿠사(東福寺) 승려 에이테츠(永哲)를 나고야(名護屋)에 수행하게 했다.
豊臣秀吉을 수행한 五山의 승려들은 豊臣秀吉을 따라 규슈(九州)의 나고야(名護屋) 진지에 머물렀고 일부는 조선에 건너오기도 했다. 일본군은 제 1군에서부터 제 9군까지 약 2만 명 단위로 나뉘어 조선을 침략하고 있는데, 각 군마다 종군승을 대동하여 조선과의 의사소통에 활용하고 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종자를 거느린 종군승들은 비전투요원으로서의 여유를 기반으로 시가를 읊어 감회를 나타낼 수 있었다. 당시 최고의 지식인 계층이었던 이들 승려들의 진중일기의 성격을 살피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문학의식의 단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Ⅲ. 일본군기문학(일본군기물)과 참전무사
일본은 오랜 戰國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무사들이 양산되었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귀족의 아래에 있었으나, 무사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실질적인 지배층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었다. 이들은 직업 戰士로서 부하나 하인들은 거느리고 각지의 전투에서 참가하였고, 전과에 따라서 장래가 보장되었다. 전공을 세우게 되면 약탈한 토지나 재산 그리고 더 많은 인원을 배당받았다. 따라서 이들 무사들은 전투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공을 다투게 됨으로써 전장에서 직업 전사로서의 잔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전쟁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이들은 언제 적의 손에 죽게 될지 모르는 삶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전투에서의 기록은 자신들의 용맹을 후대에 전하고, 자손들의 번영을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었다. 加藤淸正의 軍記인 淸正高麗陣覺書 가운데서는 무사들의 전과 기록의 중요성을 이렇게 나타낸다.
각 부대가 인원 5백, 3백 명씩 淸正의 뒤를 따라가보게 하였는데, 이들이 늦게 가 강가에 와서 강에 빠져 반생반사하는 자를 끌어 올려, 한 사람이서 2명 3명씩의 목을 따고, 또한 장수의 목도 베고는 각자 강가에 목을 늘여놓고 있었다. 그 때 淸正이 유희츠(祐筆) 수십인을 골라서 감사장(感狀)을 적어주게 하였는데, 그 문장에 “그대는 이번에 개성 천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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