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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기업, 정부기업관계, 한국기업, 전문경영자지배기업]일본기업과 정부기업관계, 일본기업과 한국기업, 일본기업과 벤처기업, 일본기업과 전문경영자지배기업, 일본기업과 기계공업, 일본기업과 자동차공업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일본기업과 정부기업관계

Ⅱ. 일본기업과 한국기업
1. 구조
2. 소유
3. 조직

Ⅲ. 일본기업과 벤처기업

Ⅳ. 일본기업과 전문경영자지배기업
1. 도우넨(東燃)
2. 소고
3. 미쯔이(三井) 부두

Ⅴ. 일본기업과 기계공업

Ⅵ. 일본기업과 자동차공업

참고문헌

본문내용

復興發展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1945년 9월에는 트럭의 생산이 허가되었지만 승용차는 1947년이 되서야 그것도 300대만 생산이 허가되었다. 1948년이 되면 앞서 언급한 復興計劃에 의해 復興金融金庫로부터의 융자로 各 社는 生産設備의 補修나 新設을 서둘러 합리화를 추진했지만, 이듬해 1949년에 실시된 도지라인에 의해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경영위기에 직면하여 각 사는 임금삭감은 물론 인원정리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친 스트라이크가 발생했다. 이러한 사태는 1950년 6월에 발발한 韓國戰爭에 의한 特需에 의해 해서되었다.
特需는 일본경제 전체에 特需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트럭을 중심으로 자동차에 대한 거액의 特需를 발생시켜, 각 사의 경영을 위기에서 탈출시켰다. 뿐만 아니라 特需에 의한 이익에 의해 합리화를 위한 설비투자자금의 마련을 가능케 했다. 한국전쟁 발발로부터 1년간 일본 국내에 발생된 特需物資는 2억 2200만 달러에 이르렀으며, 그 중 자동차는 98억 엔에 달했다. 이 가운데 特需에 의해 수주한 美軍用 차량대수는 도요타가 4,679대, 닛산이 4,325대, 이스즈가 1,276대에 달했으며, 그 밖에도 GHQ의 지령에 의해 창설된 警察豫備隊로부터 도요타가 950대, 닛산이 710대를 受注했다(大島山岡, 1987, p.112). 이러한 수주대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닌 것이 아니지만, 당시 국내 총생산대수에서 차지하는 특수차량의 점유비율은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마리크 소련 유엔대표가 한국전쟁에 대해 停戰交涉을 제안한 이후에는 특수발주액이 감소하기 시작하였다(上山, 1995, p.253). 이후 특수를 계기로 51년 9월, 통산성은 승용차생산의 국산화를 지향하여, 당시의 승용차메이커인 도요타, 닛산, 高速機關工業(나중의 오오타) 3사에 대하여 어떠한 保護育成策이 바람직한가를 자문하여, 메이커측의 答申을 들은 후 동년 10월에 소형승용차에 관한 보호육성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朝鮮特需가 종료한 후, 수요가 감소함과 동시에 臨時物資需給調整法의 폐지에 따라 일정한 외화한도내에서의 자동차수입이 가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7월에는 駐留軍人軍屬의 중고차 불하를 규제했던 규칙도 철폐되어, 국내에서의 외국차거래는 자유화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수그러져 있었던 自動車工業不要論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다(鈴木, 1995, p.296).
운수업자로 대표되는 수입촉진파는 통산성의 국산화방침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52년 7월에 개최된 參議院運輸委員會에서 국산파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그 결과 외국과의 기술격차를 인정하면서 국산화를 꾀해야 한다는 통산성은 外資에 관한 法律에 근거하여 52년 6월에 乘用車關係外資導入에 關한 基本方針을 결정하였다.
한편 통산성은 동년 10월 외국자동차메이커와의 기술제휴를 인정함으로써, 우수한 기술을 일본에 도입하여 전시중 트럭생산에 경사됨으로써 생겨난 乘用車技術의 空白을 메우고, 아울러 性能品質價格면에서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킴으로써 수출상품화하여 외화를 획득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한편 통산성은 동시에 기술도입에 의해 부품의 90%이상을 (기술제휴)계약체결한 뒤 5년 이내에 국산화할 것을 의무화한 방침을 내놓았다. 트럭이 중심이 되었던 메이커인 日野自動車, 이스즈자동차, 미쯔비시자동차는 물론 닛산자동차도 기술제휴를 실시했다. 각 사는 完全國産化를 달성하면서 부품의 국산화품질의 향상을 진전시켰다. 그러나 통산성은 국산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해외의 선진기술을 따라잡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 통산성의 重工業局 自動車車輛課長은 국산화완료에 대하여 국산화완료만으로 과연 일정 수준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通商産業省 重工業局 自動車車輛課監修, 1956, p.47). 외국과의 격차를 축소하기 위해서는 자동차기업 자신의 技術力이나 生産性의 向上은 물론 自動車關聯産業의 技術進步도 과제였다. 경제기획청이 발표한 經濟自立 5個年計劃에 기초하여 자동차수요의 신장 및 생산의 확대가격의 인하를 예측한 통산성은 자동차기업의 판매체제와 경영관리의 강화를 지시하는 한편 자동차관련산업의 기술향상을 과제로 지적했다. 특히 구미와 비교했을 때 자동차공업 중에서도 부품공업의 생산성격차는 자동차메이커보다 월등히 크다라는 인식하에 자동차부품공업이 정책대상이 되었다(앞의 책, p.27). 기타 프레스, 鑄鍛造 등 粗形工業, 자동차산업 설비투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工作機械工業, 그리고 特殊鋼, 高級鋼板 등의 관련산업도 육성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요인 등이 機械工業振興臨時措置法이 탄생한 배경이다.
타산업에 비해 외화획득율과 부가가치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고용흡수력도 높은 기계공업은 일본의 경제발전에 있어 중요한 산업부문이다. 그러나 안정된 민간수요가 뒷받침되어 기술이 고도화되고 체계화되면서 착실하게 성장해온 구미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메이지 초기 이래 造船, 鐵道車輛 등 국가의 요청에 기초하여 보호육성된 완성기계중심의 체제가 급속히 생성, 발전해왔기 때문에 기초부문이나 일반민수용의 산업기계는 충분히 발전할 수 없었다. 자동차산업의 국산화에 대해 합의가 형성되어 자동차기업에 대한 육성대책이 추진되었던 1952년에야 자동차부품공업의 합리화를 위한 자금원조가 본격화했다. 우선 1952년에 自動車部品工業等 生産施設合理化補助金제도가 실시되어, 부품기업에 대한 융자가 개시되었으며, 이어서 1953년과 1954년에는 設備近代化를 위한 資金融資가 1954년, 1955년에는 日本開發銀行의 融資斡旋 등의 措置가 실시되었다.
참고문헌
* 박경렬, 일본 벤처기업의 생성배경과 경영과제, 한국경영사학회, 1997
* 서영길, 일본기업의 한국기업에 대한 전략적 제휴의 유형선택 결정요인, 계명대학교, 2000
* 여인만, 20세기 일본기업의 조직과 지배구조,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11
* 조규철, 일본 고급공무원의 인사시스템과 정부기업 관계,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2005
* 한국기계산업진흥회, 일본 기계공업의 산업구조조정 동향과 전망, 2004
*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일본의 자동차공업,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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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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