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의_생애와_사상(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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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키에르케고르의_생애와_사상(발표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
1) 사상적 배경
2) 세계에서의 인간의 위치
3) 인간의 본성
4) 인간과 사회
5) 현대적 의의

본문내용

[인간론]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
1.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
1) 사상적 배경
2) 세계에서의 인간의 위치
3) 인간의 본성
4) 인간과 사회
5) 현대적 의의
과 목 명:
학 과:
학 번:
이 름:
담당교수:
키에르케고르의 생애와 사상
- 대지진(大地震)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는 1813년에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부친 미카엘 키에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와 그의 두 번재 부인 안네(Anne) 사이에서 칠 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미카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유복한 모직물 상인이었다. 그가 원래는 황량한 윳트란드(Jutland)에서 가난한 소작인으로서 양을 치고 있었으나 그가 21세가 되었을 때 그 곳을 떠나 그의 삼촌이 살고 있었던 코펜하겐으로 이주하여 한 동안 삼촌의 모직물상에서 일을 돕다가 결국 부유한 모직물 도매상인으로 자수성가하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가 아홉 살이 되기 전에 그의 한 형과 한 누나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다른 두 누나들과 다른 한 형, 그리고 그의 모친도 그가 21세가 되기 전에 불과 2년 반 사이에 다 사망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자신도 35세가 되기 전에 요절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42세가 되어서야 사망했다.
키에르케고르가, 거의 농노에 가까운 신분에서 부유한 상인이 된 그의 부친으로부터 받은 신앙적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의 내성적이며 우울한 성격과 더불어 탁월한 사교력과 풍부한 상상력 및 표현력 역시 그의 부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성품과 재질이었다. 부친 미카엘은 그의 아들을 어려서부터 신앙적으로 대단히 엄격하게 교육했다. 이 점에 대해서와 그의 부친의 성벽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 자신이 그의 일기장 도처에서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그의 일기장에 스스로 ‘대지진’이라 부르는 사건이 있는데 그의 전기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부친이 1838년에 82세의 고령으로 사망하기 얼마 전에 그에게 자신의 소년 시절에 있었던 한 끔직한 사건에 대해서 고백하여 키에르케고르가 겪게 되었던 마음의 충격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그의 부친이 11살의 소년으로 윳트란드 황무지에서 양을 치고 있었던 어느 날 극심한 가난과 외로움으로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처절한 신세 때문에 한 언덕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신을 저주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외적으로 유복한 삶도 신이 그에게 내릴 벌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친의 고백을 전해들은 키에르케고르 자신도 그의 형들과 누나들의 요절과 모친의 사망이 다 그의 부친의 죄에 대한 대가로 내리는 신의 형벌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키에르케고르 자신도 요절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코펜하겐 대학 신학부에 입학해서 목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키에르케고르는 이후 부친에 대해 깊은 환멸감을 느끼게 되어 점차적으로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독자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 후 삼년 간 그는 그의 부친과 기독교에 대한 반항심에서 수업을 중단하고 한 부유한 청년으로 다른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파티 장과 다른 곳으로 쏘다니며 외적으로는 매우 활달하고 명랑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내적으로는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깊은 고독감과 절망 속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살아가야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 일에도 미온적이지 않았던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앓고 있었던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진정 심각한 양자 택일의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사한 경우에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하듯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짧게나마 한 동안 그렇게 했듯이 세상으로 나가서 유흥과 도락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문제투성이의 자신을 잊고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절체 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현실적인 자신과 현재상황을 똑바로 직시하는 가운데 모든 문제들을 신 앞에 내어놓고 그의 은총으로 해결함을 받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이 두 가능성 가운데 그는 후자를 택했다. 개인이 신 앞에 바로 서게 될 때 죄의 문제와 여타 문제들이 해결되어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진정한 자신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그가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키에르케고르 인생 전체를 바꿔 놓았으며 첫눈에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가게 된 레기네 올슨과의 관계로 파혼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의 파혼의 동기에 대한 해석도 구구하나 그 주원인 역시 자신의 부친의 끔찍한 과거사가 그에게 가져다준 심적·정신적 부담감에서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자신의 부친의 죄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의 가족 전체에 신의 형벌이 과거에도 내렸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와 같이 저주받았을 뿐 아니라 천성적으로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었던 자기 자신과 자기의 가족에게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자기 자신보다 “더 존경했던”한 여인, 게다가 한 명망이 높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발랄하기 그지 없는 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함께 고통을 받게 할 수는 결코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파혼이후 그는 저술 활동에 전념하고 몇 년간의 단기간 내에 상술한 수많은 저서들을 익명 또는 본명으로 펴냈다. 그러던 중 당시 악명 높은 풍자 주간지, ‘코르사르’와 일대 사상적인 충돌을 그가 빚게 되었다. 이 주간지와 분쟁이 일어남으로 인해 ‘코르사르’는 매호에 온갖 독필과 케리커쳐로 그를 조롱하며 풍자했으며 이상한 걸음 거리로 거리를 절뚝거리며 지나다니는 코펜하겐의 소크라테스로 풍자했다. 그 결과 1846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그는 완전히 대중들의 조롱거리로 화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 이상자로 취급했으며 짓궂은 아이들이 거리에서 그를 따라다니며 놀려대기까지 했다. 이후 그 당시 기성 덴마크 국교 신학자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비난하는 내용의 글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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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3
  • 저작시기2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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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64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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