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합군]국제연합군(유엔군, 유엔에프)의 인천상륙작전, 한미연합군의 독수리작전, 한미연합군의 북한붕괴 작전계획5030(작계5030), 한국군과 영국군의 대일군사작전, 제주43사건(제주43항쟁) 진압작전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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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제연합군]국제연합군(유엔군, 유엔에프)의 인천상륙작전, 한미연합군의 독수리작전, 한미연합군의 북한붕괴 작전계획5030(작계5030), 한국군과 영국군의 대일군사작전, 제주43사건(제주43항쟁) 진압작전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국제연합군(유엔군, 유엔에프)의 인천상륙작전

Ⅱ. 한미연합군의 독수리작전

Ⅲ. 한미연합군의 북한붕괴 작전계획5030(작계5030)
1. 한-미 연합군의 작전계획의 역사: 수복에서 점령으로, 방어에서 선제공격으로
2. 북한의 정권교체를 위한 총성 없는 전쟁계획, 작계 5030
3. 정전 50년, 정전체제의 위기를 한반도 평화의 시작으로

Ⅳ. 한국군과 영국군의 대일군사작전

Ⅴ. 제주43사건(제주43항쟁) 진압작전

참고문헌

본문내용

공작대가 임팔전선에 투입된 것은 1944년 초였다. 1월 7일 문응국김상준나동규는 ‘부야크’에서 영국군 제201부대와 함께 임팔전선으로 출발하였고, 제204부대에 배속된 박영진과 김성호는 ‘아라컨’을 거쳐 3월 7일 임팔전선으로 이동하였으며, 대장 韓志成도 이곳에 도착하였다. 이후 이들은 ‘임팔’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영국군의 대일작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이 ‘임팔’에 도착한 직후, 영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대접전이 벌어졌다. 1944년 3월 말 일본군이 ‘천두이江’을 건너 임팔지역을 공격해 오면서, ‘임팔’을 중심으로 영국군과 일본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광복군 공작대는 이 임팔전투를 비롯하여 ‘띠마플’‘티딤’‘비센플’ 등 각지에서 전개된 전투에 참여하고 활동하였다.
광복군 공작대의 주요한 임무와 활동은 對敵宣傳工作이었다. 이러한 활동에 대해 韓志成은 “우리 공작대는 전투할 수 있도록 무장하고 적과 가장 가까운 진지에서 적을 향하여 일어방송을 하였고, 선전문을 제작하여 산포하였으며, 문건을 번역하였으며, 포로도 심문하였다”라 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군과 접전하고 있는 최전선에 투입되어, 주로 일본군을 향한 對敵放送敵文書 번역전단제작포로심문 등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일종의 心理戰으로 직접적인 전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었고, 영국군 보다도 광복군 공작대원들이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광복군 공작대원들은 모두 일본어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들의 활동은 일본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대적선전활동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의 탈출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3월말에 다무과딜 공로에 나아가서 제가 적에게 방송한 결과 적이 백기를 흔들며 나왔습니다. 이것이 인도에 처음 있는 현상이라고 합니다”라는 것이나, 일본군 통역으로 근무하고 있던 金龜洛이 탈출해 온 경우 등이 그러한 영향을 말해준다.
또한 敵情報의 분석과 적의 無線電信을 통해 일본군의 동태나 작전계획을 사전에 알아냄으로써, 영국군이 대일작전을 수행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영국군이 크게 패했던 ‘만달레이(Mandalay)’전투에서 영국군을 일본군의 포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1944년 5월 영국군 제17사단이 버마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만달레이’로 南下하던 중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포위되고 말았다. 영국군이 악전고투를 하고 있을 때, 문응국 등이 敵文書와 포로심문을 통해 일본군의 동태를 정확하게 분석 제보하였고, 이에 의해 영국군이 적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광복군 공작대원들의 이러한 활동은 영국군의 대일작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고, 영국군을 비롯하여 중국측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영국군 사단장 ○○씨는 친히 우리에게 찾아와서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는 것에서, 이들의 활동과 역할이 영국군에게 준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대표적인 신문인《大公報》에서도 이들의 활동을 소개하였다. 1944년 6월 22일 임시정부 군무부장 金元鳳과의 인터뷰를 통해 “영국군이 포위를 당했을 때 口舌之功으로 적을 격퇴하였고, 敵情에 대한 정확한 판단으로 영국군의 칭송을 받고 있다”고 이들의 활동을 보도한 것이다.
광복군 공작대원들의 활약이 양호한 성과를 거두자, 영국군에서는 광복군측에 더 많은 인원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동남아시아 최고사령관 ‘몬트비튼’경은 수차 인원의 증파를 요구하였으나, 종종 원인으로 인하여 증파되지 못하게 되었던바 작년 12월 경에 그 부대의 대장 한지성동지가 중경으로 돌아와서 우리 정부 당국과 상토하여”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영국군측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인원의 증파를 요구하였고, 이것이 실현되지 않자 1944년 12월 대장 韓志成을 직접 중경에 보내 교섭한 것이다.
임시정부에서는 영국군의 요청대로 인원을 증파하려고 했던 것 같다. 1945년 3월 28일자로 중국정부에 보낸 공문 중에 金九 主席 명의로 인도에 파견할 趙志英을 비롯한 9명에 대한 여권발급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요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이들의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대원의 교체는 있었다. 1944년말 나동규가 중경으로 복귀하고, 1945년 3월에 총사령부 소속의 安原生이 추가로 파견된 것이다.
광복군 공작대원들은 임팔전선에 이어 버마 탈환작전에도 참여하였다. 임팔지역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킨 영국군은 1945년에 들어와 버마로 퇴각한 일본군에 대해 총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새로이 파견된 안원생은 사령부에 배속되었고, 한지성박영진김성호는 버마 중북부에서 만달레이를 향해 南進하는 부대에, 최봉진김상준이영수는 버마 중북부지역을 우회하여 만달레이를 향해 북상하는 부대에, 그리고 문응국과 송철은 버마의 수도 랑군상륙작전에 참전한 것이다. 일본군을 버마에서 몰아내기 위한 버마탈환작전은 연합군에 의한 대규모 작전으로 전개되었다. 이 작전에는 영국군과 인도군을 비롯하여 중국군과 미국군이 동원되었고, 1945년 5월 수도 랑군을 탈환하고, 7월에는 일본군을 완전히 패퇴시켰다.
버마탈환작전이 완료된 후, 광복군 공작대는 인도 캘커타로 철수하였다. 이곳에서 새로운 작전의 참가를 위해 대기하던 중 일제의 무조건 항복이 있게 되었고, 이들은 1945년 9월 10일 전원이 중경의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이로써 광복군은 1943년 8월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까지 만 2년 동안 인도 버마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對日戰爭을 수행한 것이다.
이와 같이 광복군은 9명의 공작대원을 인도 버마전선에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공동작전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의 이러한 활동은 인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도 버마전선에서 전개한 광복군 활동의 의의를 공작대 대장 韓志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지상으로 선젼선젼문 천만장을 산발한다 하여도 엇던 영국의 군단장사장수만 수십만 사람이 조션을 인식하며「조션」이라는 말이나 하겟소! 그러나 지금 단 六인의 힘이라도 젼션에서 그들을 구하며 그들을 원조하는 그 과정, 그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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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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