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부대 의거(봉오동전투), 백야 김좌진장군 의거(청산리대첩), 도마 안중근의사 의거(이토히로부미살해), 매헌 윤봉길의사 의거(루쉰공원사건), 이봉창의사 의거(사쿠라다문사건), 한국 근현대사 의거(4월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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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군부대 의거(봉오동전투), 백야 김좌진장군 의거(청산리대첩), 도마 안중근의사 의거(이토히로부미살해), 매헌 윤봉길의사 의거(루쉰공원사건), 이봉창의사 의거(사쿠라다문사건), 한국 근현대사 의거(4월혁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독립군부대의 의거(봉오동전투)

Ⅲ. 백야 김좌진장군의 의거(청산리대첩)
1. 청산리대첩
2. 청산리대첩의 결과 및 의의

Ⅳ. 도마 안중근의사의 의거(이토히로부미살해)

Ⅴ. 매헌 윤봉길의사의 의거(훙커우공원사건, 루쉰공원사건, 홍구공원사건)

Ⅵ. 이봉창의사(열사)의 의거(사쿠라다문사건)

Ⅶ. 한국 근현대사(근대사)의 의거(4월혁명)
1. 2․28 데모
2. 3․15 마산선거
3. 마산 2차 의거
4. 4․18 고려대 데모 등 대학가의 항거
5. 피의 화요일
6. 교수단 데모
7. 민권승리의 날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양전쟁으로 나아갔고 급기야 1945년 패전을 맞았으니, 일본의 대륙 침략전쟁과 그 정책이 종말을 맞게된 것이다.
Ⅶ. 한국 근현대사(근대사)의 의거(4월혁명)
지금까지 4월혁명하면 419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4월 혁명은 61년 5월 16일 군사쿠테타로 좌절되기까지 파악하는 것이 혁명을 총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기는 228 부정선거 항의시위에서 4월 26일 이승만 하야에 이르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1단계, 이승만 하야로부터 729총선에서 혁명주도세력의 패배로 이어지는 2단계, 그리고 729총선에서 516군사쿠데타로 미완의 혁명으로 종결되는 3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흔히 4월 혁명이라 얘기하는 1단계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1. 228 데모
민주당 장면부총리후보의 유세를 방해할 목적으로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오라는 것에 반발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들의 구호는 학원과 학생을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며,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시위로 이어졌다.
2. 315 마산선거
3월 15일 선거일은 ‘4할 사전 투표’, ‘3인조 9인조 공개투표’, ‘자유당 후보 득표 85% 이상 확보’등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이에 격분해서 일어선 것이 마산의 학생들과 시민들이었다. 비조직적이고 자연발생적이었던 이날 이곳의 시위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마산의 중심가를 누비며 부정선거를 규탄했으며, 이에 맞선 이승만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강력하게 대응하는 한편, 시위대의 배후에는 북한괴뢰도당이 있다는 삐라를 뿌려 시위에 대한 민중들의 호응을 낮추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그러나 부정선거반대는 언론계, 학계, 법조계로 확대되었고, 학생들의 동조시위가 확산되었으니, 3월 15일 부정선거에 반대하여 마산에서 일어났던 시위를 제1차 마산봉기라고 부른다.
3. 마산 2차 의거
부정선거 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한 주검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다. 마산상고생 김주열군이 었다. 제1차 마산봉기때 시위에 가담했다가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 주위에 박혀 사망한 것을 경찰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 했다가 뒤늦게 떠오른 것이었다. 또다시 마산시민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살인경관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며, 이것을 제2차 마산봉기라고 부른다. 이제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규탄이 아닌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격상되었다.
4. 418 고려대 데모 등 대학가의 항거
평화적 시위를 하던 고려대생들에게 당시 판을 치던 정치깡패들이 린치를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려대 데모피습사건은 419를 폭발시킨 마지막 뇌관이었다.
5. 피의 화요일
4월 19일 대학생들은 고대생 습격사건을 계기로 총궐기하였으며, 이에 다급해진 이승만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하여, 이날 하루 전국에서 183명이 총탄에 쓰러져갔고, 6,0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무차별 발포 등의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민중의 투쟁은 계속 이어졌고, 심지어 국민학생들까지도 시위에 나서는 상황이 되자, 이승만의 퇴진은 기정사실이 되어갔다.
6. 교수단 데모
4월 25일 최고의 지성인이며 시대의 양심이라는 대학교수들조차 사전 미국의 양해를 얻어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7. 민권승리의 날
결국 4월 26일 이승만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로서 12년간의 독재의 막은 내려졌다.
Ⅷ. 결론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100여년은 굽이굽이 상흔으로 얼룩져 있다. 20세기 전반 일제식민통치를 겪으면서 무수한 선열들이 목숨을 바쳤고, 해방후 국토분단과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그리고 다시 계속된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해 왔다. 오늘날의 부강한 민주국가는 이러한 호국유공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 이래 남북관계를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최근에 급속하게 바뀌어가고 있다.(이영균, 2002: 48) 한편으로는 남북화해분위기에 따라 금강산관광, 개성공단개발 및 이산가족상봉 등 남북관계가 바야흐로 본격적 해빙무드를 맞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핵문제와 대테러전쟁 등으로 인해 그 어느 때 보다도 국가안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김진욱, 2003) 특히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악의 축’ 발언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대북한 강경정책은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 추방,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라는 극약 처방과 벼랑끝 전술로 이어지고 있으며, 최근에 와서야 6자회담의 개최로 인해 어느 정도 평화적 해결의 돌파구가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사회전반에 걸쳐 국가안보문제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인식이 그만큼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앞으로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될 대학생들이 국가안보 및 호국보훈에 대해 어떠한 의식을 갖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항일독립운동, 625전쟁, 군사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등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과 희생 위에 오늘날과 같은 발전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따라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이들과 그 가족들의 삶의 질을 고양시키고 나아가 이들을 기리고 나라사랑정신을 일깨우는 보훈제도는 대한민국의 체제존속과 발전을 위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김용달, 한국독립운동과 청산리대첩,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2005
◎ 김기승, 4월 혁명과 한국의 민족주의,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0
◎ 윤병석,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의 역사적 의의, 인하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09
◎ 장세윤,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전투,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1993
◎ 한시준,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문화체육관광부, 2009
◎ 한시준, 이봉창 의사의 일왕저격의거, 한국역사연구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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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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