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스페인공화국
Ⅱ. 베트남공화국
1. 프랑스․미국의 지배이데올로기
2. 남부지역 민족주의세력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
Ⅲ.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Ⅳ. 바이마르공화국(독일)
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Ⅵ. 중화인민공화국(중국)
Ⅶ. 도미니카공화국
1.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2. 오사마요새
3. 프리마다 데 아메리카 대성당
4. 산토도밍고국립동물원
5. 국립식물원
참고문헌
Ⅱ. 베트남공화국
1. 프랑스․미국의 지배이데올로기
2. 남부지역 민족주의세력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
Ⅲ.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Ⅳ. 바이마르공화국(독일)
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Ⅵ. 중화인민공화국(중국)
Ⅶ. 도미니카공화국
1.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2. 오사마요새
3. 프리마다 데 아메리카 대성당
4. 산토도밍고국립동물원
5. 국립식물원
참고문헌
본문내용
스페인 전역에 배포되는 일간지와 잡지를 통해 “자본에 대한 신뢰를 촉구하고 국가 경제의 재건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확실한 조치로서 확고부동한 권위의 승인과 공공질서의 유지 그리고 소유권의 존중” 등이 실현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농장소유주협회(APFR)는 “반혁명을 위해 싸우거나 농촌 소유의 합법적인 이해를 변호해주는 정치 집단 혹은 후보자들에게 도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재정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한편, 칼보 소텔로가 이끄는 정당은 왕당파와 전통파를 규합하여 국민블록(Bloque Nacional)을 형성했다. 국민블록은 1935년 12월 25일의 한 성명서를 통해 “광범한 반혁명 전선 구성”을 촉구했다. 또한 CEDA에게 앞서 언급한 대로 새 의회의 제헌적인 성격 천명과 알칼라 사모라의 퇴위 등을 골자로 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한 바 있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이끄는 팔랑헤당은 1935년 11월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2차 전국회의를 통해 인민전선에 대항해 싸울 전 우익의 국민전선(Frente Nacional) 결성을 논의하고 그 국민전선에 참여하기로 결의를 했다. 하지만 팔랑헤당이 선거 수행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 우익은 팔랑헤당을 참여시키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팔랑헤당의 가세가 다수의 보수주의자들마저 경악케 할 것이라 내다봤다.
이 선거전에서 귀추가 주목이 된 것은 무정부적 생디칼리스트들의 태도였다. 이들은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표에 기권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좌익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면을 약속하고 있는 인민전선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요인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무정부조합주의자들의 조직인 전국노동연합(CNT)에는 두 갈래의 흐름, 곧 포로들과 연대한다는 차원에서 투표에 동참해야 한다는 무리와 계속하여 기권을 주장하는 무리가 있었다. CNT는 1936년 1월 25일의 바르셀로나 대회와 1월 29일의 마드리드 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는 선거에 기권을 하기로 하되 선전 활동은 계속 수행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방침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 지도자들 일부는 선거를 며칠 앞두고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지도자들 대부분이 비록 투표에 기권을 하기는 했지만 조합원 대중은 투표장으로 향했고 그 결과 인민전선 후보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있었다.
선거를 주재한 수상이자 내무장관인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 따르면 투표는 시종 질서정연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스페인 역사가 하비에르 투셀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1936년 2월의 1차 선거에 유권자 13,553,710명 가운데 9,864,783명이 투표를 하여 72.8%의 투표율을 보였다. 이들 표 가운데 4,654,116표가 좌익을 지지했고 4,503,505표가 우익을 지지했다. 이는 두 진영간의 표 차이가 유권자의 1% 정도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지만 선거법 규정에 따라 인민전선 측은 271석을 차지할 수 있게 됐고 우익 진영은 142석을, 중도파는 39석을 차지하게 됐다. 이러한 결과는 중도파의 세력 규합이 실패로 돌아간 점과 우익 진영이 전국적인 선거연합을 만들어내지 못한 반면에 인민전선의 경우 인민전선 협정을 통해 대동 연합을 꾀할 수 있었다는 점, 무정부주의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는 점 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민전선의 승리가 드러나자 포르텔라 바야다레스 내각이 물러나고 2월 19일 마누엘 아싸냐를 수반으로 하는, 주로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공화파 정부가 들어섰다.
Ⅱ. 베트남공화국
1. 프랑스미국의 지배이데올로기
12차 인도차이나전쟁의 1차적인 책임은 구식민지배국인 프랑스와 냉전에 입각하여 베트남에 개입한 미국에 있었다. 프랑스와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냉전에 입각한 체제방위전쟁으로 치환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으며, 이는 다음과 같은 세 차례의 변화과정을 보인다.
첫째, 프랑스의 식민주의전쟁(1945년 9월~1948년)
둘째, 식민주의와 냉전이데올로기의 접합(1949년~1954년 7월 제네바협정)
셋째, 미국의 직접개입과 냉전에 입각한 도미노론의 적용(1954년 7월 이후)
첫째,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로의 복귀를 전혀 의심치 않았고, 심지어 식민주의가 아시아인에게 있었던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믿었다. 프랑스는 만일 베트남 전체를 지배할 수 없다면 남부 코친차이나만이라도 계속 프랑스령의 식민지로 유지하고자 했고, 이는 ‘남부 분리지배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와 ‘남부분할지배전략’을 통해 나타난다.
둘째, 프랑스는 식민주의전쟁을 냉전이데올로기와 접합함으로써 대내외적인 정당성을 획득하려 하였다. 이러한 전쟁성격의 전환은 1947년 트루먼독트린과 마샬플랜을 통해 드러나는 냉전체제의 심화에 의한 것이다. 1949년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와 미국의 냉전정책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미국은 이 시기를 통해 인도차이나를 본격적으로 냉전적 가치에 의해 평가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는 반공을 통해 식민주의전쟁의 성격을 은폐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의지는 프랑스의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해진 1954년에 접어들면서 적극적으로 표명되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Eisenhower) 행정부는 베트남에 도미노이론을 적용하여 개입했으며, 이것은 남부에 독립된 정부를 유지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엠정권의 탄생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분리된 또 하나의 국가를 수립하려 했던 프랑스미국 개입주의의 최종적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남베트남의 국가는 국가형성의 기반을 철저히 외부에 의존한 국가였으며, 이러한 한계는 지엠에 의해 창출될 남베트남정부의 기본적인 성격을 규정하였다.
2. 남부지역 민족주의세력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
1954년 제네바협정 당시의 이데올로기지형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좌파의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이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을 때,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핵으로 하고 비
한편, 칼보 소텔로가 이끄는 정당은 왕당파와 전통파를 규합하여 국민블록(Bloque Nacional)을 형성했다. 국민블록은 1935년 12월 25일의 한 성명서를 통해 “광범한 반혁명 전선 구성”을 촉구했다. 또한 CEDA에게 앞서 언급한 대로 새 의회의 제헌적인 성격 천명과 알칼라 사모라의 퇴위 등을 골자로 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한 바 있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이끄는 팔랑헤당은 1935년 11월 마드리드에서 열린 제2차 전국회의를 통해 인민전선에 대항해 싸울 전 우익의 국민전선(Frente Nacional) 결성을 논의하고 그 국민전선에 참여하기로 결의를 했다. 하지만 팔랑헤당이 선거 수행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점을 고려한 우익은 팔랑헤당을 참여시키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팔랑헤당의 가세가 다수의 보수주의자들마저 경악케 할 것이라 내다봤다.
이 선거전에서 귀추가 주목이 된 것은 무정부적 생디칼리스트들의 태도였다. 이들은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표에 기권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좌익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면을 약속하고 있는 인민전선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요인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무정부조합주의자들의 조직인 전국노동연합(CNT)에는 두 갈래의 흐름, 곧 포로들과 연대한다는 차원에서 투표에 동참해야 한다는 무리와 계속하여 기권을 주장하는 무리가 있었다. CNT는 1936년 1월 25일의 바르셀로나 대회와 1월 29일의 마드리드 대회를 통해 공식적으로는 선거에 기권을 하기로 하되 선전 활동은 계속 수행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방침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 지도자들 일부는 선거를 며칠 앞두고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지도자들 대부분이 비록 투표에 기권을 하기는 했지만 조합원 대중은 투표장으로 향했고 그 결과 인민전선 후보자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있었다.
선거를 주재한 수상이자 내무장관인 포르텔라 바야다레스에 따르면 투표는 시종 질서정연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스페인 역사가 하비에르 투셀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1936년 2월의 1차 선거에 유권자 13,553,710명 가운데 9,864,783명이 투표를 하여 72.8%의 투표율을 보였다. 이들 표 가운데 4,654,116표가 좌익을 지지했고 4,503,505표가 우익을 지지했다. 이는 두 진영간의 표 차이가 유권자의 1% 정도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지만 선거법 규정에 따라 인민전선 측은 271석을 차지할 수 있게 됐고 우익 진영은 142석을, 중도파는 39석을 차지하게 됐다. 이러한 결과는 중도파의 세력 규합이 실패로 돌아간 점과 우익 진영이 전국적인 선거연합을 만들어내지 못한 반면에 인민전선의 경우 인민전선 협정을 통해 대동 연합을 꾀할 수 있었다는 점, 무정부주의자들이 투표에 참여했다는 점 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인민전선의 승리가 드러나자 포르텔라 바야다레스 내각이 물러나고 2월 19일 마누엘 아싸냐를 수반으로 하는, 주로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공화파 정부가 들어섰다.
Ⅱ. 베트남공화국
1. 프랑스미국의 지배이데올로기
12차 인도차이나전쟁의 1차적인 책임은 구식민지배국인 프랑스와 냉전에 입각하여 베트남에 개입한 미국에 있었다. 프랑스와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냉전에 입각한 체제방위전쟁으로 치환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으며, 이는 다음과 같은 세 차례의 변화과정을 보인다.
첫째, 프랑스의 식민주의전쟁(1945년 9월~1948년)
둘째, 식민주의와 냉전이데올로기의 접합(1949년~1954년 7월 제네바협정)
셋째, 미국의 직접개입과 냉전에 입각한 도미노론의 적용(1954년 7월 이후)
첫째,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로의 복귀를 전혀 의심치 않았고, 심지어 식민주의가 아시아인에게 있었던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믿었다. 프랑스는 만일 베트남 전체를 지배할 수 없다면 남부 코친차이나만이라도 계속 프랑스령의 식민지로 유지하고자 했고, 이는 ‘남부 분리지배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와 ‘남부분할지배전략’을 통해 나타난다.
둘째, 프랑스는 식민주의전쟁을 냉전이데올로기와 접합함으로써 대내외적인 정당성을 획득하려 하였다. 이러한 전쟁성격의 전환은 1947년 트루먼독트린과 마샬플랜을 통해 드러나는 냉전체제의 심화에 의한 것이다. 1949년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와 미국의 냉전정책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미국은 이 시기를 통해 인도차이나를 본격적으로 냉전적 가치에 의해 평가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는 반공을 통해 식민주의전쟁의 성격을 은폐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의지는 프랑스의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해진 1954년에 접어들면서 적극적으로 표명되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Eisenhower) 행정부는 베트남에 도미노이론을 적용하여 개입했으며, 이것은 남부에 독립된 정부를 유지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엠정권의 탄생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분리된 또 하나의 국가를 수립하려 했던 프랑스미국 개입주의의 최종적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남베트남의 국가는 국가형성의 기반을 철저히 외부에 의존한 국가였으며, 이러한 한계는 지엠에 의해 창출될 남베트남정부의 기본적인 성격을 규정하였다.
2. 남부지역 민족주의세력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
1954년 제네바협정 당시의 이데올로기지형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좌파의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이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을 때,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핵으로 하고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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