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패션브랜드 루이비통(루이뷔통, Louis Vuitton)
Ⅱ. 패션브랜드 샤넬(Chanel)
1. CHANEL F/W COLLECTION
2. 샤넬의 명언
Ⅲ. 패션브랜드 빈폴(Bean pole)
1. 개요
2. 브랜드 의미와 컨셉
3. SWOT분석
1) 내적분석
2) 외적분석
Ⅳ. 패션브랜드 나이키(Nike)
1. 핵심 역랑에의 집중으로 부가가치 극대화
2. 글로벌화를 통한 제2의 성장
Ⅴ. 패션브랜드 리바이스(Levi's)
Ⅵ. 패션브랜드 베네통(Benetton)
Ⅶ. 패션브랜드 구찌(Gucci)
Ⅷ. 패션브랜드 스와치(Swatch)
1. 유명 의류 브랜드와의 합작
2. 스와치 컬렉션 부스 설치
3. 각 종 입학선물 프로모션
4. ‘swatch' 콜렉션 버스
5. 고객들의 메일로 전자 카탈로그 전송
6. ‘swatch' 디자인 공모
7. ‘swatch'모델과의 데이트
8. ‘swatch' 황당 퍼포먼스
참고문헌
Ⅱ. 패션브랜드 샤넬(Chanel)
1. CHANEL F/W COLLECTION
2. 샤넬의 명언
Ⅲ. 패션브랜드 빈폴(Bean pole)
1. 개요
2. 브랜드 의미와 컨셉
3. SWOT분석
1) 내적분석
2) 외적분석
Ⅳ. 패션브랜드 나이키(Nike)
1. 핵심 역랑에의 집중으로 부가가치 극대화
2. 글로벌화를 통한 제2의 성장
Ⅴ. 패션브랜드 리바이스(Levi's)
Ⅵ. 패션브랜드 베네통(Benetton)
Ⅶ. 패션브랜드 구찌(Gucci)
Ⅷ. 패션브랜드 스와치(Swatch)
1. 유명 의류 브랜드와의 합작
2. 스와치 컬렉션 부스 설치
3. 각 종 입학선물 프로모션
4. ‘swatch' 콜렉션 버스
5. 고객들의 메일로 전자 카탈로그 전송
6. ‘swatch' 디자인 공모
7. ‘swatch'모델과의 데이트
8. ‘swatch' 황당 퍼포먼스
참고문헌
본문내용
로 전락했다.
리바이스는 핵심고객층, 베이비부머가 늙어가고 있음을 몰랐다. 또 곱게 자란 양가집 자녀 출신 수재로서 현 회장은 너무나 고지식하게 교수들과 컨설턴트들이 얘기하는 교과서 경영에 매달렸다. 리엔지니어링이 모든 것인 양 얘기되던 90년대 중반, 수년에 걸친 혁명적 조직재구축을 하며 회사기를 거의 다 빼 버렸다. 직원들의 애사심은 무력감과 냉소주의로 변했고 제품에선 쉰내가 풀풀나게 됐다. 7%의 십대들이 \"쿨(cool)\"하다고 평가했던 리바이스 청바지는 몇 년 후 십대 머릿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기업회생 여부와 상관없이 젊은이들 마음속에선 이미 죽었다. 리바이스의 몰락은 마치 올들어 급진전되고 있는 총체적 물갈이를 만방에 고하는 듯하다. 쉰세대, 종신고용, 백화점, 공중파TV, 이미지마케팅, 기득권 세력들에게 모두 장송곡을 틀어주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시장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고객들의 마인드를 읽지 못하면, 현재의 고객이 나이가 들어가고 성향이 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다면, 어느 기업이든 반드시 어느 날 갑자기 소비자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되고, 결국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당하게 된다. 리바이스 청바지의 사례가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Ⅵ. 패션브랜드 베네통(Benetton)
○ 중규모 기업이 세계의 리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제품의 제조과정이 각종 판매과정 혹은 그 양자의 혁신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베네통의 경우 가장 중요한 혁신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스웨터를 제조하는 아이디어였다. 1950년대 중반 이탈리아는 스웨터가 시중에 그다지 많이 나와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에의 수요를 기대하고 시작을 했다. 마침 젊은 세대가 케쥬얼웨어를 찾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스웨터는 거기에 딱 맞는 제품이었다. 참신한 색을 많이 제작한 것도 색채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매력이라는 단순 명료한 발상에서 나왔다.
두 번째로 중요한 혁신을 ‘후염색’ 기법이었다. 이것은 스웨터 형태를 마름질한 후에 염색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색을 중시하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다. 스웨터 모양을 미리 만들어 놓은 후에 필요한 색을 염색하는 방법이라 컬러 유행을 곧바로 뒤쫓을 수 있고 재고를 남기지 않고 신속하게 상점에 진열할 수 있다. 이 방식은 나중에 단행한 조직 개혁의 기반도 되었다. 요컨대 제조와 판매 활동을 별개의 조직으로 취급하면서 최종적으로 일체화시킨다는 발상이다.
○ 베네통의 라이벌은 어디인가?
▶다행스럽게도 베네통은 설립 당시부터 15년 정도는 경쟁회사가 없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같은 소비자층을 겨냥한 스포츠웨어 메이커가 이탈리아 국내에 몇 개 생겨났지만 이렇다 할 성장은 없었다.
1978년에서 79년에 걸쳐 경쟁회사도 출현했다. 이탈리아 국내에만 라이벌이라는 이름에 근접해온 것이 ‘스테파넬’이다. 여기는 이미지에서 제품, 표적, 유통기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베네통을 모델로 해서 성공했다.
‘스테파넬’은 우리 회사와 같은 트레비조를 본거로 하는 집안 회사로 우리보다 몇 년 전부터 니트웨어를 제조판매해 왔다. 이 회사가 완전히 변신한 것은 70년대쯤 젊고 유능한 주제페 스테파넬과 그 누이동생인 조반나가 베네통과 매우 닮은 밝은 색상의 케쥬얼웨어를 제조하기 시작, 베네통과 같은 부티크 스타일의 상점에서만 판매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킨 데서 출발했다.
1988년이 되자 ‘스테파넬’의 점포수는 국내에 550점, 국외는 250점까지 늘어났다. 국내에서는 상당한 시장을 획득한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국제기업을 목표로 할 의도가 없다는 것과 또한 제품의 폭도 그다지 넓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에는 만만치 않은 경쟁회사가 몇 개 있다. ‘마네킹’, ‘라코스테’, ‘마리테 프랑소와 저버’ 등 모두 고급 메이커로 품질이나 상품 전개면에서도 뛰어나다. 그렇지만 이들의 메이커는 모두 프랑스 국내에서만 경쟁하다. 단 예외도 있어서, 특히 ‘라코스테’ 의 피케셔츠등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는 심한 경쟁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의 경쟁 회사는 ‘에스프리’, ‘커 갭’, ‘더 리미티드’, ‘바나나 리퍼브릭’ 등이 있다.
패밀리 비즈니스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면 가족 일원의 역할이 변하기 시작해 결국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버리는 일이 많지만 베네통의 경우 네 명의 가족 일원은 앞으로도 중추적 역할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옷을 파는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옷 광고를 하지 않는 베네통, 오히려 전혀 무관한 문제들 - 폭력, 인종문제, 에이즈, 마약, 전쟁, 환경오염 등 -을 다룸으로써 인류가 처해있는 현실 문제들을 쟁점화했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사회적 관심을 끌기 위한 쇼킹한 이미지만 만들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베네통 광고 전략, 협력업체와 대리점 간의 네트워크로 재고 위험을 극소화시키고, 해외 진출은 한 도시에 대여섯 개의 상점을 동시에 오픈 시켜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심어주고, 그 상점들을 정보수집의 거점으로 삼는것이 베네통 특유의 경영 시스템과 독특한 성공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Ⅶ. 패션브랜드 구찌(Gucci)
Karl Lagerfeld로 인한 Chanel의 멋진 컴백처럼 Gucci역시 Tom Ford가 화려한 컴백을 가능하게 하였다. 1994년 그가 creative director로 채택되기 이전의 Gucci는 파산위기에까지 처해있었다. 가족간의 불화와 세금회피로 인한 가족들의 투옥 등이 그 원인이었다. 1998년 3월, 마지막 Gucci의 남자 상속자인 Maurizio Gucci가 이혼전의 부인에게 살해되면서 그 스캔달은 하늘을 치솟았다. 가족간의 치열한 투쟁은 Gucci상속권에 있어서 늘 함께 해왔다. 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난Gucci의 창시자 Guccio Gucci도 어린 나이에 형제간의 불화 때문에 그의 나라인 이태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가 Savoy Hotel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항시 귀족 고객들의 트렁크와 모자를 보관하는 가방들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 그는 사치스러운 가죽제품 사업을 시작할 것을 결심한다. Gucci는 플로렌스로 돌아가 1920년 그의 첫번째
리바이스는 핵심고객층, 베이비부머가 늙어가고 있음을 몰랐다. 또 곱게 자란 양가집 자녀 출신 수재로서 현 회장은 너무나 고지식하게 교수들과 컨설턴트들이 얘기하는 교과서 경영에 매달렸다. 리엔지니어링이 모든 것인 양 얘기되던 90년대 중반, 수년에 걸친 혁명적 조직재구축을 하며 회사기를 거의 다 빼 버렸다. 직원들의 애사심은 무력감과 냉소주의로 변했고 제품에선 쉰내가 풀풀나게 됐다. 7%의 십대들이 \"쿨(cool)\"하다고 평가했던 리바이스 청바지는 몇 년 후 십대 머릿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기업회생 여부와 상관없이 젊은이들 마음속에선 이미 죽었다. 리바이스의 몰락은 마치 올들어 급진전되고 있는 총체적 물갈이를 만방에 고하는 듯하다. 쉰세대, 종신고용, 백화점, 공중파TV, 이미지마케팅, 기득권 세력들에게 모두 장송곡을 틀어주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시장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고객들의 마인드를 읽지 못하면, 현재의 고객이 나이가 들어가고 성향이 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한다면, 어느 기업이든 반드시 어느 날 갑자기 소비자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되고, 결국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당하게 된다. 리바이스 청바지의 사례가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Ⅵ. 패션브랜드 베네통(Benetton)
○ 중규모 기업이 세계의 리더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제품의 제조과정이 각종 판매과정 혹은 그 양자의 혁신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베네통의 경우 가장 중요한 혁신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스웨터를 제조하는 아이디어였다. 1950년대 중반 이탈리아는 스웨터가 시중에 그다지 많이 나와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에의 수요를 기대하고 시작을 했다. 마침 젊은 세대가 케쥬얼웨어를 찾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스웨터는 거기에 딱 맞는 제품이었다. 참신한 색을 많이 제작한 것도 색채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매력이라는 단순 명료한 발상에서 나왔다.
두 번째로 중요한 혁신을 ‘후염색’ 기법이었다. 이것은 스웨터 형태를 마름질한 후에 염색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색을 중시하는 방침에서 나온 것이다. 스웨터 모양을 미리 만들어 놓은 후에 필요한 색을 염색하는 방법이라 컬러 유행을 곧바로 뒤쫓을 수 있고 재고를 남기지 않고 신속하게 상점에 진열할 수 있다. 이 방식은 나중에 단행한 조직 개혁의 기반도 되었다. 요컨대 제조와 판매 활동을 별개의 조직으로 취급하면서 최종적으로 일체화시킨다는 발상이다.
○ 베네통의 라이벌은 어디인가?
▶다행스럽게도 베네통은 설립 당시부터 15년 정도는 경쟁회사가 없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같은 소비자층을 겨냥한 스포츠웨어 메이커가 이탈리아 국내에 몇 개 생겨났지만 이렇다 할 성장은 없었다.
1978년에서 79년에 걸쳐 경쟁회사도 출현했다. 이탈리아 국내에만 라이벌이라는 이름에 근접해온 것이 ‘스테파넬’이다. 여기는 이미지에서 제품, 표적, 유통기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베네통을 모델로 해서 성공했다.
‘스테파넬’은 우리 회사와 같은 트레비조를 본거로 하는 집안 회사로 우리보다 몇 년 전부터 니트웨어를 제조판매해 왔다. 이 회사가 완전히 변신한 것은 70년대쯤 젊고 유능한 주제페 스테파넬과 그 누이동생인 조반나가 베네통과 매우 닮은 밝은 색상의 케쥬얼웨어를 제조하기 시작, 베네통과 같은 부티크 스타일의 상점에서만 판매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킨 데서 출발했다.
1988년이 되자 ‘스테파넬’의 점포수는 국내에 550점, 국외는 250점까지 늘어났다. 국내에서는 상당한 시장을 획득한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국제기업을 목표로 할 의도가 없다는 것과 또한 제품의 폭도 그다지 넓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에는 만만치 않은 경쟁회사가 몇 개 있다. ‘마네킹’, ‘라코스테’, ‘마리테 프랑소와 저버’ 등 모두 고급 메이커로 품질이나 상품 전개면에서도 뛰어나다. 그렇지만 이들의 메이커는 모두 프랑스 국내에서만 경쟁하다. 단 예외도 있어서, 특히 ‘라코스테’ 의 피케셔츠등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는 심한 경쟁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의 경쟁 회사는 ‘에스프리’, ‘커 갭’, ‘더 리미티드’, ‘바나나 리퍼브릭’ 등이 있다.
패밀리 비즈니스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면 가족 일원의 역할이 변하기 시작해 결국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버리는 일이 많지만 베네통의 경우 네 명의 가족 일원은 앞으로도 중추적 역할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옷을 파는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옷 광고를 하지 않는 베네통, 오히려 전혀 무관한 문제들 - 폭력, 인종문제, 에이즈, 마약, 전쟁, 환경오염 등 -을 다룸으로써 인류가 처해있는 현실 문제들을 쟁점화했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사회적 관심을 끌기 위한 쇼킹한 이미지만 만들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베네통 광고 전략, 협력업체와 대리점 간의 네트워크로 재고 위험을 극소화시키고, 해외 진출은 한 도시에 대여섯 개의 상점을 동시에 오픈 시켜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심어주고, 그 상점들을 정보수집의 거점으로 삼는것이 베네통 특유의 경영 시스템과 독특한 성공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다.
Ⅶ. 패션브랜드 구찌(Gucci)
Karl Lagerfeld로 인한 Chanel의 멋진 컴백처럼 Gucci역시 Tom Ford가 화려한 컴백을 가능하게 하였다. 1994년 그가 creative director로 채택되기 이전의 Gucci는 파산위기에까지 처해있었다. 가족간의 불화와 세금회피로 인한 가족들의 투옥 등이 그 원인이었다. 1998년 3월, 마지막 Gucci의 남자 상속자인 Maurizio Gucci가 이혼전의 부인에게 살해되면서 그 스캔달은 하늘을 치솟았다. 가족간의 치열한 투쟁은 Gucci상속권에 있어서 늘 함께 해왔다. 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난Gucci의 창시자 Guccio Gucci도 어린 나이에 형제간의 불화 때문에 그의 나라인 이태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가 Savoy Hotel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항시 귀족 고객들의 트렁크와 모자를 보관하는 가방들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 그는 사치스러운 가죽제품 사업을 시작할 것을 결심한다. Gucci는 플로렌스로 돌아가 1920년 그의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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