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한일병탄과 시대사조
1. 신문학의 태동기 시대배경
(1) 경술국치(한일병탄)
(2) 일제의 교육, 언론 탄압
(3) 3.1운동
2. 시대사조
(1) 계몽주의
(2) 민족주의
(3) 시대적 이념에 대한 의의
Ⅲ. 1910년대 간행된 신문 및 문예지와 신문장 건립운동
1. 《매일신보》
2. 《소년》, 《청춘》, 《새별》과 신문장 건립운동
(1) 《소년》
(2) 《청춘》
(3) 《새별》
(4) 신문장 건립운동
3. 학지광과 신문화 수입
4. 태서문예신보와 번역
Ⅳ. 1910년대의 신문학 운동기
1. 최남선과 이광수에 의해 주도된 2인 문단시대
(1) 1910년대의 시(신체시와 근대시의 여울목)
1) 최남선의 신체시 실험
2) 이광수의 신시운동
3) 《학지광》과《태서문예신보》의 시인들
4) 1910년대 시의 문학사적 의의
(2) 1910년대의 소설(근대소설의 태동)
1) 신소설의 확장
2) 신채호와 현상윤의 근대적 자각
3) 이광수의 근대소설
Ⅴ. 희곡
1.연극사적 배경
2.신파극의 수용과 변모 양상
3.근대희곡의 태동
4.주요작가와 작품의 특징
(1)조일재의 <병자삼인>
(2)이광수의 <규한>과 <순교자>
(3)윤백남의 <운명>과 <국경>
(4)최승만의 <황혼>
(5)오천석의 <초춘의 비哀>
Ⅵ. 비평
1. 1910년대 문학비평 개관
2. 주요 비평가들
(1)이광수의 비평
(2)신채호의 비평
(3)김억의 비평
(4)양건식의 비평
3. 1910년대 문학비평의 의의
Ⅶ. 결론
Ⅱ. 한일병탄과 시대사조
1. 신문학의 태동기 시대배경
(1) 경술국치(한일병탄)
(2) 일제의 교육, 언론 탄압
(3) 3.1운동
2. 시대사조
(1) 계몽주의
(2) 민족주의
(3) 시대적 이념에 대한 의의
Ⅲ. 1910년대 간행된 신문 및 문예지와 신문장 건립운동
1. 《매일신보》
2. 《소년》, 《청춘》, 《새별》과 신문장 건립운동
(1) 《소년》
(2) 《청춘》
(3) 《새별》
(4) 신문장 건립운동
3. 학지광과 신문화 수입
4. 태서문예신보와 번역
Ⅳ. 1910년대의 신문학 운동기
1. 최남선과 이광수에 의해 주도된 2인 문단시대
(1) 1910년대의 시(신체시와 근대시의 여울목)
1) 최남선의 신체시 실험
2) 이광수의 신시운동
3) 《학지광》과《태서문예신보》의 시인들
4) 1910년대 시의 문학사적 의의
(2) 1910년대의 소설(근대소설의 태동)
1) 신소설의 확장
2) 신채호와 현상윤의 근대적 자각
3) 이광수의 근대소설
Ⅴ. 희곡
1.연극사적 배경
2.신파극의 수용과 변모 양상
3.근대희곡의 태동
4.주요작가와 작품의 특징
(1)조일재의 <병자삼인>
(2)이광수의 <규한>과 <순교자>
(3)윤백남의 <운명>과 <국경>
(4)최승만의 <황혼>
(5)오천석의 <초춘의 비哀>
Ⅵ. 비평
1. 1910년대 문학비평 개관
2. 주요 비평가들
(1)이광수의 비평
(2)신채호의 비평
(3)김억의 비평
(4)양건식의 비평
3. 1910년대 문학비평의 의의
Ⅶ. 결론
본문내용
의식에 고취해 있었던 까닭은 정치와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이를 극복하려는 사명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3) 시대적 이념에 대한 의의
이 시대는 啓蒙主義와 民族主義를 이념의 바탕에 둔다고 말할 수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가인 李光洙, 崔南善 등은 시대적 특수성에 기인하여 민족주의를 목적으로 계몽주의와 합하여, 쉽사리 그들에게서 啓蒙主義的인 성격과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구분하여 나눌 수는 없다. 李光洙의 작품에는 민족의식이 충만되어 있었고, 理想主義的인 경향이 농후했던 그는 理想主義를 民族意識 선전을 위한 하나의 方法論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과거와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 대신 이상의 세계를 제시해 주었고, 때때로 지나치게 가능성의 모습만을 제시했지만 韓日倂呑으로 실의에 빠진 대중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큰 의미를 갖는다. 崔南善은 傳統指向的인 자세를 가지고 민중을 계몽하는데 주력했다. 약관의 나이에 新文明 新文化에 경도되다가 청장년기에 들어서면서 朝鮮主義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이유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그의 문학적 대응이었다. 이처럼 신문학 태동기의 시대적 이념은 李光洙와 崔南善이라는 주체에 의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쓰여졌으며 이후 본격적인 文藝思潮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礎石이 되었다.
Ⅲ. 1910년대 간행된 신문 및 문예지와 新文章 建立運動
일제의 탄압 하에 있었던 1910년대 문학을 이해함에 있어 그 어느 것도 문학 위주의 자유로움은 보장되지 못했다. 일제는 이미 합병 이전 언론의 숨통을 틀어막은 「新聞紙法」(1907. 7.)과 「出版法」(1909. 2.) 제정하여 공포하였고, 특히 출판법은 한반도 내의 일체의 간행물을 검열허가 아래 발표되어지도록 규정하여 근대문학의 태동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상기 명시하다시피 일제는 강력한 언론정책을 수립하여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每日新報》가 유일한 것이었고, 기타 잡지는 정치사회사 배제를 원칙으로 하여 다소간의 宗敎誌를 중심으로 한 잡지들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도 지식인들은 新文章 建立運動을 통해 민족의식의 고양을 사상적 근원으로 삼아 약진하였는데, 최남선에 의하여 근대적 형식을 갖춘 월간지《少年》이 간행되었고, 역시 최남선에 의하여 편집 발행된《靑春》, 그리고 그 후신인《새별》에서 그러한 운동의 형식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유학생들의 기관지로 간행된 綜合誌《學之光》과 최초의 문예전문지《泰西文藝新報》등은 외국문학 수용을 위한 선도적 매체로써 근대 문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일궈낸다.
1. 《매일신보》
《每日申報》의 전신인 《大韓每日申報》는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 베셀: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大韓每日申報》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大韓每日申報》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1910년 8월 30일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大韓두 자를 떼고 《每日申報》로 개제한 것이다. 경영상으로는 일어판 기관지인《京城日報》에 통합시켜서 《京城日報》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 밑에 두어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되었다.
1920년 초까지의 무단정치 기간에는 《每日申報》가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으므로, 이 신문에 이인직(李仁稙)조중환(趙重桓)이해조(李海朝)이상협(李相協) 등이 신소설 또는 번안소설을 발표하였고, 春園의 처녀작 《無情》,《開拓者》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2. 《소년》, 《청춘》, 《새별》과 신문장 건립운동
(1) 《소년》
1)《少年》의 개요
《소년한반도》가 1907년 4월 통권 6권으로 폐간되자 이어서 六堂이 1908년 11월부터 1911년 5월까지 통권 23권의 《少年》을 발간했다.
신체시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海에게서 少年에게> 가 실린 최초의 월간 종합지이다. 비록 19세의 최남선이 자비를 들여 인쇄기를 직접 구입해 편집과 발행 등을 홀로 일임하였지만 세계를 알고 거국적 실력을 배양하라는 민족의식을 《少年》을 통해서 불러일으키게 된다.
2)《소년》의 특징
① 《少年》에 게재된 작품
《少年》에 게재된 작품을 분류해 보면 문학적인 것이 154편, 교훈적인 것이 77편, 학술적인 것이 40편, 상식적인 것이 35편, 대중 오락적인 것이 12편, 기타가 43편으로 문학적인 것이 가장 많다. 그런데 문학적인 것을 다시 분류하여 보면 시가 65편, 시조가 42편, 동요가 11편, 소설이 11편, 동화가 8편, 수필이 9편, 기타 8편 등으로 나타난다.
- 신체시
《少年》창간호 卷頭에 〈海에게서 少年에게〉의 시가 게재되어 있다. 이 시를 新詩 혹은 新詩라 일컫는다. 그리고 의미로는 전대의 고시가나 개화가사 및 창가에 대한 ‘새로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박종철 외,『개화기문학론』, 형설출판사, 1979, p. 161.
다음은 〈海에게서 少年에게〉의 일부이다.
텨...ㄹ썩, 텨...ㄹ썩,
(3) 시대적 이념에 대한 의의
이 시대는 啓蒙主義와 民族主義를 이념의 바탕에 둔다고 말할 수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가인 李光洙, 崔南善 등은 시대적 특수성에 기인하여 민족주의를 목적으로 계몽주의와 합하여, 쉽사리 그들에게서 啓蒙主義的인 성격과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구분하여 나눌 수는 없다. 李光洙의 작품에는 민족의식이 충만되어 있었고, 理想主義的인 경향이 농후했던 그는 理想主義를 民族意識 선전을 위한 하나의 方法論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과거와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 대신 이상의 세계를 제시해 주었고, 때때로 지나치게 가능성의 모습만을 제시했지만 韓日倂呑으로 실의에 빠진 대중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큰 의미를 갖는다. 崔南善은 傳統指向的인 자세를 가지고 민중을 계몽하는데 주력했다. 약관의 나이에 新文明 新文化에 경도되다가 청장년기에 들어서면서 朝鮮主義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이유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그의 문학적 대응이었다. 이처럼 신문학 태동기의 시대적 이념은 李光洙와 崔南善이라는 주체에 의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방법으로 쓰여졌으며 이후 본격적인 文藝思潮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礎石이 되었다.
Ⅲ. 1910년대 간행된 신문 및 문예지와 新文章 建立運動
일제의 탄압 하에 있었던 1910년대 문학을 이해함에 있어 그 어느 것도 문학 위주의 자유로움은 보장되지 못했다. 일제는 이미 합병 이전 언론의 숨통을 틀어막은 「新聞紙法」(1907. 7.)과 「出版法」(1909. 2.) 제정하여 공포하였고, 특히 출판법은 한반도 내의 일체의 간행물을 검열허가 아래 발표되어지도록 규정하여 근대문학의 태동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상기 명시하다시피 일제는 강력한 언론정책을 수립하여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每日新報》가 유일한 것이었고, 기타 잡지는 정치사회사 배제를 원칙으로 하여 다소간의 宗敎誌를 중심으로 한 잡지들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도 지식인들은 新文章 建立運動을 통해 민족의식의 고양을 사상적 근원으로 삼아 약진하였는데, 최남선에 의하여 근대적 형식을 갖춘 월간지《少年》이 간행되었고, 역시 최남선에 의하여 편집 발행된《靑春》, 그리고 그 후신인《새별》에서 그러한 운동의 형식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유학생들의 기관지로 간행된 綜合誌《學之光》과 최초의 문예전문지《泰西文藝新報》등은 외국문학 수용을 위한 선도적 매체로써 근대 문학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일궈낸다.
1. 《매일신보》
《每日申報》의 전신인 《大韓每日申報》는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 베셀: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大韓每日申報》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大韓每日申報》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1910년 8월 30일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大韓두 자를 떼고 《每日申報》로 개제한 것이다. 경영상으로는 일어판 기관지인《京城日報》에 통합시켜서 《京城日報》의 일본인 사장과 편집국장 밑에 두어 일제의 한국통치를 합리화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는 논조로 발간되었다.
1920년 초까지의 무단정치 기간에는 《每日申報》가 유일한 한국어 일간지였으므로, 이 신문에 이인직(李仁稙)조중환(趙重桓)이해조(李海朝)이상협(李相協) 등이 신소설 또는 번안소설을 발표하였고, 春園의 처녀작 《無情》,《開拓者》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2. 《소년》, 《청춘》, 《새별》과 신문장 건립운동
(1) 《소년》
1)《少年》의 개요
《소년한반도》가 1907년 4월 통권 6권으로 폐간되자 이어서 六堂이 1908년 11월부터 1911년 5월까지 통권 23권의 《少年》을 발간했다.
신체시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海에게서 少年에게> 가 실린 최초의 월간 종합지이다. 비록 19세의 최남선이 자비를 들여 인쇄기를 직접 구입해 편집과 발행 등을 홀로 일임하였지만 세계를 알고 거국적 실력을 배양하라는 민족의식을 《少年》을 통해서 불러일으키게 된다.
2)《소년》의 특징
① 《少年》에 게재된 작품
《少年》에 게재된 작품을 분류해 보면 문학적인 것이 154편, 교훈적인 것이 77편, 학술적인 것이 40편, 상식적인 것이 35편, 대중 오락적인 것이 12편, 기타가 43편으로 문학적인 것이 가장 많다. 그런데 문학적인 것을 다시 분류하여 보면 시가 65편, 시조가 42편, 동요가 11편, 소설이 11편, 동화가 8편, 수필이 9편, 기타 8편 등으로 나타난다.
- 신체시
《少年》창간호 卷頭에 〈海에게서 少年에게〉의 시가 게재되어 있다. 이 시를 新詩 혹은 新詩라 일컫는다. 그리고 의미로는 전대의 고시가나 개화가사 및 창가에 대한 ‘새로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박종철 외,『개화기문학론』, 형설출판사, 1979, p. 161.
다음은 〈海에게서 少年에게〉의 일부이다.
텨...ㄹ썩, 텨...ㄹ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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