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와 대한제국의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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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화기와 대한제국의 행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개화기와 대한제국의 행정

1. 개요

2. 개국과 행정개혁의 배경
 1) 근대사회의 전개
 2) 근대의식의 성장
 3) 통리기무아문의 성립
 3) 통리기무아문의 변천
 4) 제도의 개혁

3. 갑오개혁과 정부기구
 1) 갑오개혁의 배경
 2) 정부기구의 개편과정
 3) 중앙정부의 기구 및 기능

4. 대한제국의 행정
 1) 대한제국의 성립
 2) 대한제국의 행정기구
 3) 대한제국의 멸망

본문내용

고, 도지부는 이에 의해 조세를 징수하게 되었다.
(6) 통신 교통관제
1896년부터 통신시설이 크게 확충되었다 우편제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1896년 초부터 공주 전주 나주 평양 의주 등지에 우편지사가 설치되었다. 청일전쟁 중 일본은 서로 북로전선을 군용으로 독점하였고, 조선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인 경부간 군용전선을 가설하였다.
한편 전쟁으로 전신시설이 많이 파괴되어 정부 자체의 전신사업은 중단상태에 빠져버렸다. 아관파천 후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정부는 서로 북로전선을 되찾았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정보가 관제를 제정하고 이어 한성 개성 평양 의주 인천 등지에 전보사를 설치하여 전보업무를 확대, 전신가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 통신시설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계속 확대되어 갔다.
한편 전화의 보급도 진전되었다. 궁내부에 전화과가 신설되어 그 업무를 관장하였다. 궁내부에 전화가 가설되어 중앙의 각 관서는 물론 멀리 인천까지 개통되었다. 철도시설은 처음부터 외국인에게 특허되어 그들의 자본과 기술에 의하여 부설되었다. 경인 경부철도의 개통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자극된 정부는 경의철도 서울-목포간 철도경원철도 계획을 추진하였다.
3) 대한제국의 멸망
1886년 2월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일본의 침략적 내정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단행되었다. [註1] 이후 친러파(親露派)의 지배하에 있던 내각은 의정부제(議政府制)를 복구하여 갑오경장(甲午更張) 당시 확립한 내각제도와 국왕의 전제권에 대한 제한조치를 풀어 전제군주제로 부활시겼다. 그러나 정부의 정치명령과 인사조치는 러시아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특히 재정, 군사면에서의 러시아의 간섭은 노골화되었다. 여기에 구미 열강도 조선에서의 이권 획득에 있어서 기회균등을 내세워 미 영 불 일 등 각국이 다같이 광산 철도 삼림 어장 등의 이권을 침탈하는데 급급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일단 견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새로 나타난 러시아의 침략기도를 다시 막아야 할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열강국들의 이권 침탈을 긴급히 저지해야만 되었다. 게다가 이때 일본마저도 제 3차 러일협정(露日協定) 이후 경제적으로 급속히 조선에 진출하여 많은 이권을 얻어내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조야(朝野)는 무엇보다도 국왕이 조속히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환궁하여 자위책을 강구하고 자주독립권을 확고히 다지며 당면한 여러 가지 난제를 자국적으로 처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혁을 실시할 것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정부는 임오군란 이후는 청(淸)에게, 청일전쟁 이후는 일본에게, 아관파천 이후는 러시아에게 의존하는 동안 그들의 침략적 내정 간섭을 받아 자주성을 잃어가고, 한편 그런 속에서 국가의 중요 이권이 차례로 외국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됨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또한 대한제국의 성립은 자주독립국으로서 청 일 노 중 그 어느 나라의 내정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으나, 그것은 한갖 상징적인 선언이었을 뿐 대한제국의 구조는 아직 취약한 것으로서 그동안 누적되어 많은 난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주독립을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 이권의 양여 및 침탈을 중단시키고 외세의 내정간섭을 배격하여 자주권의 침해를 막고 각 부문에서의 자주독립의 내실을 기해야만 했다. 또한 민중이 이미 자유와 평등 및 자기들의 인권을 스스로 주장할 만큼 성장했으므로 그들의 요청을 실현시켜 줌으로써 민중의 힘으로 자주 독립을 지킬 수 있게 하여야 했으며, 국제 세력균형을 이용해서 이루어진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세력균형이 깨지는 경우에 있을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해야만 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기본성격은 기술적, 경제적 측면에서는 근대개혁을 추진하지만 정치적 측면에서는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불균형적인 근대화 정책으로는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급속한 개혁을 이룰 수 없었다. 더구나 1904년 노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그 개혁속도마저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일본은 1905년 7월 20일에는 군사경찰훈령(軍事警察訓令)을 만들어 치안권을 빼앗았으며, 8월 22일에는 한일외국인고문용빙(韓日外國人顧問傭聘)에 관한 협정서로 재정권을 빼앗아갔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여 갔다. 그리고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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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23
  • 저작시기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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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7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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