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단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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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태원 단편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 론

II. 본 론
 1. 1930년대의 시대적 배경
 2. 작가의 연보와 생애
 3. 작 품 분 석
 3. ‘삶’은 괴롭다

III. 결 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활발히 활동했지만 해방 이 후 사상적 전향과 함께 월북을 단행했던 문인들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분단 된 조국 현실과 더불어 거기에 또한 편협하고 독단적인 정치하에서 의도적으로 배제 되어진 까닭에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공부한 바가 거의 없다. 그저 ‘카프’라는 단체명과 거기에서 활동했다는 문인들의 이름 밖에는, 게다가 젊은 우리 세대가 월북 작가들의 이름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몇 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과거의 문학을 공부하는데 있어, 그 시대엔 상당한 활동과 문학적인 평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그것들을 차치함으로 문학사의 커다란 공백감을 느껴야만 했다. 다행히도 근래에 정치적 상황이 풀리면서 월북 작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해금으로 그들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 간의 작업이라 아직까지 이렇다 할 올바른 비평이나 평가가 내려진 것은 얼마 있지 않다.
이에 1930년대 구인회(九人會)의 일원으로 왕성한 창작 활동과 동시대의 문인들의 많은 문학적 관심을 이끌었던 구보 박태원(구보 박태원)을 들어 그의 대표적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같은 작풉집에 실린 작품들을 비교, 분석함으로 작품에 대한 평가와 함께 당 대의 모더니스트였던 박태원이 어떻게 전향을 하게 되었는지를 미약하게나마 유추해 보기로 한다.
우선 본론의 전개에 있어,
1. 1930년 대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을 약술하고,
2. 구보 박태원의 연보 및 생애에 대하여,
3. 본격적인 작품분석으로 들어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중심으로 같은 책에 수록된 여타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작품들의 리얼리즘적 양상과 모더니즘적 특징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결론은 본론의 내용을 요약하고 그것을 토대로 본 논문의 요지를 정리하며, 박태원 단편소설이 우리 문학사에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가를 평가하여 보도록 하겠다.
II. 본 론
1. 1930년대의 시대적 배경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침략적 야욕 아래 중국에 대한 전쟁을 감행한 것이 1931년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3.1 운동 이 후, 문화정책을 그 이전의 무단정책으로 환원시켜 놓았다. 그리하여 언론 검열의 강화, 사상 취재의 강화, 집회 결사의 봉쇄 등으로 암흑정치 상황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31년 제1차 카프맹원 검거사건, 신간회 해산사건, 1934년 제 2차 카프맹원 검거사건 등으로 계급주의 문학에 대한 봉쇄와 민족주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조연현, 한국현대문학사 (성문각 1969), p.476.
1920년 대의 민족문학은 민족정서의 서정시나 국민문학운동인 시조부활운동 등으로 대표되던 것이, 1930년 대에 들어서는 그 양상이 역사소설을 통해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이광수, 김동인, 박종화, 윤백남 등의 작품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소설은 지나친 대중성으로 인하여 문학성이 거의 무시되거나 소설을 통한 민족주의 사상 자체가 단순한 회고적 취미나 과거의 사실을 알려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앞의 책, p.477.
1920년 대의 문단을 한 때 장악했던 KAFP문학이 두 차례의 검거로 계급주의 문학이 퇴조하게 되어 그러한 문학의 난맥 상태의 해소를 모색하던 중 나타나게 된 것은 [시문학] 1930년에 창간된 시동인지인데, 해외 문학에 뜻을 둔 문학 청년들이 신문학 초기의 우리문단에 본격적인 시문학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 시문학파는 외국시의 지나친 모방에 빠졌던 우리 시단을 일으키려고 철저한 서정시의 순문학적인 경향으로 시문학 운동을 벌였다. 또 이들은 외국시의 올바른 번역과 새로운 해외시의 소개에도 힘썼다. 주요 동인으로는 김영랑, 정지용, 이하윤, 박용철, 현 구, 정인보, 변영로, 신석정 등이 있다.
, [구인회], [시인부락] 1936년에 창간된 시동인지로 시가 너무 예술적인 기교에만 치우침을 깨닫고 인간 생명의 표현과 인간의 내부를 나타내는 심리주의적인 경향의 시를 썼다. 생명파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서정주, 김동리, 함형수, 오화룡, 이성범, 박종식, 김진세 등이 그 동인이었다.
등을 통해 태동 발전한 순수문학이었다. 이들은 예술의 정치성.사상성을 지양하고 언어의 순수성이나 인간의 생명성 등 순수예술을 표방하였고, 최재서, 김기림, 김광균 등에 의해 주지주의적 모더니즘이 등장하였다.
이 중 [시문학]과 [시인부락]은 시를 중심으로한 동인이었으므로 이 글에서는 언급을 피하기로 하고 박태원이 직접 관여하여 작품 활동을 했던 [구인회]에 대해서는 다음 차례인 작가의 연보 및 생애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한 편, 이러한 문단적인 배경 외에 1930년을 전 후로 한국의 문화계가 총집중하여 한글운동을 벌이었다. 한글운동은 당시 조선어학회인 한글학회가 중심이 되어 유지 발전 시켜 왔지만,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언론계, 문단계, 교육계 등은 물론 일반 유지, 실업계에까지 광범하게 참여한 커다란 문화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에 조선어 학회에서는 1933년 10월 19일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2.작가의 연보와 생애
박태원은 1909년 음력 12월 7일 (양력 1월 6일) 서울 수중박골(지금의 수송동)에서 아버지 밀양 박씨 용환과 남양 홍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등의 큰 점 때문에 점성이었는데, 후에(1918년) 태원으로 개명했다.
11세인 1919년에 경성사범부속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4학년 수료 후 시험을 보아 경성제일공립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동명] 제 33호(4월)의 소년 칼럼 란에 <입학>이란 작문이 뽑히었다.
18세 때 의사인 숙부 박용남과 고모 박용일이 문인들과 교분이 깊어, 그들의 소개로 이광수에게 지도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제일고보 재학 중 [조선 문단], [동아일보], [신민] 등에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
21세에 제일고보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법정대학 예과에 입학, 12월에 필명 박태원으로 [신생]에 시 <외로움>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에 소설 <해하의 일야>등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학교를 중퇴한 후, 귀국하여 [신생] 10월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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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0페이지
  • 등록일2013.08.25
  • 저작시기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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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75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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