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로마의 골(Gaul) 정복
1) 골(Gaul) 정복
2) 팍스로마나
3) 갈리아 몰락
2. 프랑크 왕국의 건설
1) 프랑크 족
2) 카롤링거 왕조
3) 샤를마뉴 이후
3. 시사점
Ⅲ.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로마의 골(Gaul) 정복
1) 골(Gaul) 정복
2) 팍스로마나
3) 갈리아 몰락
2. 프랑크 왕국의 건설
1) 프랑크 족
2) 카롤링거 왕조
3) 샤를마뉴 이후
3. 시사점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수하거나 통합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왕위를 계승할 때 분할 상속을 하는 특징 때문에 영토가 많은 지방으로 분할되었고, 이것은 지방 분권적인 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2) 카롤링거 왕조
카롤링거(751∼987) 가문은 메로빙거 무위왕들(do-nothing sovereigns)로 인한 무정부 상태를 이용해서 7세기 말부터 권력을 장악했다. 특히, 궁재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은 스페인에서 쳐들어 온 이슬람 교도들을 투르(Tours)와 푸아티에(Poitiers) 사이에서 격퇴했다(732). 그러자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에게 제휴의 손을 내밀게 되었으며, 이후 프랑크 왕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제휴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이게 되었다. 그는 메로빙거 왕조의 티에리 4세가 사망한 후 7년 동안 정통성 있는 국왕이 없다는 이유에서 국왕 없이 국가를 통치했다. 그가 남긴 광대한 왕국은 소(小) 피핀과 카알로만 두 형제가 떠맡았다. 그러나 이 형제는 굳이 어느 수도원에서 메로빙거 왕가의 후손 한 사람을 찾아 내어 왕위에 앉혔는데, 그가 쉴페릭 3세이다. 747년, 형 카알로만은 갑자기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속세를 떠나 수도사가 되었다. 뜻밖에도 1인 지배의 영광을 누리게 된 피핀이 전 왕국의 궁재로서 실권을 휘둘렀다.
3) 샤를마뉴 이후
샤를마뉴의 정책이 마냥 온건하고 신사적이지는 않았다. 거친 이민족들을 제압하려는 뜻에서인지, 굴복시킨 적들을 종종 잔혹하게 학살했다. 그가 참여한 마지막 전쟁인 808년의 데인 인들과의 전쟁에서는 붙잡은 포로들의 키를 재어 검의 길이보다 크면 모조리 살육하기도 했다. 또한 새로 복속시킨 게르만인이나 슬라브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했는데, 이를 거부하거나 교회나 성직자를 공격한 자들은 가차없이 처형했다. 심지어 예배를 빠지거나 금식 주간을 소홀히 한 사람조차 처형했으니, 오늘날의 사학자들이 샤를마뉴를 “최초의 기독교 근본주의 지도자”로 부를 만도 했다. 그는 왕권의 강화와 제국의 통합을 늘 고심했다. ‘제국’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서유럽은 중앙권력이 지방에 미치는 한도가 매우 미약한 사회였다. 샤를마뉴가 직접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땅은 수도 아헨 일대에 불과했다. 그가 끊임없이 동서남북을 다니며 전쟁을 벌인 까닭에는 새로 얻은 영토를 신하들에게 봉토로 나눠주고 충성을 얻어내려는 뜻, 그리고 오래 전에 복속시킨 영주들의 충성을 재확인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는 봉토를 나눠줄 때도 인접한 땅을 한 사람에게 주지 않았으며, 새로 봉토를 주면서 예전에 준 봉토는 돌려받는 등 지방 영주들이 자체적인 힘을 키우지 않게 만전을 기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모자라 지방귀족을 감시하는 순찰사를 각지에 파견했다. 그는 매년 5월과 10월에 귀족과 자유민을 소집해 집회를 열었으며, 귀족들과의 회의를 거쳐 칙령으로 새 법률을 제정하고, 자유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전쟁터로 출정했다. 칙령은 다소 일관성이 없었으며, 비판적인 견해로는 “10월에 만든 법을 이듬해 5월에 폐지하기를 반복했다.”
샤를마뉴는 47년이나 통치했으며, 그처럼 강한 권력과 긴 통치기간에는 보통 후계자 문제와 반역 음모가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샤를마뉴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중요한 반란은 두 번뿐이었는데, 그 중 한 차례인 792년에는 그의 맏아들이지만 버림받았던 아들인 피핀(곱사등이 피핀)이 샤를마뉴와 힐디가르트 황후, 그리고 이복형제들을 암살하고 제위에 오르려다 발각되었다. 샤를마뉴는 다섯번 결혼했고 따로 다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그리고 모두 20명의 자녀를 보았다. 샤를마뉴는 세 번째 황후(곱사등이 피핀을 낳은 히밀트루드와는 혼인관계가 모호했고, 공식적인 첫째 황후 데시데라타와는 1년 만에 이혼했기에 그녀가 실질적인 첫째 황후라 봐도 좋았다)인 힐디가르트가 낳은 셋째 아들(첫째와 둘째는 사망했다) 루이를 후계자로 삼아 813년에 공동 황제 지위를 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814년에 늑막염으로 사망했다.
샤를마뉴의 제국 운영 방식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계승한 경건왕 루이(루트비히 1세)는 아버지처럼 사방을 돌며 정복과 진압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그러자 지방의 영주들은 곧바로 독립성을 키웠다. 중계무역 역시 비잔틴과 이슬람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프랑크를 따돌린 직접 무역으로 바뀌어갔다. 또한 루이의 생전에도 계승권을 놓고 반란을 일으킨 그의 자식들은 루이의 사망(840년) 후 치열한 골육상잔을 벌였으며, 이는 843년의 베르
2) 카롤링거 왕조
카롤링거(751∼987) 가문은 메로빙거 무위왕들(do-nothing sovereigns)로 인한 무정부 상태를 이용해서 7세기 말부터 권력을 장악했다. 특히, 궁재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은 스페인에서 쳐들어 온 이슬람 교도들을 투르(Tours)와 푸아티에(Poitiers) 사이에서 격퇴했다(732). 그러자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에게 제휴의 손을 내밀게 되었으며, 이후 프랑크 왕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제휴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이게 되었다. 그는 메로빙거 왕조의 티에리 4세가 사망한 후 7년 동안 정통성 있는 국왕이 없다는 이유에서 국왕 없이 국가를 통치했다. 그가 남긴 광대한 왕국은 소(小) 피핀과 카알로만 두 형제가 떠맡았다. 그러나 이 형제는 굳이 어느 수도원에서 메로빙거 왕가의 후손 한 사람을 찾아 내어 왕위에 앉혔는데, 그가 쉴페릭 3세이다. 747년, 형 카알로만은 갑자기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속세를 떠나 수도사가 되었다. 뜻밖에도 1인 지배의 영광을 누리게 된 피핀이 전 왕국의 궁재로서 실권을 휘둘렀다.
3) 샤를마뉴 이후
샤를마뉴의 정책이 마냥 온건하고 신사적이지는 않았다. 거친 이민족들을 제압하려는 뜻에서인지, 굴복시킨 적들을 종종 잔혹하게 학살했다. 그가 참여한 마지막 전쟁인 808년의 데인 인들과의 전쟁에서는 붙잡은 포로들의 키를 재어 검의 길이보다 크면 모조리 살육하기도 했다. 또한 새로 복속시킨 게르만인이나 슬라브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했는데, 이를 거부하거나 교회나 성직자를 공격한 자들은 가차없이 처형했다. 심지어 예배를 빠지거나 금식 주간을 소홀히 한 사람조차 처형했으니, 오늘날의 사학자들이 샤를마뉴를 “최초의 기독교 근본주의 지도자”로 부를 만도 했다. 그는 왕권의 강화와 제국의 통합을 늘 고심했다. ‘제국’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서유럽은 중앙권력이 지방에 미치는 한도가 매우 미약한 사회였다. 샤를마뉴가 직접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땅은 수도 아헨 일대에 불과했다. 그가 끊임없이 동서남북을 다니며 전쟁을 벌인 까닭에는 새로 얻은 영토를 신하들에게 봉토로 나눠주고 충성을 얻어내려는 뜻, 그리고 오래 전에 복속시킨 영주들의 충성을 재확인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는 봉토를 나눠줄 때도 인접한 땅을 한 사람에게 주지 않았으며, 새로 봉토를 주면서 예전에 준 봉토는 돌려받는 등 지방 영주들이 자체적인 힘을 키우지 않게 만전을 기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모자라 지방귀족을 감시하는 순찰사를 각지에 파견했다. 그는 매년 5월과 10월에 귀족과 자유민을 소집해 집회를 열었으며, 귀족들과의 회의를 거쳐 칙령으로 새 법률을 제정하고, 자유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전쟁터로 출정했다. 칙령은 다소 일관성이 없었으며, 비판적인 견해로는 “10월에 만든 법을 이듬해 5월에 폐지하기를 반복했다.”
샤를마뉴는 47년이나 통치했으며, 그처럼 강한 권력과 긴 통치기간에는 보통 후계자 문제와 반역 음모가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샤를마뉴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중요한 반란은 두 번뿐이었는데, 그 중 한 차례인 792년에는 그의 맏아들이지만 버림받았던 아들인 피핀(곱사등이 피핀)이 샤를마뉴와 힐디가르트 황후, 그리고 이복형제들을 암살하고 제위에 오르려다 발각되었다. 샤를마뉴는 다섯번 결혼했고 따로 다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그리고 모두 20명의 자녀를 보았다. 샤를마뉴는 세 번째 황후(곱사등이 피핀을 낳은 히밀트루드와는 혼인관계가 모호했고, 공식적인 첫째 황후 데시데라타와는 1년 만에 이혼했기에 그녀가 실질적인 첫째 황후라 봐도 좋았다)인 힐디가르트가 낳은 셋째 아들(첫째와 둘째는 사망했다) 루이를 후계자로 삼아 813년에 공동 황제 지위를 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814년에 늑막염으로 사망했다.
샤를마뉴의 제국 운영 방식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계승한 경건왕 루이(루트비히 1세)는 아버지처럼 사방을 돌며 정복과 진압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그러자 지방의 영주들은 곧바로 독립성을 키웠다. 중계무역 역시 비잔틴과 이슬람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프랑크를 따돌린 직접 무역으로 바뀌어갔다. 또한 루이의 생전에도 계승권을 놓고 반란을 일으킨 그의 자식들은 루이의 사망(840년) 후 치열한 골육상잔을 벌였으며, 이는 843년의 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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