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중세의 이단운동
- 11~13세기 이단과 로마교회의 대응
1. 서론
2. 이단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
3. 중세 이단 운동의 시초, 앙리 드 로잔과 피에르 드 브뤼이
4. 평신도의 경건성을 중시했던 발도파
5. 마니교 유형의 이단운동 - 보고밀파, 카타리파
6. 로마 교회의 이단운동에 대한 대응Ⅰ- 설득
7. 로마 교회의 이단운동에 대한 대응Ⅱ - 억압 및 악마화
8. 결론
- 11~13세기 이단과 로마교회의 대응
1. 서론
2. 이단 운동이 발생하게 된 배경
3. 중세 이단 운동의 시초, 앙리 드 로잔과 피에르 드 브뤼이
4. 평신도의 경건성을 중시했던 발도파
5. 마니교 유형의 이단운동 - 보고밀파, 카타리파
6. 로마 교회의 이단운동에 대한 대응Ⅰ- 설득
7. 로마 교회의 이단운동에 대한 대응Ⅱ - 억압 및 악마화
8. 결론
본문내용
관에서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악으로부터 해방된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다수 집단의 신앙을 곡해하거나 순진하게 오해한 데서 비롯되기도 했다. 이것은 어떠한 죄악에 빠져도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대개 하나님과의 동일성의 상태에 이르려는 강력한 금욕주의적 실천을 의미했다.
중세 서유럽이 이단이 출현하자마자 성적 방종에 탐닉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집회를 열어 무질서한 성적 향연을 벌이고, 이로 인해 태어난 아이를 죽여 불에 태워버렸다는 비난 문구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러한 비난 문구는 이교도 선동가들이 기독교도들에게 가했던 비방을 기술한 표현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개별 이단자들 모두가 점차 개인적 금욕에 헌신하는 이단 집단으로 바뀌면서 성적 일탈에 대한 비난은 이단 집단 전체에 붙어다니게 되었다. 이러한 중상 비방이 어느 정도로까지 끈질긴가는 어원적 측면에서도 볼 수 있다. 12세기 말 ‘알비 카타리 파’는 프랑스에서 ‘불가리아 놈들’(Les Bougres)이라는 말로 알려졌는데, 이 말은 카타리 파의 기원지로 추정되는 Bulgaria란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영불 해협을 건너가서 남색쟁이를 의미하는 bugger란 영어 단어를 탄생시켰다. 마찬가지로 남부 독일에서도 Ketzerei란 방언(‘카타리 파’란 말의 독일 방언)이 이단이나 남색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보다 더 온건한 일부 학문적 견해들은 이단자들이 사악한 생활을 했다는 혐의를 벗겨주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인 지아코모 카펠리는 그의 『이단자 반박 대전』(Summa contra Haereticos, 1240)에서 “혹자가 거짓 진술하듯 간음을 목적으로 열린 것이 아니라, 설교와 고백을 목적으로” 열린 것이었음을 밝혔다.
8. 결론
이단과 관련된 특징들 중 하나는 정치적 권위가 분산되고 강력한 중앙 세력이 없는 지역에서 이단이 뿌리를 깊게 내렸다는 점이다. 이단은 권위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잉글랜드, 시실리, 카페왕조 하의 프랑스)에서는 확고한 거점을 갖기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세속 당국은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과 안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운동을 제거하기 위해 교화와 협력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저지대 국가들, 남부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이단이 세력을 잡고 번성하였으며 가톨릭 교회 당국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 지역들은 도시가 집중적으로 성장하고 산업이 발전하고 이동이 용이하고 부가 집중되고 지원 세력이 많았던 곳이다.
이단은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동의 산물이라고도 보는 견해도 있다. 1000년 이후부터는 인구 증가에 자극을 받아 사회 경제적 구조에서 일련의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대대적인 인구 이동과 기존 형식의 와해를 초래했다. 새로운 도시 사회는 경쟁과 개인주의를 촉진시켰다.
이단으로 기운 사람들은 변동의 희생자였을 것이다. 도시에서 소상인과 장인, 전통적 도시 귀족 가문들은 가장 열렬한 이단 지지자들이 되었다. 분할 상속으로 가난해지고 교회 개혁으로 교회 토지의 경작 기회를 상실한 남 프랑스의 기사와 귀족들도 마찬가지로 이단에 매력을 느꼈다. 도시의 부활로 말미암은 공동체와 가족의 전통적 유대의 와해는 이단자 공동체에 의해 벌충될 수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이단 종파에 가담하고 대중 설교가를 추종하였다. 사회학적으로 이에 대한 이유를 따져보면 남성에 비해 여성은 너무 만은 반면, 여성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직업은 적었고, 그렇다고 여성이 성직자가 될 수도 없었던 데 있었다. 카타리 파와 발도파는 여성들에게 그들이 설교가와 설교 참가자로 활동할 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또 많은 여성들은 이단 종파에서 천명된 생활 양식과 가치에서 긍정적인 영적 매력을 발견하였다.
로마 교회는 도시의 급격한 팽창에 적응하지 못했고, 교회의 본당구 체제는 새로운 삶을 찾아 도시로 쇄도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또한 교회는 화폐 경제의 급증에 대처하지 못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물질주의의 위기가 초래되었다. 이에 대한 교회의 첫 반응은 새로운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기존 전통은 도시, 돈, 도시의 새로운 직업에 적대적이었다. 10세기 말까지 오만죄가 7죄종(罪宗)가운데 가장 큰 죄였으나, 11세기에는 탐욕죄에 밀려났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탁발 수도사와 발도파와 카파리파 같은 이단 집단은 자연스럽게 청빈과 정화를 택하였다. 이는 물질주의의 성장에 대한 경건한 평신도의 대응으로 보아야 하며 청빈사상의 고양을 가져왔다.
청빈사상의 고양 외에도 동정정절성적 절제성적 포기 등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독신 생활은 출신배경나이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생활 방식이었다. 독신생활은 깊은 내적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재산과 종족 번식에 주로 관심이 있던 사회로부터 사람들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카타리 파는 성에 대한 증오감에서 독신 생활을 제도화했다. 발도파는 절제와 도덕을 생활화했다. 프란치스코회는 독신 생활을 맹세하였다. 이단자와 탁발 설교가들은 세계의 임박한 종말과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영적 완벽의 상태에 도달할 필요성에 눈길을 두었다. 재산과 섹스의 거부는 사도의 지위에 이르려는 욕구의 강력한 표현이었다.
이와 함께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영적 권능에 보다 직접 접근하고자 하는 욕구였다. 많은 서민들은 더 이상 성직자를 신뢰하지 않았고, 교회 건물과 의례의 모든 치장을 군더더기로 보았으며, 그래서 신자들의 모임과 모든 신자의 사제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으로 접하기 위해 속어로 번역된 성경의 연구 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제도를 탐색하였다. 그러므로 중세 이단의 유형과 발전을 설명해주는 것은, 청빈과 금욕주의와 ‘사도적 삶’ 등에의 끊이지 않는 이끌림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동 및 소요에 관련되어 있는 특수한 상황이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중세의 소외집단제프리 리처즈 著, 유희수조명동 譯, 1999, 느티나무
세계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논쟁정행업 著, 2000, 한국장로교출판사
기타 인터넷 참조
중세 서유럽이 이단이 출현하자마자 성적 방종에 탐닉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집회를 열어 무질서한 성적 향연을 벌이고, 이로 인해 태어난 아이를 죽여 불에 태워버렸다는 비난 문구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러한 비난 문구는 이교도 선동가들이 기독교도들에게 가했던 비방을 기술한 표현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개별 이단자들 모두가 점차 개인적 금욕에 헌신하는 이단 집단으로 바뀌면서 성적 일탈에 대한 비난은 이단 집단 전체에 붙어다니게 되었다. 이러한 중상 비방이 어느 정도로까지 끈질긴가는 어원적 측면에서도 볼 수 있다. 12세기 말 ‘알비 카타리 파’는 프랑스에서 ‘불가리아 놈들’(Les Bougres)이라는 말로 알려졌는데, 이 말은 카타리 파의 기원지로 추정되는 Bulgaria란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영불 해협을 건너가서 남색쟁이를 의미하는 bugger란 영어 단어를 탄생시켰다. 마찬가지로 남부 독일에서도 Ketzerei란 방언(‘카타리 파’란 말의 독일 방언)이 이단이나 남색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보다 더 온건한 일부 학문적 견해들은 이단자들이 사악한 생활을 했다는 혐의를 벗겨주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인 지아코모 카펠리는 그의 『이단자 반박 대전』(Summa contra Haereticos, 1240)에서 “혹자가 거짓 진술하듯 간음을 목적으로 열린 것이 아니라, 설교와 고백을 목적으로” 열린 것이었음을 밝혔다.
8. 결론
이단과 관련된 특징들 중 하나는 정치적 권위가 분산되고 강력한 중앙 세력이 없는 지역에서 이단이 뿌리를 깊게 내렸다는 점이다. 이단은 권위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잉글랜드, 시실리, 카페왕조 하의 프랑스)에서는 확고한 거점을 갖기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세속 당국은 기독교 세계의 통일성과 안정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이는 운동을 제거하기 위해 교화와 협력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저지대 국가들, 남부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이단이 세력을 잡고 번성하였으며 가톨릭 교회 당국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 지역들은 도시가 집중적으로 성장하고 산업이 발전하고 이동이 용이하고 부가 집중되고 지원 세력이 많았던 곳이다.
이단은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동의 산물이라고도 보는 견해도 있다. 1000년 이후부터는 인구 증가에 자극을 받아 사회 경제적 구조에서 일련의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대대적인 인구 이동과 기존 형식의 와해를 초래했다. 새로운 도시 사회는 경쟁과 개인주의를 촉진시켰다.
이단으로 기운 사람들은 변동의 희생자였을 것이다. 도시에서 소상인과 장인, 전통적 도시 귀족 가문들은 가장 열렬한 이단 지지자들이 되었다. 분할 상속으로 가난해지고 교회 개혁으로 교회 토지의 경작 기회를 상실한 남 프랑스의 기사와 귀족들도 마찬가지로 이단에 매력을 느꼈다. 도시의 부활로 말미암은 공동체와 가족의 전통적 유대의 와해는 이단자 공동체에 의해 벌충될 수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이단 종파에 가담하고 대중 설교가를 추종하였다. 사회학적으로 이에 대한 이유를 따져보면 남성에 비해 여성은 너무 만은 반면, 여성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직업은 적었고, 그렇다고 여성이 성직자가 될 수도 없었던 데 있었다. 카타리 파와 발도파는 여성들에게 그들이 설교가와 설교 참가자로 활동할 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또 많은 여성들은 이단 종파에서 천명된 생활 양식과 가치에서 긍정적인 영적 매력을 발견하였다.
로마 교회는 도시의 급격한 팽창에 적응하지 못했고, 교회의 본당구 체제는 새로운 삶을 찾아 도시로 쇄도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또한 교회는 화폐 경제의 급증에 대처하지 못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물질주의의 위기가 초래되었다. 이에 대한 교회의 첫 반응은 새로운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기존 전통은 도시, 돈, 도시의 새로운 직업에 적대적이었다. 10세기 말까지 오만죄가 7죄종(罪宗)가운데 가장 큰 죄였으나, 11세기에는 탐욕죄에 밀려났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탁발 수도사와 발도파와 카파리파 같은 이단 집단은 자연스럽게 청빈과 정화를 택하였다. 이는 물질주의의 성장에 대한 경건한 평신도의 대응으로 보아야 하며 청빈사상의 고양을 가져왔다.
청빈사상의 고양 외에도 동정정절성적 절제성적 포기 등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독신 생활은 출신배경나이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생활 방식이었다. 독신생활은 깊은 내적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재산과 종족 번식에 주로 관심이 있던 사회로부터 사람들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카타리 파는 성에 대한 증오감에서 독신 생활을 제도화했다. 발도파는 절제와 도덕을 생활화했다. 프란치스코회는 독신 생활을 맹세하였다. 이단자와 탁발 설교가들은 세계의 임박한 종말과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영적 완벽의 상태에 도달할 필요성에 눈길을 두었다. 재산과 섹스의 거부는 사도의 지위에 이르려는 욕구의 강력한 표현이었다.
이와 함께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영적 권능에 보다 직접 접근하고자 하는 욕구였다. 많은 서민들은 더 이상 성직자를 신뢰하지 않았고, 교회 건물과 의례의 모든 치장을 군더더기로 보았으며, 그래서 신자들의 모임과 모든 신자의 사제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으로 접하기 위해 속어로 번역된 성경의 연구 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제도를 탐색하였다. 그러므로 중세 이단의 유형과 발전을 설명해주는 것은, 청빈과 금욕주의와 ‘사도적 삶’ 등에의 끊이지 않는 이끌림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동 및 소요에 관련되어 있는 특수한 상황이 결합되었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중세의 소외집단제프리 리처즈 著, 유희수조명동 譯, 1999, 느티나무
세계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논쟁정행업 著, 2000, 한국장로교출판사
기타 인터넷 참조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