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써 동원되는 문자 보급의 브나로드 운동을 연상하게 한다. 즉 농촌으로 어촌으로 학생극의 힘을 빌려서 연극으로서의 문화계몽의 브나로드 운동을 감행시켜보자는 것이다. 전 조선의 방방곡곡에 학생대를 잠입시킴으로써 연극으로서의 문화계몽운동을 지역적으로 넓혀보자는 것이다. (…인용자 생략…) 이상과 같은 연극으로서의 산병적인 계몽전을 나는 연극의 브나로드 운동이라고 부르거니와 이 방식으로 진행하면 전 조선은 일순(一瞬)에 연극이 표현되는 한 이념 속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그 이념은 횃불과 같이 타올라 전 조선의 농민과 어민은 같은 텍스트로써 한 문제를 생각하며 기쁠때는 물론 슬플 때도 한 제신(諸神)과 한 호흡 밑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 이같이 위대한 교화! 이같이 힘찬 제시운동이 어디 있으랴! 나는 이 브나로드 극의 기획이 결코 하나의 공상에 그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유치진, 東朗 柳致眞 全集7, 서울예대출판부, 1993, pp42~45.
(밑줄강조-인용자)
이와 같이 한국 연극사에서 선구자적 입지에 놓인 ‘유치진’이 연극이라는 표현양식을 통해 ‘브나로드운동’을 확산시켜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연극이 갖는 계몽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극장문화가 도시(경성)에 치중되어있어 정작 교화가 필요한 농민은 소외되어버린 현실의 문제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유치진은 ‘브나로드운동’의 효과를 더욱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경성이 아닌 농촌(어촌, 산촌)등으로 연극무대를 옮겨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직접적인 교화활동을 펼쳐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물론 앞서 살펴보았듯이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전개된 이 운동이 내재하고 있는 논리를 유치진이 얼마만큼 취사선택했는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운동이 모든 가난과 억압의 근본원인에 농민들의 무지에서 기인된다는 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농촌(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규정짓는 지식인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인의 의식은 그들이 이 운동을 직접 전개하기보다는 그 주체로 ‘학생’들을 선정해 놓음으로써 의식의 확산을 유발시킨다. 이에 대한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휴가나 여름방학에 귀성하는 중학 혹은 전문학교의 남녀 학생을 모집한 후 이 운동을 납득시키는 공작부터 시작한다.
② 이 운동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동지를 모은다.
③ 모인 동지의 수에 따라 각자의 고향을 중심으로 한 군 혹은 면 단위로 하여 지역적으로 구분된 대(隊)를 편성한다.
④ 대원 편성이 완성되면 한 곳에 모아놓고 준비된 극본의 연출부터 무대장치의상분장대소 도구 등 효과에 관한 일체 지식(각본 경비부터 개막하기까지의 제반 준비)을 1주일 이상 실제적으로 강습시킨다.
⑤ 상연 준비에 대한 기본 지식을 교수시킨 후 대원들을 일제히 산병적(散兵的)으로 헤쳐서 각각 자기의 고향으로 가게 한다.
⑥ 고향에 돌아가서 윗마을, 아랫마을 단 10호의 동리도 빼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농민에게 접하게 해야한다.(43~44쪽)
브나로드운동이 여름방학 기간에 귀향하는 학생을 이용해 문자 보급과 농민 계몽을 주요 활동으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활동에서도 기본 방식에 있어 유사성을 지닌다. 이렇게 지식인들이 의식적으로 ‘브나로드운동’이라는 제도를 바탕으로 제2의 지식인을 양성하고, 그 양성과정 속에서 ‘농촌(농민)은 계몽의 대상이다’라는 의식을 학습시킴으로써 사회에 파생시킬 효과는 상당히 크다. 당시 이 운동에 5.757명의 고등보통학교 및 전문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에 의해서 계몽된 민중의 수는 4년 간 98.598명에 달했을 정도라는 통계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수걸, 브나로드운동, 누가 왜 하였나,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역사비평사, 1993, p61 참조.)
특히 ‘연극’이 그 어떤 매체보다도 의미전달이 직접적이기에 가장 빠른 실효를 걷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연극을 통해 전달되는 ‘브나로드운동’의 의식이 갖는 파장효과는 더욱 크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인들의 교수활동이 활성화되어 가면 갈수록 ‘경성’과 ‘농촌(경성외의 지역)’은 ‘문명’과 ‘야만’이라는 잣대로 이분화 되며, 지식인과 농민(어민, 산민 등)의 관계 역시 계몽의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되는 잣대를 형성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이향(離鄕)을 경험한 학생들에게 ‘고향’이 곧 ‘계몽되어야 할 곳’이라는 인식의 틀을 형성하게 만든다.
3. 전형화 된 농촌 풍경의 무대화
앞서 살펴보았듯이, 1930년대에 정책적으로 실행된 ‘브나로드운동’은 ‘경성’ 중심으로 형성된 공연무대를 ‘농촌’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경성’ 중심으로 형성된 무대는 다양한 양상이 내포된 문화형성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농촌’으로 확장된 무대는 ‘계몽’이라는 일괄된 의식에서 비롯된다. 이는 연극인들이 ‘농촌극(‘농민극)’ 사회극은 작품의 소재와 작가의식의 지향점을 기준으로 하여 설정된 개념으로, 특정 시대 사회구조상의 공적쟁점이 되는 문제를 극화하여 사회여론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작가의도가 담겨있는 극예술 작품군을 가리킨다.(김재석, 일제강점기사회극연구, p10.)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까지 통용되지 않고 있는 ‘농민극’, ‘농촌극’이라는 연극의 범주는 광의의 의미 범주를 고려했을 때 사회극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30년대만 하더라도 농민문학과 맥을 같이 해 대부분 ‘농민극’으로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농민과 농촌의 관계가 실제적 의미에 있어서도 불가분의 관계인 만큼 현재에도 농민극과 농촌극이라는 연극 장르의 구분은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에 대한 주장이 주로 창작 목적과 그 의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제 농민극을 창시하자는데 대하야 우리 농민운동적 립장에서 본다면 한가지로써 두가지 역할을 의미한다고 볼수가 잇다 그것은 일반농민 대중에게 오락 아니 농부 평상에 무한일로 밤낮 일하는 사람에게 그보다도 여러방면으로 모든 압박과 각종시달림을 받는 농민에게 한때의 위안을 주는 의미에서 위선 농민문화운동도 되는 동시에 또한 다른 한편에 잇어서는 그것을 보는 동안에 재래의
(밑줄강조-인용자)
이와 같이 한국 연극사에서 선구자적 입지에 놓인 ‘유치진’이 연극이라는 표현양식을 통해 ‘브나로드운동’을 확산시켜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연극이 갖는 계몽의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극장문화가 도시(경성)에 치중되어있어 정작 교화가 필요한 농민은 소외되어버린 현실의 문제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유치진은 ‘브나로드운동’의 효과를 더욱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경성이 아닌 농촌(어촌, 산촌)등으로 연극무대를 옮겨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직접적인 교화활동을 펼쳐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물론 앞서 살펴보았듯이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전개된 이 운동이 내재하고 있는 논리를 유치진이 얼마만큼 취사선택했는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운동이 모든 가난과 억압의 근본원인에 농민들의 무지에서 기인된다는 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농촌(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규정짓는 지식인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인의 의식은 그들이 이 운동을 직접 전개하기보다는 그 주체로 ‘학생’들을 선정해 놓음으로써 의식의 확산을 유발시킨다. 이에 대한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휴가나 여름방학에 귀성하는 중학 혹은 전문학교의 남녀 학생을 모집한 후 이 운동을 납득시키는 공작부터 시작한다.
② 이 운동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동지를 모은다.
③ 모인 동지의 수에 따라 각자의 고향을 중심으로 한 군 혹은 면 단위로 하여 지역적으로 구분된 대(隊)를 편성한다.
④ 대원 편성이 완성되면 한 곳에 모아놓고 준비된 극본의 연출부터 무대장치의상분장대소 도구 등 효과에 관한 일체 지식(각본 경비부터 개막하기까지의 제반 준비)을 1주일 이상 실제적으로 강습시킨다.
⑤ 상연 준비에 대한 기본 지식을 교수시킨 후 대원들을 일제히 산병적(散兵的)으로 헤쳐서 각각 자기의 고향으로 가게 한다.
⑥ 고향에 돌아가서 윗마을, 아랫마을 단 10호의 동리도 빼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농민에게 접하게 해야한다.(43~44쪽)
브나로드운동이 여름방학 기간에 귀향하는 학생을 이용해 문자 보급과 농민 계몽을 주요 활동으로 삼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활동에서도 기본 방식에 있어 유사성을 지닌다. 이렇게 지식인들이 의식적으로 ‘브나로드운동’이라는 제도를 바탕으로 제2의 지식인을 양성하고, 그 양성과정 속에서 ‘농촌(농민)은 계몽의 대상이다’라는 의식을 학습시킴으로써 사회에 파생시킬 효과는 상당히 크다. 당시 이 운동에 5.757명의 고등보통학교 및 전문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에 의해서 계몽된 민중의 수는 4년 간 98.598명에 달했을 정도라는 통계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수걸, 브나로드운동, 누가 왜 하였나,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역사비평사, 1993, p61 참조.)
특히 ‘연극’이 그 어떤 매체보다도 의미전달이 직접적이기에 가장 빠른 실효를 걷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연극을 통해 전달되는 ‘브나로드운동’의 의식이 갖는 파장효과는 더욱 크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인들의 교수활동이 활성화되어 가면 갈수록 ‘경성’과 ‘농촌(경성외의 지역)’은 ‘문명’과 ‘야만’이라는 잣대로 이분화 되며, 지식인과 농민(어민, 산민 등)의 관계 역시 계몽의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되는 잣대를 형성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는 이향(離鄕)을 경험한 학생들에게 ‘고향’이 곧 ‘계몽되어야 할 곳’이라는 인식의 틀을 형성하게 만든다.
3. 전형화 된 농촌 풍경의 무대화
앞서 살펴보았듯이, 1930년대에 정책적으로 실행된 ‘브나로드운동’은 ‘경성’ 중심으로 형성된 공연무대를 ‘농촌’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경성’ 중심으로 형성된 무대는 다양한 양상이 내포된 문화형성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농촌’으로 확장된 무대는 ‘계몽’이라는 일괄된 의식에서 비롯된다. 이는 연극인들이 ‘농촌극(‘농민극)’ 사회극은 작품의 소재와 작가의식의 지향점을 기준으로 하여 설정된 개념으로, 특정 시대 사회구조상의 공적쟁점이 되는 문제를 극화하여 사회여론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작가의도가 담겨있는 극예술 작품군을 가리킨다.(김재석, 일제강점기사회극연구, p10.)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까지 통용되지 않고 있는 ‘농민극’, ‘농촌극’이라는 연극의 범주는 광의의 의미 범주를 고려했을 때 사회극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30년대만 하더라도 농민문학과 맥을 같이 해 대부분 ‘농민극’으로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농민과 농촌의 관계가 실제적 의미에 있어서도 불가분의 관계인 만큼 현재에도 농민극과 농촌극이라는 연극 장르의 구분은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에 대한 주장이 주로 창작 목적과 그 의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제 농민극을 창시하자는데 대하야 우리 농민운동적 립장에서 본다면 한가지로써 두가지 역할을 의미한다고 볼수가 잇다 그것은 일반농민 대중에게 오락 아니 농부 평상에 무한일로 밤낮 일하는 사람에게 그보다도 여러방면으로 모든 압박과 각종시달림을 받는 농민에게 한때의 위안을 주는 의미에서 위선 농민문화운동도 되는 동시에 또한 다른 한편에 잇어서는 그것을 보는 동안에 재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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