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2. 연합활동과 선교 정책
3. 선교의 갈등과 수난
4. 교회의 설립과 사회변화
Ⅲ. 결론
Ⅱ. 본론
1.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2. 연합활동과 선교 정책
3. 선교의 갈등과 수난
4. 교회의 설립과 사회변화
Ⅲ. 결론
본문내용
모집이 힘들었고, 초기에는 고아나 과부,첩과같은 소외계층으로 시작 되었다.
이러한 교육 선교는 선교사들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진행 되기도 하였다.
“나는 배재학당에서 영어공부를 여러해 하엿시되 예수교에는 투입함이 업고 재조만 배왔스니” 라는 어느 배재학당 출신의 관리의 자랑에서 선교사들의 의도인 “한국을 복음화 시키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하여 이것이 실패한 선교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교회는 물론 각종 계몽운동, 민족운동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요람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3)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선교사들이 정착하여선교 활동을 하기 이전 한국어로 성경이 번역, 발행 반포되어 한국인들에게 읽혀졌고, 상당수의 구도자들이 나타났다는 특징이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어학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신약성서 번역
그들은 일본, 만주에서 번역된 것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여 1885년 일본에서 출간된 이수정 번역 「신약마가젼복음셔언회」를 개정한 『마가의젼한복음셔언회』가 1887년 일본요코하마에서 출간 되었다. 1890년 『누가복음젼』『보라달로마인셔』를 서울의 미이미교회 인쇄소에서 발간하였다. 선교사들은 헬라어성경과 개정판 영어성경, 한국인 조사들은 대표자역본 한문성경을 저본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이 번역자회의 의견을 거친 성경은 ‘시험역본’이라 하고 이것을 3년간 사용하면서 ‘공인역본’으로 개정되었고, 1895년 『마태복음』『마가복음』『요한복음』『사도행전』이 시험역본으로 발행된 이후 신약의 단편성경들이 간행되어 1900년에는 신약전체가 한권으로 묶여 간행 되었다. 그 후 신약의 개정작업에 착수하여 1904년 1차 개정본이 간행되었고 1906년 비로소 공인역본 『신약전셔』가 발간 되었다.
◈ 구약성서 번역
1898년 유태계 미국성서공회 권서였던 피터스에 의해 시편의 절반 정도가 번역되어 『시편촬요』로 간행되었다. 본격적인 구약번역은 신약번역이 끝난 1900년에 시작 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잦은 이동과 많은 업무로 인하여 진척되지 못한다. 1907년 레널즈와 김정삼, 이승두 등 3인이 번역작업에만 집중하여 1910년 구약 전체를 번역하였다.
◈ 민중 중심의 성서번역
성서번역은 유식계층이 아닌 민중계층 중심이였다. 언더우드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 번역자가 일상 언어에 익숙해 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 목적에 부합되는 유능한 조력자를 얻으려 애썼고 그 결과 뛰어난 학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그렇게 됨으로 인해 번역자가 일반 민중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에는 유식층 문체를 습득하여 번역 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대다수 민중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만들어 낼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번역위원회는 고급 유식층 문체와 일반 대중 문체 사이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아주 무식한 사람들까지도 이해 할 수 있도록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식자층의 마음에도 들도록 깔끔하고 순수한 것을 추구 하였다.’
◈ 성서 번역의 평가
1. 무식한 계층도 이해할 수 있는 문체로 성서 번역하려 노력한 점이 높게 평가된다.
2. 한자 중심의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소외되었던 한글을 적극 수용하여 한글 문화의 창출에 공헌하였다.
◈ 찬송가
찬송가는 1892년 미감리회 선교사 존스와 로드와일러가 편집한 『찬미가』가 효시가 된다. 장로교는 1893년 언더우드 편집 『찬양가』가 발행되고 이는 서울 및 남부지방에서 사용되고, 1895년 리와 기포드 부인의 공편으로 간행된『찬셩시』는 서북지방에서 주로 사용 하다가 1902년 장로교공의회 결의에 따라 공인찬송가로 채택 되었다.
미국감리회에서는 1892년의 『찬미가』를 1895년 증보증판하여 사용하였고, 남감리회의 윤치호가 독자적으로 편집한 『찬미가』가 1905년에 출판되었고, 여기에는 애국가 등 충군애국적인 찬송가 세편이 수록 되었다.
이렇게 따로 사용되던 찬송가들이 1905년 재한복음주의선교회 통합공의회 조직과 함께 합동작업이 추진되어 1907년 장감 연합으로 『찬숑가』가 발행 되었다. 이는 1930년대 감리교가 『신정찬송가』, 장로교가 『신편 찬송가』를 별도로 사용하기 전 까지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함께 사용 하였다.
대한기독교회는 『복음찬미』(1899), 영국성공회는 『셩회숑가』(1903), 『천도찬사』(1904), 구세군이 『구셰군가』(1908), 성결교회의 전신인 동양선교회가 『복음가』(1911)
『부흥셩가』(1913)등을 별도로 발행 하였다.
◈ 정기간행물
정기간행물도 한글로 발행되나 교파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1897년 두 종류의 한글 신문이 간행된다. 감리회의 아펜젤러는 『죠션크리스도인회보』를 북장로회 언더우드는 『그리스도 신문』을 간행한다. 이 신문은 기독교 교리의 보급 뿐 아니라 “제 나라이 왕성하여 가는 것을 보고 제 자녀에게 제가 받은 학문 보다 나은 것을 주려”는 사회계몽에도 목적을 두고 있었다. 즉 이는 기독교 교리 + 서구의 문화와 문명을 소개하는 신문이였다.
기독교 잡지는 1900년 12월 『신학월보』가 효시가 된다. 미국감리회 선교사 존스는 인천에서 발행한 이 잡지를 통해 교회 소식과 교리를 함께 실음으로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외에도 많은 정기간행물과 단기 간행물들은 지속적으로 간행되었고, 이는 선교사들이 기독교 문서사업을 주도하면서 서양의 신학사조가 그를 통해 영향을 미치고, 한국의 기독교문화는 서구 지향적으로 흐를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2. 연합활동과 선교 정책
(1) 선교부간 연합활동
초기 한국에 전해진 선교에는 하나의 색을 가진 복음이 아니였다. 이는 각 교파적인 성격을 가진 선교사들이 들어와 자신들의 교파적 성격으로 선교사역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파송한 각 선교부의 지휘와 감독 아래 피선교지에서 협력하며 연합하여 서로 공존하길 원하였다. 그 결과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도 아래 선교사연합공의회와 선교지역부할 협정이 생겼다.
◈ 장로교 연합회
1889년, 데이비스에 의해 조직된 연합선교부공의회이라는 미국 북장로회와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가 선교부간의
이러한 교육 선교는 선교사들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진행 되기도 하였다.
“나는 배재학당에서 영어공부를 여러해 하엿시되 예수교에는 투입함이 업고 재조만 배왔스니” 라는 어느 배재학당 출신의 관리의 자랑에서 선교사들의 의도인 “한국을 복음화 시키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하여 이것이 실패한 선교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교회는 물론 각종 계몽운동, 민족운동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요람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3)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선교사들이 정착하여선교 활동을 하기 이전 한국어로 성경이 번역, 발행 반포되어 한국인들에게 읽혀졌고, 상당수의 구도자들이 나타났다는 특징이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어학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신약성서 번역
그들은 일본, 만주에서 번역된 것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여 1885년 일본에서 출간된 이수정 번역 「신약마가젼복음셔언회」를 개정한 『마가의젼한복음셔언회』가 1887년 일본요코하마에서 출간 되었다. 1890년 『누가복음젼』『보라달로마인셔』를 서울의 미이미교회 인쇄소에서 발간하였다. 선교사들은 헬라어성경과 개정판 영어성경, 한국인 조사들은 대표자역본 한문성경을 저본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이 번역자회의 의견을 거친 성경은 ‘시험역본’이라 하고 이것을 3년간 사용하면서 ‘공인역본’으로 개정되었고, 1895년 『마태복음』『마가복음』『요한복음』『사도행전』이 시험역본으로 발행된 이후 신약의 단편성경들이 간행되어 1900년에는 신약전체가 한권으로 묶여 간행 되었다. 그 후 신약의 개정작업에 착수하여 1904년 1차 개정본이 간행되었고 1906년 비로소 공인역본 『신약전셔』가 발간 되었다.
◈ 구약성서 번역
1898년 유태계 미국성서공회 권서였던 피터스에 의해 시편의 절반 정도가 번역되어 『시편촬요』로 간행되었다. 본격적인 구약번역은 신약번역이 끝난 1900년에 시작 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잦은 이동과 많은 업무로 인하여 진척되지 못한다. 1907년 레널즈와 김정삼, 이승두 등 3인이 번역작업에만 집중하여 1910년 구약 전체를 번역하였다.
◈ 민중 중심의 성서번역
성서번역은 유식계층이 아닌 민중계층 중심이였다. 언더우드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 번역자가 일상 언어에 익숙해 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 목적에 부합되는 유능한 조력자를 얻으려 애썼고 그 결과 뛰어난 학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그렇게 됨으로 인해 번역자가 일반 민중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에는 유식층 문체를 습득하여 번역 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대다수 민중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만들어 낼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번역위원회는 고급 유식층 문체와 일반 대중 문체 사이에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아주 무식한 사람들까지도 이해 할 수 있도록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식자층의 마음에도 들도록 깔끔하고 순수한 것을 추구 하였다.’
◈ 성서 번역의 평가
1. 무식한 계층도 이해할 수 있는 문체로 성서 번역하려 노력한 점이 높게 평가된다.
2. 한자 중심의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소외되었던 한글을 적극 수용하여 한글 문화의 창출에 공헌하였다.
◈ 찬송가
찬송가는 1892년 미감리회 선교사 존스와 로드와일러가 편집한 『찬미가』가 효시가 된다. 장로교는 1893년 언더우드 편집 『찬양가』가 발행되고 이는 서울 및 남부지방에서 사용되고, 1895년 리와 기포드 부인의 공편으로 간행된『찬셩시』는 서북지방에서 주로 사용 하다가 1902년 장로교공의회 결의에 따라 공인찬송가로 채택 되었다.
미국감리회에서는 1892년의 『찬미가』를 1895년 증보증판하여 사용하였고, 남감리회의 윤치호가 독자적으로 편집한 『찬미가』가 1905년에 출판되었고, 여기에는 애국가 등 충군애국적인 찬송가 세편이 수록 되었다.
이렇게 따로 사용되던 찬송가들이 1905년 재한복음주의선교회 통합공의회 조직과 함께 합동작업이 추진되어 1907년 장감 연합으로 『찬숑가』가 발행 되었다. 이는 1930년대 감리교가 『신정찬송가』, 장로교가 『신편 찬송가』를 별도로 사용하기 전 까지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함께 사용 하였다.
대한기독교회는 『복음찬미』(1899), 영국성공회는 『셩회숑가』(1903), 『천도찬사』(1904), 구세군이 『구셰군가』(1908), 성결교회의 전신인 동양선교회가 『복음가』(1911)
『부흥셩가』(1913)등을 별도로 발행 하였다.
◈ 정기간행물
정기간행물도 한글로 발행되나 교파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1897년 두 종류의 한글 신문이 간행된다. 감리회의 아펜젤러는 『죠션크리스도인회보』를 북장로회 언더우드는 『그리스도 신문』을 간행한다. 이 신문은 기독교 교리의 보급 뿐 아니라 “제 나라이 왕성하여 가는 것을 보고 제 자녀에게 제가 받은 학문 보다 나은 것을 주려”는 사회계몽에도 목적을 두고 있었다. 즉 이는 기독교 교리 + 서구의 문화와 문명을 소개하는 신문이였다.
기독교 잡지는 1900년 12월 『신학월보』가 효시가 된다. 미국감리회 선교사 존스는 인천에서 발행한 이 잡지를 통해 교회 소식과 교리를 함께 실음으로 초기 한국 교회의 신학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외에도 많은 정기간행물과 단기 간행물들은 지속적으로 간행되었고, 이는 선교사들이 기독교 문서사업을 주도하면서 서양의 신학사조가 그를 통해 영향을 미치고, 한국의 기독교문화는 서구 지향적으로 흐를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2. 연합활동과 선교 정책
(1) 선교부간 연합활동
초기 한국에 전해진 선교에는 하나의 색을 가진 복음이 아니였다. 이는 각 교파적인 성격을 가진 선교사들이 들어와 자신들의 교파적 성격으로 선교사역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파송한 각 선교부의 지휘와 감독 아래 피선교지에서 협력하며 연합하여 서로 공존하길 원하였다. 그 결과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도 아래 선교사연합공의회와 선교지역부할 협정이 생겼다.
◈ 장로교 연합회
1889년, 데이비스에 의해 조직된 연합선교부공의회이라는 미국 북장로회와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가 선교부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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