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회로서의 선교
(1) 교회와 선교
(2) 선교사상의 변화들
(3) "본질상 선교적“
(4) 하나님의 순례하는 백성
(5) 성례, 표적과 도구
(6) 교회와 세상
(7) 지역교회를 재발견하며
(8) 창조적인 긴장
2. 미시오데이로서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
3. 구원을 중재하는 것으로서의 선교
(1) 전통적인 구원 해석들
(2) 현대 패러다임의 구원
(3) 현대의 구원 이해 속에 있는 위기
(4) 포괄적인 구원을 향하여
4. 정의를 위한 추구로서의 선교
(1) 역사의 유산
(2) 정의와 사랑간의 긴장
(3) 두 명령
(4) 확신들의 수렴
6. 상황화로서의 선교
(1) 상황신학의 기원
(2) 인식론적인 단절
(3) 상황화의 모호성
7. 해방으로서의 선교
1)발전에서 해방으로
2)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편애
3)자유주의 신학과 해방신학
4)막스주의와의 연관
5)완전한 해방
8장 문화화로서의 선교
(1) 적응과 토착화의 변천
(2) 20세기의 발전들
(3) 문화화를 향하여
(4) 문화화의 한계들
(5) 상호 문화화
9. 공동의 증거로서의 선교
(1) 선교에서의 에큐메니칼 개념의 (재)발생
(2) 카톨릭, 선교와 교회일치주의
(3) 선교의 통일성
10. 하나님의 전체 백성들에 의한 사역으로서의 선교
(1)성직의 발전
(2)평신도의 사도직
(3)사역의 형태들
(1) 교회와 선교
(2) 선교사상의 변화들
(3) "본질상 선교적“
(4) 하나님의 순례하는 백성
(5) 성례, 표적과 도구
(6) 교회와 세상
(7) 지역교회를 재발견하며
(8) 창조적인 긴장
2. 미시오데이로서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
3. 구원을 중재하는 것으로서의 선교
(1) 전통적인 구원 해석들
(2) 현대 패러다임의 구원
(3) 현대의 구원 이해 속에 있는 위기
(4) 포괄적인 구원을 향하여
4. 정의를 위한 추구로서의 선교
(1) 역사의 유산
(2) 정의와 사랑간의 긴장
(3) 두 명령
(4) 확신들의 수렴
6. 상황화로서의 선교
(1) 상황신학의 기원
(2) 인식론적인 단절
(3) 상황화의 모호성
7. 해방으로서의 선교
1)발전에서 해방으로
2)가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편애
3)자유주의 신학과 해방신학
4)막스주의와의 연관
5)완전한 해방
8장 문화화로서의 선교
(1) 적응과 토착화의 변천
(2) 20세기의 발전들
(3) 문화화를 향하여
(4) 문화화의 한계들
(5) 상호 문화화
9. 공동의 증거로서의 선교
(1) 선교에서의 에큐메니칼 개념의 (재)발생
(2) 카톨릭, 선교와 교회일치주의
(3) 선교의 통일성
10. 하나님의 전체 백성들에 의한 사역으로서의 선교
(1)성직의 발전
(2)평신도의 사도직
(3)사역의 형태들
본문내용
백성들에게는 이 땅에 고정된 집이 없으며 그것은 세상의 종말을 향해 영원히 건축되고 있는 중이다. 교회는 여기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모습을 나타내도록 부름 받는다. 교회는 자신의 임시성을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미래를 향하여 순례하는 것이다.
(5) 성례, 표적과 도구
현대 교회론에서 교회는 점점 더 성례, 표적과 도구로써 인식된다. 이 새로운 용어는 제2 바티칸 공의회가 촉매가 되었으며 교회를 일종의 성례-즉 하나님과의 교제와 모든 사람들의 통일성의 표적과 도구로 불렀다.(LG) 또한 “교회는 한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건설하지만 세상 속에서 이 나라의 표적과 도구로서 건설되고 있다”(1975년 로마 교황청의 권고문) 라고 언급되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1968년 WCC웁살라 총회에서 “교회는 담대하게 인류의 장래를 통합하는 표적으로서 나타내야 한다”라고 작성되며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고전적 표현은 “타자를 위한 교회”라는 문구였다. 이 표현의 고안자 본훼퍼는 “교회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교회는 지배가 아닌 도움과 섬김의 차원에서 일상적인 삶의 세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순더마이어는 그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인본주의적이고 부르조아적 분위기이며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독으로 선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며, “선 존재”의 이 돕는자 증후군은 참된 공존의 가능성을 위험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타자를 위한 교회” 대신에 “타자와 함께 하는 교회”를 말해야 한다고 한다. 케제만 역시 그 용어를 경솔하고 대화를 조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교회를 표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유일한 표적은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반대의견을 수용하며 이 용어를 우리가 사용하기 위하여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1) 교회는 표적이나 표적일 뿐 하나님 사랑의 신비는 이 표적을 통해서 타 표현되지 않고 멀리서 조망된다고 하며 (2)“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인류의 다가오는 통일성의 표적이나 “성례”가 되기를 시도할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3) “성례”와 같은 말들은 교회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속성이 아니며 (4) 어떤 의미에서 이 용어들은 사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전적 동일시를 피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에서 자신을 성례, 표적이나 구원의 도구로 언급하려 할 때에 교회는 자신을 본 받아야 할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은 “우리에게로 오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를 따릅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6) 교회와 세상
성례와 표적 그리고 도구로서의 교회 이해는 교회와 세상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가져왔다. 수세기 동안 교회에 대한 정적인 이해가 유행했고, 교회 밖 세력은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교회 밖에는 잘못된 교회만이 있었고 외부인들은 기껏해야 구원되어야 할 대상들이었다.
그러나 느리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바르트는 이것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선지직 교리의 회복으로 본다. 이 변화는 교회 밖의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간의 불가분리의 연합에 대한 카톨릭과 개신교 견해들의 일치를 보여준다.
그 새로운 견해들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1)첫째로 그것은 교회가 선교의 근거로서 간주될 수 없다면 교회는 또한 선교의 목표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2)둘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3) 셋째로 교회의 선교사역은 사람들을 사후를 위한 대기의 방편으로 교회 안으로 불러모으는 것 이상을 시사하며 교회는 세상을 위한 공동체 이다. (4) 넷째로 교회는 영적으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거처”로, 세상과 미래로 향해 가는 성령의 움직임으로 간주될 수 있다. (5) 다섯째, 교회가 세상 참여에서 손을 떼려고 시도하고 교회의 구조들이 세상에 적절한 봉사를 주는 가능성을 가로막는다면 그러한 구조들은 이단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교회의 삶과 사역은 밀접하게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적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 (6)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본질적 관계 때문에 교회는 결코 두려운 경계병으로 기능할 수 없고, 오히려 항상 좋은 물결을 가져오는 자로 역할할 수 있다.
(7) 지역교회를 재발견하며
선교하는 교회는 주로 세상 모든 곳의 지역교회이다 라는 관점은 어떤 지역교회도 다른 지역교회에 대하여 권익있는 위치에 서 있지 않아야 한다는 제안과 함께 신약에 근본적인 것이지만 교회사에서는 상당기간 무시되었었다. 카톨릭에서 교회는 교황 중심적이 되었고 개신교도 어린교회들은 계속해서 무시받고 어른 교회나 선교기관의 지혜와 경험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롤랑알렌은 바울의 선교방법과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이 견해에 공격을 가하며 바울은 “교회들”을 세운데 반해, 우리들은 의존적인 조직의 의미에서 “선교회들”을 세운 것이라 했다. 또한 바울이 그 사람들을 신뢰한 것이 성공 요인이었고 이러한 점이 현대 선교사와 바울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한다.
개신교 선교의 변화는 IMC 예루살렘과 탐바람 회의들에서 어린교회들을 동등자로 인정하며 시작되었고 1958년 가나회의 에서는 어른교회들과 어린교회들간의 구분이 더 이상 유익하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타자를 위한 교회는 느리게 타자와 함께 하는 교회로 전화되고 있었고 선교는 서양에서 제3세계로의 일방통행이 아닌 것이 되었고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가 선교상황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카톨릭 선교의 변화는 더 극적인데 그들에게 지역교회들은 어디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교회는 로마교회를 닮아야 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의 결과 지역교회가 발견되었고, 제 3세계 주교들이 주교회의를 통해 영향을 끼치며 점차 보편교회는 실제로 지역교회들 속에 존재한다는 발전을 가져왔다. 이 새로운 현실과 깨달음에 따라 카톨릭 교회는 이우스 코미시오니스를 폐기했다. 외국의 선교단들과 협회들이 더 이상 제3세계에서 복음의 방식을 지도할 수 없다. 전세계가 선교현장이며 이제 파송교회와 받음 교회간의 구분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이
(5) 성례, 표적과 도구
현대 교회론에서 교회는 점점 더 성례, 표적과 도구로써 인식된다. 이 새로운 용어는 제2 바티칸 공의회가 촉매가 되었으며 교회를 일종의 성례-즉 하나님과의 교제와 모든 사람들의 통일성의 표적과 도구로 불렀다.(LG) 또한 “교회는 한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건설하지만 세상 속에서 이 나라의 표적과 도구로서 건설되고 있다”(1975년 로마 교황청의 권고문) 라고 언급되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1968년 WCC웁살라 총회에서 “교회는 담대하게 인류의 장래를 통합하는 표적으로서 나타내야 한다”라고 작성되며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고전적 표현은 “타자를 위한 교회”라는 문구였다. 이 표현의 고안자 본훼퍼는 “교회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교회는 지배가 아닌 도움과 섬김의 차원에서 일상적인 삶의 세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순더마이어는 그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인본주의적이고 부르조아적 분위기이며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독으로 선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며, “선 존재”의 이 돕는자 증후군은 참된 공존의 가능성을 위험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는 “타자를 위한 교회” 대신에 “타자와 함께 하는 교회”를 말해야 한다고 한다. 케제만 역시 그 용어를 경솔하고 대화를 조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교회를 표적이라고 부르는 것도 유일한 표적은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반대의견을 수용하며 이 용어를 우리가 사용하기 위하여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1) 교회는 표적이나 표적일 뿐 하나님 사랑의 신비는 이 표적을 통해서 타 표현되지 않고 멀리서 조망된다고 하며 (2)“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인류의 다가오는 통일성의 표적이나 “성례”가 되기를 시도할 수 있다고 한다. 나아가 (3) “성례”와 같은 말들은 교회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속성이 아니며 (4) 어떤 의미에서 이 용어들은 사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전적 동일시를 피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에서 자신을 성례, 표적이나 구원의 도구로 언급하려 할 때에 교회는 자신을 본 받아야 할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은 “우리에게로 오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를 따릅시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6) 교회와 세상
성례와 표적 그리고 도구로서의 교회 이해는 교회와 세상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가져왔다. 수세기 동안 교회에 대한 정적인 이해가 유행했고, 교회 밖 세력은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교회 밖에는 잘못된 교회만이 있었고 외부인들은 기껏해야 구원되어야 할 대상들이었다.
그러나 느리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바르트는 이것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선지직 교리의 회복으로 본다. 이 변화는 교회 밖의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간의 불가분리의 연합에 대한 카톨릭과 개신교 견해들의 일치를 보여준다.
그 새로운 견해들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1)첫째로 그것은 교회가 선교의 근거로서 간주될 수 없다면 교회는 또한 선교의 목표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2)둘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3) 셋째로 교회의 선교사역은 사람들을 사후를 위한 대기의 방편으로 교회 안으로 불러모으는 것 이상을 시사하며 교회는 세상을 위한 공동체 이다. (4) 넷째로 교회는 영적으로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거처”로, 세상과 미래로 향해 가는 성령의 움직임으로 간주될 수 있다. (5) 다섯째, 교회가 세상 참여에서 손을 떼려고 시도하고 교회의 구조들이 세상에 적절한 봉사를 주는 가능성을 가로막는다면 그러한 구조들은 이단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교회의 삶과 사역은 밀접하게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적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 (6) 마지막으로 세상과의 본질적 관계 때문에 교회는 결코 두려운 경계병으로 기능할 수 없고, 오히려 항상 좋은 물결을 가져오는 자로 역할할 수 있다.
(7) 지역교회를 재발견하며
선교하는 교회는 주로 세상 모든 곳의 지역교회이다 라는 관점은 어떤 지역교회도 다른 지역교회에 대하여 권익있는 위치에 서 있지 않아야 한다는 제안과 함께 신약에 근본적인 것이지만 교회사에서는 상당기간 무시되었었다. 카톨릭에서 교회는 교황 중심적이 되었고 개신교도 어린교회들은 계속해서 무시받고 어른 교회나 선교기관의 지혜와 경험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롤랑알렌은 바울의 선교방법과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이 견해에 공격을 가하며 바울은 “교회들”을 세운데 반해, 우리들은 의존적인 조직의 의미에서 “선교회들”을 세운 것이라 했다. 또한 바울이 그 사람들을 신뢰한 것이 성공 요인이었고 이러한 점이 현대 선교사와 바울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한다.
개신교 선교의 변화는 IMC 예루살렘과 탐바람 회의들에서 어린교회들을 동등자로 인정하며 시작되었고 1958년 가나회의 에서는 어른교회들과 어린교회들간의 구분이 더 이상 유익하지 않다고 결론내렸다. 타자를 위한 교회는 느리게 타자와 함께 하는 교회로 전화되고 있었고 선교는 서양에서 제3세계로의 일방통행이 아닌 것이 되었고 모든 지역의 모든 교회가 선교상황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카톨릭 선교의 변화는 더 극적인데 그들에게 지역교회들은 어디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교회는 로마교회를 닮아야 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의 결과 지역교회가 발견되었고, 제 3세계 주교들이 주교회의를 통해 영향을 끼치며 점차 보편교회는 실제로 지역교회들 속에 존재한다는 발전을 가져왔다. 이 새로운 현실과 깨달음에 따라 카톨릭 교회는 이우스 코미시오니스를 폐기했다. 외국의 선교단들과 협회들이 더 이상 제3세계에서 복음의 방식을 지도할 수 없다. 전세계가 선교현장이며 이제 파송교회와 받음 교회간의 구분은 불필요한 것이 되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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