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스트와 연계하여 반파쇼운동을 전개하였고, 1931년 7월에는 흑기노동자연맹, 극동노동조합, 조선자유노동자조합, 동흥노동자조합과 함께 인쇄물을 살포하고 연설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중국침략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강화와 직접행동에 의한 계속되는 검거로 인하여 아나키스트 세력은 신장되지 못하고 결국 1936년 3월 25일 흑우연맹은 해산되고 말았다.
4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조선자유노동자조합과 조선동흥노동동맹)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일본 내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자 재동경 조선인 아나키스트들도 공산주의자와 함께 1922년부터 노동자진회, 흑운노동회, 자유노동동맹, 조선노동동맹회 등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거기에 별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1922년 경부터 노동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들도 1920년대 중반부터는 아나키스트 운동의 저변학대를 위하여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 2월말 흑풍회 사무실에서 오우영장상중 등에 의해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이 결성되었다. 조산자유노동자조합은 창립된 이후 수실 연구회를 개최하였고, 일본인 아나키스트의 전국적 노동단체에 가맹하여 일본인 아나키스트와의 조직적 연계 하에서 피압박 계급의 해방을 방해하는 조선인 반동단체인 상애회(친일노동단체)와 평화협회의 박멸을 도모하였다.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민족해방이라는 목적도 포기하지 않았다. 즉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부르주아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는 한편, 공산주의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정치운동노선 등 공산주의 이론과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방침을 비판하면서 아나키스트운동만이 진정한 민족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각종 기념일을 맞이하여 인쇄물을 작성반포하는 등 아나키스트 사상의 선전활동을 전개하면서 대 공산주의 투쟁을 병행하였다. 나아가 동흥노동동맹회극동노동조합과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공산주의계 노동조합 사무소와 공산주의자의 아지트를 습격하였다.
이처럼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의 활동방향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도모하는 것이기보다는 노동자들 사이에 아나키즘을 널리 선전하는 것이었고, 노동자 대중단체라기보다는 사상단체의 성격이 농후하였다. 따라서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노동자 대중을 조직화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대중활동을 전개하기보다는 소수에 의한 직접행동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었고, 아나키스트 세력의 신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 대중을 조직화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흐름이 있었다. 동흥노동동맹회는 사상단체적 활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노동자 대중이 있는 노동현장을 중요시하였으며, 노동현장에서의 경제적 직접행동을 추구하는 아나코생디칼리슴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동흥노동동맹회는 민족주의계공산주의계융화친목계 등의 한국인 혹인 일본인과의 항쟁 등 일상투쟁과 노동쟁의 지원투쟁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실례로는 1930년 1월의 상애회 간부 습격 사건, 1931년 3월 관동자유노동자조합원과의 충돌사건, 1932년 북부원 상애회 사무소 습격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상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도 직접행동에 호소하여 사건을 해결하고자 함으로써, 이들의 일상투쟁은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량을 소진시키는 소모전에 불과하였다. 동흥노동동맹회는 생디칼리슴적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으므로 경제적 직접행동에 의한 투쟁을 전개하였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나 그러한 사례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료의 제약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나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 노동 단체가 일정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공장 노동자가 아닌 자유 노동자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것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공장노동자가 아닌 자유노동자의 경우 파업 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으며, 따라서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의 노동운동은 주로 노동쟁의에 대한 지원이나 응원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례로는 1934년 닛카츠 닛코 쟁의 지원투쟁과 1934년 9월 도쿄시전 종업원의 총파업에 대한 응원 투쟁 등이 있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조선자유노동자조합과 동흥노동동맹회가 사상 차이로 인하여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그것은
4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조선자유노동자조합과 조선동흥노동동맹)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일본 내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자 재동경 조선인 아나키스트들도 공산주의자와 함께 1922년부터 노동자진회, 흑운노동회, 자유노동동맹, 조선노동동맹회 등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거기에 별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1922년 경부터 노동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재일 조선인 아나키스트들도 1920년대 중반부터는 아나키스트 운동의 저변학대를 위하여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27년 2월말 흑풍회 사무실에서 오우영장상중 등에 의해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이 결성되었다. 조산자유노동자조합은 창립된 이후 수실 연구회를 개최하였고, 일본인 아나키스트의 전국적 노동단체에 가맹하여 일본인 아나키스트와의 조직적 연계 하에서 피압박 계급의 해방을 방해하는 조선인 반동단체인 상애회(친일노동단체)와 평화협회의 박멸을 도모하였다.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민족해방이라는 목적도 포기하지 않았다. 즉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부르주아 사회의 병폐를 지적하는 한편, 공산주의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정치운동노선 등 공산주의 이론과 재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방침을 비판하면서 아나키스트운동만이 진정한 민족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각종 기념일을 맞이하여 인쇄물을 작성반포하는 등 아나키스트 사상의 선전활동을 전개하면서 대 공산주의 투쟁을 병행하였다. 나아가 동흥노동동맹회극동노동조합과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공산주의계 노동조합 사무소와 공산주의자의 아지트를 습격하였다.
이처럼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의 활동방향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도모하는 것이기보다는 노동자들 사이에 아나키즘을 널리 선전하는 것이었고, 노동자 대중단체라기보다는 사상단체의 성격이 농후하였다. 따라서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은 노동자 대중을 조직화하고 거기에 근거해서 대중활동을 전개하기보다는 소수에 의한 직접행동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었고, 아나키스트 세력의 신장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자 대중을 조직화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흐름이 있었다. 동흥노동동맹회는 사상단체적 활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노동자 대중이 있는 노동현장을 중요시하였으며, 노동현장에서의 경제적 직접행동을 추구하는 아나코생디칼리슴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동흥노동동맹회는 민족주의계공산주의계융화친목계 등의 한국인 혹인 일본인과의 항쟁 등 일상투쟁과 노동쟁의 지원투쟁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실례로는 1930년 1월의 상애회 간부 습격 사건, 1931년 3월 관동자유노동자조합원과의 충돌사건, 1932년 북부원 상애회 사무소 습격사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상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도 직접행동에 호소하여 사건을 해결하고자 함으로써, 이들의 일상투쟁은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량을 소진시키는 소모전에 불과하였다. 동흥노동동맹회는 생디칼리슴적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으므로 경제적 직접행동에 의한 투쟁을 전개하였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나 그러한 사례는 보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사료의 제약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나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 노동 단체가 일정한 직장을 가지고 있는 공장 노동자가 아닌 자유 노동자를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것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공장노동자가 아닌 자유노동자의 경우 파업 투쟁을 전개한다는 것은 용이하지 않으며, 따라서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의 노동운동은 주로 노동쟁의에 대한 지원이나 응원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례로는 1934년 닛카츠 닛코 쟁의 지원투쟁과 1934년 9월 도쿄시전 종업원의 총파업에 대한 응원 투쟁 등이 있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조선자유노동자조합과 동흥노동동맹회가 사상 차이로 인하여 서로 대립하게 되었고,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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