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한 오류로 지적될 수 있다. 이러한 오류들은 30년대 초반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이 중반 이후부터 일제에 의해 분쇄되고 농민조합 운동이 전과 같은 활동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③ 농민운동의 잠복기(1930년대 말과 1945년 해방 전)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탄압에 의해 각지의 혁명적 농민조합들은 거의 각개격파 당했으며, 항상적으로 발생했던 대규모의 대지주폭동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일제는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 한다는 전략 아래 더욱 더 폭력적인 수단으로 조선 내의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농민조합들은 조직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가운데 급격히 그 힘을 소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는 만주 일대의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변경 부근의 함경도 지방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이끌기도 하였다.
3. 농민운동의 평가
이상에서 1920년대 시기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일제시기 농민운동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글의 초점을 사회주의 운동에 맞춰서 살펴보다보니 동 시기의 민족주의 농민운동에 대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협소해지고 말았다. 또한 일제의 다양한 침략정책을 초기의 토지조사 사업과 산미증식계획에만 한정해버린 결과 일제 시기 농민운동의 다양한 흐름과 수탈과 그에 대한 저항의 골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결과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일제시기 농민운동을 바라보는데 있어 기층 농민대중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주적으로 참여한 운동이 본래적 의미의 민족해방운동의 본질이 아닐까하는 문제제기로 이 글을 시작하고 끝을 맺으려 했다. 민족주의 운동은 일제의 유화정책에 맞춰 농민들의 참여를 이끌고 일정한 세를 이룬 것은 마땅히 평가 받을 만하지만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에 그 이념적 원칙적인 내용을 가지지 못한 채 30년대 말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의 길을 걷게 됨으로써 운동으로써의 의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운동 과정 중에서 농촌, 농민의 근본적인 문제인 토지문제에 대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위치, 지주 혹은 지주 출신이라는 한계로 방기하고 계몽적인 활동으로 실력양성을 목표로 삼은 결과 농민의 자주적인 힘을 이끌어내지 못한 점은 해방 이후의 열린 공간에서 미군정에 협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토지혁명을 저버리면서 또 한 번 반민족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이 글에서 농민운동의 주 흐름으로 사회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형태의 농민조합운동 또한 시대에 따라 우경주의적이거나 그와 반대로 좌경적으로 흘러가면서 여러 가지 오류를 보였다. 그러나 1930년에 본격적으로 제기된 반제반봉건의 기치, 농촌에서 토지혁명을 제창하고 농민의 근본적인 토지문제를 민족해방운동의 과제로 내세웠다는 데 그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토지혁명을 구호로 내걸고 농민들을 조직하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반제반일의 목표 아래 노동자, 농민 등의 기층 대중들을 하나의 동일한 목적을 가진 반일 세력으로 묶으려했던 다양한 시도는 상대적으로 이들의 활동을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3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에게 혁명적 농민조합 조직들이 각개 격파 당하고 거의 궤멸되지만 만주와 국경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이들의 활동은 이어지고 또한 해방 이후 1945년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산하에 13개의 도연맹, 188 개의 군단위 농민조합, 1,745개의 지부, 330만의 조합원을 거느리는 조직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제 시기 농민조합운도의 흐름은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맺음말
간략하게 농민운동만 평가해 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문제점이 남는다. 일제 시기 사회주의적 이념들이 노동자농민운동을 조직하는 속에서 나타난 문제들이 그 대표적이다. 즉 맑스레닌주의가 주도적인 농민조합운동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그것을 얼마만큼 창조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적용했는지 여부이다. 또한 공통적으로 이 시기 노동자농민운동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 또한 많은 투쟁에서 대중들을 효율적으로 이끌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우경적으로 한편으로는 좌경적으로 흘러가는 속에서 좀 더 효과적으로 일제에 대항할 수 있었던 투쟁들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코민테른 등의 지침이나 혹은 지시들이 얼마만큼의 적실성이 있었는지 여부도 당시 사회주의적 이념 중심의 노동자농민 운동에 대한 의문으로 남는다.
예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자본주의적 속성이 일제를 통해 강제로 유입되어 근대적 형태의 노동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하나 그 수준이 일본 등과 결코 갖지 못했다. 대다수의 광범위한 대중들이 여전히 전근대적 반봉건제 상황 아래 억압과 착취받고 있었으나 많은 맑스레닌주의적 운동들이 기계적으로 식민지 조선을 이해하는 경향이 심했다. 또한 이런 운동 자생적 발전에서 비롯됐다고는 하나 코민테른 등과 같은 국제공산주의 기구의 결정에 크게 의존하고 기구의 결정을 창조적이고 현실에 맞게 실천에 옮기는 과정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기 노동자농민운동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들이 피착취의 대상으로만 여겨진 것이 아니라 저항하고 일제와 많은 반봉건적 세력에 맞서 투쟁한 것은 억압과 착취는 스스로가 저항하고 일어설 때 이겨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주의적 노동자농민운동의 과정에서 드러난 우편향가 좌편향의 오류들은 현대의 한국 사회의 다양한 형태의 운동과 활동에 깊이 새겨볼 역사적 과제들이기도 하다.
※ 참고도서
1. 한국 근대 농촌사회와 농민운동. 장시원 외. 열음사. 1988년
2. 한국사회운동의 새로운 인식1(일제시기 - 미군정기). 안병욱 엮음. 대동. 1992년
3. 일제식민지시대의 민족운동. 박현채 . 한길역사총서. 1988
4.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교수의 현대사 강의. 강만길. 창작과 비평사. 1999년
5. 한국노동운동사 ②일제하의 노동운동 1920-1945 김경일 외.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2004년
6. 일제시대 재일 한국인 노동자계급의 상태와 투쟁. 전기호. 지식산업사. 2003년
③ 농민운동의 잠복기(1930년대 말과 1945년 해방 전)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탄압에 의해 각지의 혁명적 농민조합들은 거의 각개격파 당했으며, 항상적으로 발생했던 대규모의 대지주폭동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일제는 대륙 침략을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 한다는 전략 아래 더욱 더 폭력적인 수단으로 조선 내의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농민조합들은 조직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가운데 급격히 그 힘을 소진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는 만주 일대의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변경 부근의 함경도 지방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이끌기도 하였다.
3. 농민운동의 평가
이상에서 1920년대 시기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일제시기 농민운동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글의 초점을 사회주의 운동에 맞춰서 살펴보다보니 동 시기의 민족주의 농민운동에 대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협소해지고 말았다. 또한 일제의 다양한 침략정책을 초기의 토지조사 사업과 산미증식계획에만 한정해버린 결과 일제 시기 농민운동의 다양한 흐름과 수탈과 그에 대한 저항의 골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결과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일제시기 농민운동을 바라보는데 있어 기층 농민대중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주적으로 참여한 운동이 본래적 의미의 민족해방운동의 본질이 아닐까하는 문제제기로 이 글을 시작하고 끝을 맺으려 했다. 민족주의 운동은 일제의 유화정책에 맞춰 농민들의 참여를 이끌고 일정한 세를 이룬 것은 마땅히 평가 받을 만하지만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에 그 이념적 원칙적인 내용을 가지지 못한 채 30년대 말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의 길을 걷게 됨으로써 운동으로써의 의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또한 운동 과정 중에서 농촌, 농민의 근본적인 문제인 토지문제에 대해 그들 자신의 계급적 위치, 지주 혹은 지주 출신이라는 한계로 방기하고 계몽적인 활동으로 실력양성을 목표로 삼은 결과 농민의 자주적인 힘을 이끌어내지 못한 점은 해방 이후의 열린 공간에서 미군정에 협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토지혁명을 저버리면서 또 한 번 반민족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이 글에서 농민운동의 주 흐름으로 사회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형태의 농민조합운동 또한 시대에 따라 우경주의적이거나 그와 반대로 좌경적으로 흘러가면서 여러 가지 오류를 보였다. 그러나 1930년에 본격적으로 제기된 반제반봉건의 기치, 농촌에서 토지혁명을 제창하고 농민의 근본적인 토지문제를 민족해방운동의 과제로 내세웠다는 데 그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토지혁명을 구호로 내걸고 농민들을 조직하는 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반제반일의 목표 아래 노동자, 농민 등의 기층 대중들을 하나의 동일한 목적을 가진 반일 세력으로 묶으려했던 다양한 시도는 상대적으로 이들의 활동을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3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에게 혁명적 농민조합 조직들이 각개 격파 당하고 거의 궤멸되지만 만주와 국경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항일무장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이들의 활동은 이어지고 또한 해방 이후 1945년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산하에 13개의 도연맹, 188 개의 군단위 농민조합, 1,745개의 지부, 330만의 조합원을 거느리는 조직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제 시기 농민조합운도의 흐름은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맺음말
간략하게 농민운동만 평가해 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문제점이 남는다. 일제 시기 사회주의적 이념들이 노동자농민운동을 조직하는 속에서 나타난 문제들이 그 대표적이다. 즉 맑스레닌주의가 주도적인 농민조합운동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그것을 얼마만큼 창조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적용했는지 여부이다. 또한 공통적으로 이 시기 노동자농민운동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 또한 많은 투쟁에서 대중들을 효율적으로 이끌지 못한다. 한편으로는 우경적으로 한편으로는 좌경적으로 흘러가는 속에서 좀 더 효과적으로 일제에 대항할 수 있었던 투쟁들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코민테른 등의 지침이나 혹은 지시들이 얼마만큼의 적실성이 있었는지 여부도 당시 사회주의적 이념 중심의 노동자농민 운동에 대한 의문으로 남는다.
예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자본주의적 속성이 일제를 통해 강제로 유입되어 근대적 형태의 노동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하나 그 수준이 일본 등과 결코 갖지 못했다. 대다수의 광범위한 대중들이 여전히 전근대적 반봉건제 상황 아래 억압과 착취받고 있었으나 많은 맑스레닌주의적 운동들이 기계적으로 식민지 조선을 이해하는 경향이 심했다. 또한 이런 운동 자생적 발전에서 비롯됐다고는 하나 코민테른 등과 같은 국제공산주의 기구의 결정에 크게 의존하고 기구의 결정을 창조적이고 현실에 맞게 실천에 옮기는 과정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시기 노동자농민운동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들이 피착취의 대상으로만 여겨진 것이 아니라 저항하고 일제와 많은 반봉건적 세력에 맞서 투쟁한 것은 억압과 착취는 스스로가 저항하고 일어설 때 이겨낼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주의적 노동자농민운동의 과정에서 드러난 우편향가 좌편향의 오류들은 현대의 한국 사회의 다양한 형태의 운동과 활동에 깊이 새겨볼 역사적 과제들이기도 하다.
※ 참고도서
1. 한국 근대 농촌사회와 농민운동. 장시원 외. 열음사. 1988년
2. 한국사회운동의 새로운 인식1(일제시기 - 미군정기). 안병욱 엮음. 대동. 1992년
3. 일제식민지시대의 민족운동. 박현채 . 한길역사총서. 1988
4.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교수의 현대사 강의. 강만길. 창작과 비평사. 1999년
5. 한국노동운동사 ②일제하의 노동운동 1920-1945 김경일 외.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2004년
6. 일제시대 재일 한국인 노동자계급의 상태와 투쟁. 전기호. 지식산업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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