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삶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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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지용의 삶과 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Ⅱ. 정지용의 생애……………………………………………………………………1

 1. 성장 및 가족관계
 2. 휘문고보와《요람》동인시절
 3. 일본 동지사대학 시절
 4. 휘문고보 교사와 문단활동시절
 5. 해방 이후의 행적

Ⅲ. 정지용 시의 변모양상

 1. 초기시 - 동시 및 고향 상실 의식과 바다의 상징성………………………3
  (1) 동시 및 민요풍의 시와 고향 상실 의식
  2) 바다의 상징성
 2. 중기시 - 신앙시와 종교적 극복의 한계……………………………………8
 3. 후기시 - 산으로 본 동양정신의 세계………………………………………9
  (1) 동양정신의 세계와 민족적 상징성
  (2) 자연과의 합일의식

Ⅳ. 정지용의 문학사적 의의 ……………………………………………………12

Ⅴ. 결론 ………………………………………………………………………………13

본문내용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몇 년 지속되지 못하고 자연히 해체된다.
정지용의 첫 시집에 대한 반응이 좋았던 만큼 그는 문단에서 점점 대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고, 1930년대의 시단을 주도하면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1939년 2월 《문장》지가 창간되자 그는 시 부문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되고, 훗날 ‘청록파’의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을 발굴한다.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정지용은 두 번째 시집 『백록담』(1941. 9)을 《문장》지를 통해 출간한다. 정지용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사 등에서 지원을 받아 국토순례를 하고 기행문을 쓴 일이 있었는데, 시집 『백록담』에 실린 시들은 그러한 여행 과정에서 보고 느낀 것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5. 해방 이후의 행적
1945년 정지용은 815해방과 함께 그동안 근무했던 학교를 그만두고 이화여전 교수로 취임해 한국어와 영시,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지만, 1946년 경향신문의 창간과 함께 주간으로 취임해 일 년 후 이화여전을 그만두게 된다.
정지용은 해방 후 거의 시를 쓰지 않았다. 정지용이 해방 이후 1950년 납북될 때까지 남긴 시는 <애국의 노래>, <그대들 돌아오시니>, <곡마전>, <늙은 범>, <네 몸매>, <꽃분>, <山달>, <나비> 모두 8편이 전부이다.
당시 좌우익 대립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과 정지용 자신도 이화여전, 경향신문으로 직장을 옮겨가며 글을 쓸 여유가 없던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상황과 민족에 대한 자신의 입장부터 정리해야한다는 문제가 절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고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정지용은 정치보위부에 체포된 뒤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납북되어 평양의 어느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 인민군과 함께 처형되었다는 이야기 등 소문만 무성하게 떠돌았다. 북한 측의 이야기에 따르면 1950년 9월 25일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고 전하지만 역시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석우, 『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평전』, 푸른사상, 2006, pp.112~113.
이것이 분단의 비극과 함께한 천재 시인의 최후였다.
Ⅲ. 정지용의 시의 변모 양상
1. 초기시 - 동시 및 고향 상실 의식과 바다의 상징성
1920년대는 일본 자본이 유입됨에 따라 민족자본이 몰락하고, 산미증산계획에 따른 농촌지배가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도시노동자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 운동 등 다양한 대중운동이 전개되었다. 문단에서는 다양한 잡지가 작품과 평론의 수용과 전달에 큰 몫을 담당하면서 문학작품의 생산이 활발해졌다. 또한 한국문학은 식민지 현실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경제적 착취에 의한 궁핍한 현실의 모습이 문학 작품들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이상진 외, 『한국근대작가론』, 한국방송통신대출판부, 2008, p.7.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정지용은 식민지 상황과 함께 근대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고뇌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작품으로 나타내었고, 그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문물을 ‘바다’로 형상화시켰다.
(1) 동시 및 민요풍의 시와 고향 상실 의식
흔히 정지용의 초기시를 언급할 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그의 유년시절의 그리움과 고향 상실의식일 것이다. 지용은 유년 시절의 그리움을 동시 및 민요풍의 시들로 표현하였고 ‘고향’과 관련된 시들에는 고향 상실 의식을 담았다.
먼저 동시 및 민요풍의 시를 살펴보겠다. 지용은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유학을 하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유년기의 동심과 조화시켜 민요풍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엄격하게 시의 기본 운율을 적용하고 한편으로는 규칙에 다양한 변형을 더해가면서 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연습해나간다. 김신정, 「정지용 시 연구 - ‘감각’의 의미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1998, p.22.
동시는 율격에서 노래와 비슷하기 때문에 반복적인 리듬이 필요하다. 비교와 대조, 반복되는 율격은 아이들의 순진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내용에서는 누나, 오빠, 어머니, 할아버지 등 가족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를 통해서 그의 남다른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한다.
우리 오빠 가신 곳은
해님 지는 서해건너
멀리 멀리 가셨다네.
웬일인가 저 하늘이
피ㅅ빛 보담 무섭구나!
난리 났나. 불이 났나.
- 정지용, <지은 해>
어저께도 홍시하나.
오늘에도 홍시하나.
까마귀야. 까마귀야.
우리 남게 왜 앉었나.
우리 오빠 오시걸랑. 맛뵐라구 남겨 뒀다.
후락 딱 딱 훠이 훠이!
- 정지용, <홍시>
서쪽 하늘에 지는 노을을 보면서 떠나간 오빠를 걱정하는 누이의 심정을 노래한 <지는 해>와 오빠에게 주려고 감나무에 남겨놓은 홍시 하나를 까마귀가 먹을까봐 걱정하는 누이의 심정을 노래한 <홍시>는 오빠가 있었던 과거와 오빠가 가고 없는 현재가 대립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또한 <지는 해>에서 “저 하늘이 피ㅅ빛 보담 무섭구나! 날리 났나. 불이 났나.”와 <홍시>에서 “후락 딱 딱 훠이 훠이!”에서 보면 아이의 눈으로 본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 김신정, 『정지용의 문학세계연구』, 깊은샘, 2001, p.135.
다음으로 지용의 고향 상실 의식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지용이 ‘고향’과 관련된 시를 많이 썼던 이유에는 자신의 일본 유학 경험에서 비롯된다. 지용은 1918년 휘문고보에 입학하면서부터 1929년 일본 동지사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타향, 타국 생활을 했다. 이는 지용이 고향을 늘 그리워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지용에게 고향은 일제 식민지 시대라는 상황과 맞물리게 되는데, 그가 일본에서 겪은 외로움과 나라를 잃은 슬픔이 <카페프란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자.
이 놈의 머리는 빗두른 능금
또 한놈의 심장은 벌레 먹은 장미
제비처럼 젖은 놈이 뛰어간다.
「오오 패롤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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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22
  • 저작시기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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