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1) 정지용 시 연구
2) 정지용 시의 이름짓기
3) 정지용 시의 시적 고도
4) 살아있는 정지용
3. 결론
* 참고자료
2. 본론
1) 정지용 시 연구
2) 정지용 시의 이름짓기
3) 정지용 시의 시적 고도
4) 살아있는 정지용
3. 결론
* 참고자료
본문내용
이른 바 시가 언어에 의하여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이 작품처럼 실천하고 있는 경우도 드물다. 말하자면, 구태어 빗대어 논할진댄, 이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실천문학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만일 이 시를 이른봄의 풍경 한 귀퉁이를 단순하게 스케치한 것으로 독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미술시간의 색맹과도 다를 게 없는 몽매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에 나타난, 아니, 나타나지 않게 숨기고 있는, 춘설이 내린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의식은 참으로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으며 그만큼 묘하고도 깊다.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라는 말이 언뜻 내비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외경과, 지금 시인 앞에 펼쳐진 모든 시간과 공간을 ‘나’의 ‘이마’에 순간적으로 강하게 접촉시키면서 깨닫는 각성의 정신적 이미지는, 공연히 허황하게 입방아나 찧으며 시 비슷한 주변에서 웅성대는 자들은 평생 이해 못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또 <꽃 피기 전 철아닌 눈에 /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를 보아도 이미 시인은 자연과 단순히 마주보는 인간의 얼굴과는 단절된 상태이다. 즉 자연의 섭리를 배반하고 악착의 관습으로 물든 인간의 형태를 벗어버리고 자연의 일부, 아니, 원래의 자연 바로 그것이 되어버리고 싶은 희구를 토로하고 있다. 춘설이 먼 산에 내렸지만 상쾌한 봄바람에 나부끼는 옷고름도 향기롭다. 이 시는 안과 밖을 변별하는 공간적인 금 긋기의 전망이 아니라 솜옷을 벗고 먼 산에 내린 춘설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시간의 동일화를 꿈꾸는 작품이다. 솜옷을 벗고 또다시 추운 겨울의 시공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을 노출하지만 가고 싶은 겨울은 혹독한 추위가 아니라 만물이 소생하는 꽃샘추위와도 같은 것이다.
<옹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를 보면 우리 민족의 춥고도 추운 계절을 살면서도 이토록 절대절명의 봄을 꿈꾼 시인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추운 계절을 견딘 불굴의 시혼을 대하는 것 같아서 숙연한 마음을 금하지 못 하겠다.
4) 살아있는 정지용
정지용은 아직 살아있다. 지용시에는 아직도 완전히 독해되지 않은 채 그냥 지레짐작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지용시는 시대가 바뀌어도 늘 새롭게 읽히는 작품들이 많은지도 모른다. 시인의 造語나 방언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판과 교정의 오자와 탈자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오독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鄕愁만 해도 그렇다. ‘해설피’나 ‘얼룩백이 황소’ 그리고 ‘서리 까마귀’ 같은 말은 아직도 학계나 평단에서 그 올바른 뜻이 완전히 공인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얼룩백이 황소’는 황소가 얼룩백이일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이것은 우리나라의 토종 소라고 할 수 있는 칡소를 말한 것 같고, ‘서리 까마귀’는 무리지어 나는 까마귀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그렇게 되면 ‘초라한 지붕’ 아래 도란도란거리며 이야기하는 시 속의 등장인물들과 조화되지 않는 어떤 불길하고 시끄러운 정황이 된다. 물론 봄이라는 시에 ‘외 ㅅ 가마귀’라는 말도 나온다. 또 霜鳥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서리병아리’(서리 내릴 무렵 깐 병아리)란 말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서리 까마귀’도 같은 문맥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리 내릴 무렵이면 새의 먹이가 되는 곤충도 없으니까 미처 덜 자란 어린 까마귀가 어미를 따라 날면서 보채며 우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람쥐 꼬리/숯이 짙다(비로봉)>는 다람쥐의 꼬리인지 다람쥐꼬리라는 식물인지도 더 생각해야 한다.
지용시에는 <외로운 황홀한 심사>와 같은 모순적인 말도 빈번히 나오고 있어서 앞으로도 면밀한 독해를 거쳐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말은 시적 전망의 틀을 고정시키지 않고, 마치 망원경의 초점과 거리를 조절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같은 대상을 보지만 그것이 크게 보이기도 하고 또 작게 보이기도 하는 것과 같다. 지용의 시의식은 이처럼 역동적이다.
탈자와 오자의 예를 한 두 개 들어보기로 한다. 엽서에 쓴 글의 4행 <-대수롭지도 않은 산목숨과도 같이>로 되어있고 8행은 <-스럽지도 않은 이야기와도 같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8행의 첫 음절이 탈자된 예이며, 붉은 손의 <검은 버선에 흰 볼을 받아 신고>는 ‘볼’이 해진 버선 바닥에 덧대어 깊는 헝겊 조각임을 생각할 때 <박아신고>의 오자이며 꽃과 벗의 <駱駝털 케트에 / 구기인채 /벗은 이내 나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에 나타난, 아니, 나타나지 않게 숨기고 있는, 춘설이 내린 시간과 공간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의식은 참으로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으며 그만큼 묘하고도 깊다.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라는 말이 언뜻 내비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외경과, 지금 시인 앞에 펼쳐진 모든 시간과 공간을 ‘나’의 ‘이마’에 순간적으로 강하게 접촉시키면서 깨닫는 각성의 정신적 이미지는, 공연히 허황하게 입방아나 찧으며 시 비슷한 주변에서 웅성대는 자들은 평생 이해 못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또 <꽃 피기 전 철아닌 눈에 /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를 보아도 이미 시인은 자연과 단순히 마주보는 인간의 얼굴과는 단절된 상태이다. 즉 자연의 섭리를 배반하고 악착의 관습으로 물든 인간의 형태를 벗어버리고 자연의 일부, 아니, 원래의 자연 바로 그것이 되어버리고 싶은 희구를 토로하고 있다. 춘설이 먼 산에 내렸지만 상쾌한 봄바람에 나부끼는 옷고름도 향기롭다. 이 시는 안과 밖을 변별하는 공간적인 금 긋기의 전망이 아니라 솜옷을 벗고 먼 산에 내린 춘설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시간의 동일화를 꿈꾸는 작품이다. 솜옷을 벗고 또다시 추운 겨울의 시공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을 노출하지만 가고 싶은 겨울은 혹독한 추위가 아니라 만물이 소생하는 꽃샘추위와도 같은 것이다.
<옹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를 보면 우리 민족의 춥고도 추운 계절을 살면서도 이토록 절대절명의 봄을 꿈꾼 시인이 있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추운 계절을 견딘 불굴의 시혼을 대하는 것 같아서 숙연한 마음을 금하지 못 하겠다.
4) 살아있는 정지용
정지용은 아직 살아있다. 지용시에는 아직도 완전히 독해되지 않은 채 그냥 지레짐작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지용시는 시대가 바뀌어도 늘 새롭게 읽히는 작품들이 많은지도 모른다. 시인의 造語나 방언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판과 교정의 오자와 탈자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오독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널리 알려진 鄕愁만 해도 그렇다. ‘해설피’나 ‘얼룩백이 황소’ 그리고 ‘서리 까마귀’ 같은 말은 아직도 학계나 평단에서 그 올바른 뜻이 완전히 공인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얼룩백이 황소’는 황소가 얼룩백이일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이것은 우리나라의 토종 소라고 할 수 있는 칡소를 말한 것 같고, ‘서리 까마귀’는 무리지어 나는 까마귀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그렇게 되면 ‘초라한 지붕’ 아래 도란도란거리며 이야기하는 시 속의 등장인물들과 조화되지 않는 어떤 불길하고 시끄러운 정황이 된다. 물론 봄이라는 시에 ‘외 ㅅ 가마귀’라는 말도 나온다. 또 霜鳥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서리병아리’(서리 내릴 무렵 깐 병아리)란 말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서리 까마귀’도 같은 문맥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리 내릴 무렵이면 새의 먹이가 되는 곤충도 없으니까 미처 덜 자란 어린 까마귀가 어미를 따라 날면서 보채며 우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람쥐 꼬리/숯이 짙다(비로봉)>는 다람쥐의 꼬리인지 다람쥐꼬리라는 식물인지도 더 생각해야 한다.
지용시에는 <외로운 황홀한 심사>와 같은 모순적인 말도 빈번히 나오고 있어서 앞으로도 면밀한 독해를 거쳐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말은 시적 전망의 틀을 고정시키지 않고, 마치 망원경의 초점과 거리를 조절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같은 대상을 보지만 그것이 크게 보이기도 하고 또 작게 보이기도 하는 것과 같다. 지용의 시의식은 이처럼 역동적이다.
탈자와 오자의 예를 한 두 개 들어보기로 한다. 엽서에 쓴 글의 4행 <-대수롭지도 않은 산목숨과도 같이>로 되어있고 8행은 <-스럽지도 않은 이야기와도 같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8행의 첫 음절이 탈자된 예이며, 붉은 손의 <검은 버선에 흰 볼을 받아 신고>는 ‘볼’이 해진 버선 바닥에 덧대어 깊는 헝겊 조각임을 생각할 때 <박아신고>의 오자이며 꽃과 벗의 <駱駝털 케트에 / 구기인채 /벗은 이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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