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조경사과제] 택리지(擇里志) 요약 정리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동양조경사과제] 택리지(擇里志) 요약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택리지란?

2. 이중환에 대하여..

3. 택리지의 저술동기와 배경

4. 택리지의 구성과 주요내용
 1) 사민 총론
 2) 팔도 총론
  ① 평안도
  ② 함경도
  ③ 황해도
  ④ 강원도
  ⑤ 경상도
  ⑥ 전라도
  ⑦ 충청도
  ⑧ 경기
 3) 복거 총론
  ① 지리
  ② 생리
  ③ 인심
  ④ 산수
 4) 총론

본문내용

함경도
평안도의 동쪽을 백두산의 대맥이 남하하면서 하늘을 가르는 것 같이 높은 영(嶺)이 되었다. 이 영의 동쪽이 바로 함경도이다. 옛날 옥저의 땅으로, 남쪽은 철령(鐵嶺)이 한계가 되고 동북쪽은 두만강(豆滿江)이 한계가 된다. 본도의 남북의 길이는 이천리가 넘고 바다와 가깝고 동서로는 불과 백리다. 주몽의 점거지가 되었다가 여진인들이 살았으나 윤관(尹瓘)으로 하여금 여진인을 몰아내고 강의 이북으로 육백리에 있는 선춘령을 경계로 삼게되었다. 이후 육진(六鎭)에 병영을 두어 백두산의 동남에 있던 여진의 근거지를 모두 우리의 판도에 두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의 강희제는 목극등으로 하여금 백두산에 올라 국경을 나누게 하였다.(백두산 정계비-토문강의 위치가 분쟁의 여지로 작용하게 된다.) 함흥이북으로는 산천이 험악하고 풍속이 굳세고 사납고 토지가 차고 메말라 곡식이라고는 오직 조와 보리 뿐 이고 메벼가 적고 면화가 전혀 없다. 원주민들의 성질이 마치 여진인과 같아 개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어 추위를 견딘다. 산에서 얻어지는 담비와 인삼으로 상인과의 교역으로 옷감을 얻는다. 바닷가의 생산은 풍족하나 황해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함흥읍은 문학을 숭상하고 등과를 하는 자도 있었다. 또 평야가 먼 데까지 펼쳐져 있으나 바다에 인접하여 거칠고 평양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함흥에는 태조가 살던 집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아들 태종이 사자를 보내어 모시어 오려 했으나 태조의 심지를 수이(易)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사자 박순(朴淳)의 죽음으로 태조가 마음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안변과의 서북경계로 원산이 있는데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았다한다. 동북은 해로로 육진에 통하며 육진 및 여러 읍에는 상선이 모여들어 도회를 이룬다. 조정에서는 여기에 곡식창고를 짓고 흉년이 되면 풀어서 백성을 구제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은 조선건립이후 삼백 년 간 관리의 배출이 극히 드물었다. 대각에 오르는 이가 있다 하여도 극소수였다. 태조가 왕씨의 왕위를 대신하였던 만큼 그 좌명 공신도 또한 서북도의 맹장이 많았다. 이미 나라를 얻은 다음에는 \"서북인은 크게 쓰지 말라\" 하였다. 이곳의 풍토가 척박하고 성질이 드세어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아니한 관계로 평안도와 함경도는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
황해도
황해도는 경기도와 평안도의 사이에 위치한다. 백두산의 남맥이 함흥부의 서북에 이르러 검문령(檢門嶺)이 되고, 다시 남하하여 노인치(老人峙)가 된다. 여기서 다시 남하하여 삼방치(三方峙)를 지나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일어 철령이 되고, 다른 하나는 서남행 하여 곡산을 지나 학령(鶴嶺)이 된다. 여기서 다시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송악이 되고 이는 고려의 서울이 된다. 두 번째는 면악인데 이는 단군의 옛 서울이다. 셋 째는 곡산과 수안을 지나 자비령(慈悲嶺)과 절령( 嶺)이 되고 서쪽으로 황주 극성에서 그친다. 황주는 절령의 북쪽에 위치하며 평안도와 경계를 이루게 된다. 수안·곡산·신계·토산 등은 산속에 위치하여 주민이 불순하고 도적이 많이 출몰한다. 평산과 금천에는 등과한 이가 제법 된다.
서쪽 면악의 동록에는 화천동(花川洞)이 있다. 화천동은 청인(淸人)의 조묘지(祖墓地)라 한다. 여기는 평야가 널리 퍼져 있고 토지가 부유해 번창한 촌락이 많고 사대부도 나왔다. 극성의 평야는 동서로 넓이가 십여리이고 서쪽은 남오리강(南五里江) 하류에서 그친다. 강의 동서로 있는 촌락들은 토지가 대단히 비옥해서 오곡과 목화에 적당하다. 그리고 연철(鉛鐵)이 생산된다. 장산곶은 솔밭(松田)을 만들어 비상시의 궁전의 건축·배·수레 등의 제조에 이용되도록 준비하였다. 장산곶 북쪽 금사사(金沙寺)의 바닷가는 모래의 빛이 고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곳은 복어·해삼·성게가 나지만 토지는 메마르다. 다만 풍천과 은율은 비옥하여 수확량이 대단하다. 해주는 이율곡이 사당을 지어 학문을 강의하여 이 지역의 학문이 발달하지만 후에는 당파가 조직되어 악향(惡鄕)이라 불리며 주목된다. 해주의 동으로는 평야가 있고 경치가 빼어나다. 산과 바다의 사이에 있어서 납·철·면화·생선·소금의 이익이 있어 일부 부유한 사람이 많으나 사대부는 적다. 황해도는 옥야와 아름다운 평야가 있으나 천하의 다툼을 유발할 수 있는 요충의 땅이 될 터이니 이것이 본도의 단점이라 하겠다.
강원도
강원도는 함경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고 서북은 황해도와 이웃하고 서남은 경기·충청의 두 도와 인접한다. 영동에는 과거 예국의 서울인 강릉과 삼척, 울진이 있다. 본도의 남북의 길이는 천리에 이르나 동서로는 백리에 미치지 못한다. 척량산맥으로 이미 서북을 막고 동남은 멀리 바다와 통한다. 지세는 옹색하고 큰산 아래에 위치하나 산과 평야가 모두 낮고 평평하고 아름답다. 동해는 조수가 없고 맑아서 벽해(碧海)라고 부른다. 동해는 이름난 호수와 바위가 많아 경물이 전국에서 첫째이다. 관동팔경이라 부르는 여덟 가지 경치가 아름답다. 산과 바다의 사이에는 기승지가 많고 골짜기 등에는 그윽하고 물이 맑다. 사람들은 경치를 거닐고 유희를 즐겨 학문을 하는 이가 적다. 하지만 강릉에서는 급제자가 많다. 농업은 수확이 부족하다. 삼척이 유일하게 생산이 뛰어나다.
토지가 메마르지만 어업과 전업으로 부자가 많다. 촌민들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한다. 영월에는 사육신의 묘지가 모셔져있다. 회양에서 정선사이의 강은 서로 흘러 한강으로 이른다. 산의 경치는 좋으나 오래 있을 곳은 아니다. 춘천은 인계의 서쪽에 위치하며 한양까지는 서남으로 이백리다. 과거 맥국의 서울로 소양강을 끼고 있다. 원주는 영월의 서쪽에 있으며 산골짜기의 고원분지가 열려있어서 맑고 깨끗하며 험준하지가 않다. 또 영동과 서울의 사이에 있어 동해의 어염과 인삼, 관락, 궁전의 재목을 운수하여 도회가 되었다. 북쪽의 횡성은 산골짜기가 있어 산이 평평하고 물이 맑다. 충주강의 하류는 오대산의 서쪽에서 적악산맥이 끊기고 강 외의 산이 막혀있어 자리가 좋다. 이는 서울로 통하고 주상으로 부자가 많고 사대부가 많은 곳이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예맥의 땅을 본거지로 일어나고 왕을 자처하였으나 잔학하여 후에 태조에게
  • 가격12,6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13.10.28
  • 저작시기2013.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846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