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통일 정책의 의의
2. 역대정부의 통일정책
3. 총평가
2. 역대정부의 통일정책
3. 총평가
본문내용
남북 적십자 회담을 통해 네 차례에 걸친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행사를 통해 4,400여명의 가족이 상봉하는 업적을 이루어 냈다.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 문화예술, 체육, 관광,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교류협력이 이루어졌는데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협력은 남북 주민들 간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2002년 6월 북한의 도발로 서해교전사건이 발생하여 남북공동합의사항 이행과 북한에 대한 신뢰문제가 제기되었고 북한 측의 유감표명으로 대화와 교류 사업은 재개되었다. 또한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확인됨으로써 남북관계가 냉기류를 맞기도 하였으나 김대중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에 견주어 볼 때 통일정책을 가장 활발하게 추진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② 정책 평가 및 효과성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정책에 대한 명확한 정책이념을 구사했다고 할 수 있었다. 즉 재야시절부터의 명백한 통일관을 기초로 하여 통일정책을 내세웠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역대 정부와 대조적인 것으로 “선평화 후통일”읠 원칙이라 할 수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 개최는 김대중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햇볕정책’의 연속선상에서 북한에게 큰 신뢰를 얻어 나타난 결과이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한민족의 공동발전을 위해 적대와 반목의 시대를 마감하고 화해와 공존의 시대를 열기 위한 핵심적 만남인 남북 정상회담은 그런 의미에서 분단된 20세기를 극복하고 21세기를 통일 한국을 성취하는 가교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정상회담은 통일문제의 민족 내부적 해결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은 김대중 정부의 일관된 대북포용정책에 의한 가시적 성과라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그 자체적인 의미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갖고 있단 ‘3단계 통일론’을 토대로 무력도발의 불허용, 흡수통일의 불수용, 화해, 협력의 불가피 등 집권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대북포용정책을 실현해 나왔다. 이의 연속선에서 2000년 3월 9일 ‘베를린 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대내외에 선언하였다. ‘베를린 선언’에서 제시된 4대 과제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실질적 사안으로서 북한에게 남북대화의 장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가시적 성과가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6· 15남북 정상회담의 개최는 남북간 상호이익과 상호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 온 대북 포용정책의 실행에 따른 성과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은 김일성의 사망이후 김정일 정권이 한국정부의 기피정책 gkp서 대내외적· 공식적으로 한국의 최고지도자인 김대중 대통령을 대화의 파트너로 처음 인정했다는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앞서도 언급 했듯이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 문화예술, 체육, 관광,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교류협력이 이루어 졌는데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협력은 남북 주민들간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 독점과 성과에 대한 지나친 집착 및 조급증으로 인해 포용정책의 성과가 오히려 퇴색되어진 측면 또한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다. 그리고 지나치게 유인 중심적인 접근으로 인해 일대일 대북 군사억지력의 약화와 무분별한 대북지원 및 경협에 따라 파생된 부메랑 효과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즉 현 정부의 다소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통일정책을 지나치게 대북편향식 접근과 경제적 유인책의 의존으로 인해 대북 군사억지력의 확보에 미흡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총 평가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1970년대 전반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북한을 국가수준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통일의 주체로서 대화의 상대로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1960년대는 경제적으로 북한에게 열세 였고 정치적으로도 어수선한 분위기 였기 때문에 북한과 대화를 하거나 화해의 제스쳐를 보낼수는 없었다.
1960년대 통일정책의 가장 큰 기조는 ‘선건설 후통일’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의 통일에 전력하기전에 남한의 경제력을 일정정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통일농의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따라서 60년대에는 민간인들이나 민간단체들의 평화통일에 대한 논의는 금기시 되었으며 통일에 대한 모든 사항은 정부가 독점적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통일논의 독점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이나 사회저명인사들을 중심으로 각양각색의 통일정책이 제시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제안들에 대해서 양면적 대응책 즉, 일면 강경대응, 일면 신중수렴의 조치를 취했다.
1960년대는 통일에 대하 논의보다는 경제력발전에 우선을 두는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통일논의가 활발하지 못했다.
반면에 1970년대 들어서서는 초반부터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제 1기 남북대화의 시대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1970년대에는 많은 남북대화들이 추진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조절위원회, 남북체육회담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남북대화들이다.
비록 발전적인 형태로 나아가지는 못했더라도 이 당시의 많은 남북대화들은 남과 북의 관계를 일정정도 화해의 길로 인도했음은 사실이다.
1960년대 철저히 북한을 배척하던 박정희대통령은 국제화해분위기속에서 북과의 화해를 추진했고, 평화통일 기반조성을 위한 구상을 제시한 ‘8· 15선언’이라든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6· 23선언)등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언들이 비록 실천적인 면에서 커다란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정부의 통일정책이 상당히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1970년대 초반의 활발한 남북대화도 결국은 서로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한채 남과 북은 다시 대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남과북의 화해분위기는 그 뒤를 이어 들어선 정부의 통일정책에 발전적인 영향을 미쳤고, 2000년 6월에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어 내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 문화예술, 체육, 관광,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교류협력이 이루어졌는데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협력은 남북 주민들 간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2002년 6월 북한의 도발로 서해교전사건이 발생하여 남북공동합의사항 이행과 북한에 대한 신뢰문제가 제기되었고 북한 측의 유감표명으로 대화와 교류 사업은 재개되었다. 또한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확인됨으로써 남북관계가 냉기류를 맞기도 하였으나 김대중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에 견주어 볼 때 통일정책을 가장 활발하게 추진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② 정책 평가 및 효과성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정책에 대한 명확한 정책이념을 구사했다고 할 수 있었다. 즉 재야시절부터의 명백한 통일관을 기초로 하여 통일정책을 내세웠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역대 정부와 대조적인 것으로 “선평화 후통일”읠 원칙이라 할 수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 개최는 김대중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햇볕정책’의 연속선상에서 북한에게 큰 신뢰를 얻어 나타난 결과이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한민족의 공동발전을 위해 적대와 반목의 시대를 마감하고 화해와 공존의 시대를 열기 위한 핵심적 만남인 남북 정상회담은 그런 의미에서 분단된 20세기를 극복하고 21세기를 통일 한국을 성취하는 가교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정상회담은 통일문제의 민족 내부적 해결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은 김대중 정부의 일관된 대북포용정책에 의한 가시적 성과라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그 자체적인 의미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갖고 있단 ‘3단계 통일론’을 토대로 무력도발의 불허용, 흡수통일의 불수용, 화해, 협력의 불가피 등 집권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대북포용정책을 실현해 나왔다. 이의 연속선에서 2000년 3월 9일 ‘베를린 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대내외에 선언하였다. ‘베를린 선언’에서 제시된 4대 과제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한 실질적 사안으로서 북한에게 남북대화의 장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가시적 성과가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6· 15남북 정상회담의 개최는 남북간 상호이익과 상호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 온 대북 포용정책의 실행에 따른 성과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남북정상회담은 김일성의 사망이후 김정일 정권이 한국정부의 기피정책 gkp서 대내외적· 공식적으로 한국의 최고지도자인 김대중 대통령을 대화의 파트너로 처음 인정했다는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
앞서도 언급 했듯이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 문화예술, 체육, 관광,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교류협력이 이루어 졌는데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협력은 남북 주민들간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고 민족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 독점과 성과에 대한 지나친 집착 및 조급증으로 인해 포용정책의 성과가 오히려 퇴색되어진 측면 또한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다. 그리고 지나치게 유인 중심적인 접근으로 인해 일대일 대북 군사억지력의 약화와 무분별한 대북지원 및 경협에 따라 파생된 부메랑 효과의 문제점을 들 수 있다. 즉 현 정부의 다소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통일정책을 지나치게 대북편향식 접근과 경제적 유인책의 의존으로 인해 대북 군사억지력의 확보에 미흡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총 평가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1970년대 전반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북한을 국가수준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통일의 주체로서 대화의 상대로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1960년대는 경제적으로 북한에게 열세 였고 정치적으로도 어수선한 분위기 였기 때문에 북한과 대화를 하거나 화해의 제스쳐를 보낼수는 없었다.
1960년대 통일정책의 가장 큰 기조는 ‘선건설 후통일’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의 통일에 전력하기전에 남한의 경제력을 일정정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한과의 통일농의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따라서 60년대에는 민간인들이나 민간단체들의 평화통일에 대한 논의는 금기시 되었으며 통일에 대한 모든 사항은 정부가 독점적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통일논의 독점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이나 사회저명인사들을 중심으로 각양각색의 통일정책이 제시되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제안들에 대해서 양면적 대응책 즉, 일면 강경대응, 일면 신중수렴의 조치를 취했다.
1960년대는 통일에 대하 논의보다는 경제력발전에 우선을 두는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통일논의가 활발하지 못했다.
반면에 1970년대 들어서서는 초반부터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제 1기 남북대화의 시대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1970년대에는 많은 남북대화들이 추진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조절위원회, 남북체육회담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남북대화들이다.
비록 발전적인 형태로 나아가지는 못했더라도 이 당시의 많은 남북대화들은 남과 북의 관계를 일정정도 화해의 길로 인도했음은 사실이다.
1960년대 철저히 북한을 배척하던 박정희대통령은 국제화해분위기속에서 북과의 화해를 추진했고, 평화통일 기반조성을 위한 구상을 제시한 ‘8· 15선언’이라든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6· 23선언)등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언들이 비록 실천적인 면에서 커다란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정부의 통일정책이 상당히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1970년대 초반의 활발한 남북대화도 결국은 서로의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한채 남과 북은 다시 대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남과북의 화해분위기는 그 뒤를 이어 들어선 정부의 통일정책에 발전적인 영향을 미쳤고, 2000년 6월에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어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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