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도망쳤으나, 다른 지휘관인 파울루스는 전사했으며 중앙을 지휘하던 세르빌리우스와 독재관 미누키우스도 전사하고 기타 80여 명의 원로원의원도 전사했다.
당시 원로원은 최대일 때도 3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4명 중에 1명 이상이 전사한 것이었다. 반면 카르타고군의 피해는 6,000명 정도였고, 그 대부분은 중앙의 에스파냐-갈리아 병사들이었다. 이 전투는 로마 측에게 인적손실로는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었다.
전후영향
이 전투 후 로마는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지구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였다.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두 명의 집정관이 공격대상을 시칠리아와 에스파냐등 카르타고 주변으로 변경하여 바깥에서의 붕괴를 노렸다.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카르타고해군을 위협해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한니발에 대한 보급을 끊었다. 그리고 전력의 재편성과 더불어 칸나에 패전의 원인이었던 기병육성에 노력하여 훗날 자마 전투에서 승리를 얻게 되었다. 또한 기병의 조달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동맹국의 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한니발은 이 승리로 인해 로마 동맹도시가 배반하기를 기대했으나, 동맹도시의 약속은 그대로 지켜져 충분한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적지에서 보급에 대한 어려움을 겪던 한니발은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비옥하고 카르타고 본국과도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이탈리아 남부로 공격방향을 바꾸었다
칸나에 전투당시 사용한 전술
칸나에 전투당시 한니발은 로마의 주력 부대를 포위 섬멸하였는데, 이는 포위섬멸전의 교과서적 예라 할 수 있어서 모든 사관학교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전투이기도 하다. 로마의 집정관 바로는 우세한 병력을 살려 주력인 중장보병으로 적 주력을 분쇄하는 교과서적 진형을 펼쳤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군 보병을 상대로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경보병과 주력인 중장보병으로 정면에서 지연전을 펼치면서 적 주력을 끌어들이고 동시에 우세한 기병대를 이용하여 로마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기병을 빠른 시간 안에 물리치는 전술을 구상하였다. 예상대로 로마군 기병의 2배를 넘는 강력한 좌익 기병이 로마군 우익 기병을 분쇄하고, 대등한 수효였던 우익 기병도 로마군 좌익 기병을 부수는 사이 정면의 용병대와 중장보병이 로마군 보병 주력을 효과적으로 잡아두게 되었다. 양익으로 펼쳐진 용병대를 패주의 신호로 읽고 예비인 트리아리까지 투입한 로마군에 대해, 단지 양쪽으로 기동했을 뿐인 경보병부대와, 로마군 기병을 분쇄한 좌우익 기병대로 구성된 포위진을 형성한 카르타고군은 애초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위섬멸전을 통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후 경과
다만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전쟁의지를 꺾지 못했기 때문에, 한니발은 이후에도 이탈리아 반도를 계속 돌아다니며 로마의 동맹국을 괴롭혔다. 로마의 동맹국들을 카르타고 편으로 돌려 로마를 고립시키는 의도였으며, 실제로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을 휘하에 넣기도 하였으나 끝내 로마의 항복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한니발은 16년간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을 끝맺지 못하고 아프리카 본국으로 돌아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원정군과 자마에서 대결한다.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프리카누스 라는 호칭을 받은 스키피오와의 마지막 회전인 자마전투로 그는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고 이것은 결정적으로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잡는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개인적으로 한니발이 초기에 전개한 전쟁 방식은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로마의 허를 찔러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진군해 적의 허를 찌르고 기병이 부족한 로마 중무장 보병을 기동성이 뛰어난 누디미아 기병으로 기습해 전술로 활용하는 등.. 당시 기병은 양성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고대에는 등자가 없기 때문에 말에 올라타서 활이나 창을 쏠때 다리로 버티고 있지 않으면 이러한 무기를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기병은 더더욱 양성하기가 어려웠다..
칸나에 전투를 통해 로마를 멋지게 무찔렀지만 그것으로 로마는 결정적으로 무너지지는 않았다.. 지배를 받는데 익숙한 오리텐트나 이집트 카르타고의 백성들과는 다르게 로마를 구성하는 에트루리아인이나 삼니움 족 그리스 인들은 로마와의 오랜 전쟁을 통해 흡수 동화되고 로마와 동맹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로마를 이탈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로마는 수도로만 기능이 집중되는 나라도 아니었다..
전투에서는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전쟁에는 패배하고 그 자신은 독을 마시고 자살하게 된다.. 희대의 전술가 였지만 정국을 살펴보는 관점에서는 조금 모자랐다는 생각이 드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자마전투는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전술을 답습해 똑같은 방식으로 로마군이 승리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했다. 여기서 스피키오는 로마군에 장검 대신 에스파냐의 단검을 도입한다..
이후 카르타고는 이류 국가 신세가 되어 명목만을 유지한다.. 마케도니아를 그리스 사태로 인해 멸망시키고 그리스 역시 속주로 삼은 로마는 패권주의적 로마로 갈것을 천명하고 카르타고에게 수도를 내륙지방으로 옮길 것을 권하는 최후통첩을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해 결국 멸망 당한다..
지중해는 마레 노스트룸(우리 바다)가 된 것이다..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130년 이라는 기간동안 ㅖ은 기간동안에 로마인이 지중해를 제패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한니발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굴복시켜 지중해 서부의 패권자가 되었을 때부터 헤아리면 로마가 지중해 전체를 제패하는 데 걸린 시간은 70년도 안된다.매우 놀랍고 대단한 현상인 것이다.
결국 한니발이 얼마나 로마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로마를 궤멸시키고자 했지만 어느 누구보다 로마를 도와주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하지만 로마는 이 전쟁 이후 치르는 대가를 겪게 되고 패권자가 된 로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카르타고 함락시 스피키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눈물을 흘리면서 로마 역시 언젠가는 똑같은 순간을 맞이할것이라는 비애감을 안고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핵토르의 말을 입에 올렸다고 한다..
당시 원로원은 최대일 때도 3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4명 중에 1명 이상이 전사한 것이었다. 반면 카르타고군의 피해는 6,000명 정도였고, 그 대부분은 중앙의 에스파냐-갈리아 병사들이었다. 이 전투는 로마 측에게 인적손실로는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었다.
전후영향
이 전투 후 로마는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지구전으로 전략을 변경하였다.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두 명의 집정관이 공격대상을 시칠리아와 에스파냐등 카르타고 주변으로 변경하여 바깥에서의 붕괴를 노렸다.
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카르타고해군을 위협해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한니발에 대한 보급을 끊었다. 그리고 전력의 재편성과 더불어 칸나에 패전의 원인이었던 기병육성에 노력하여 훗날 자마 전투에서 승리를 얻게 되었다. 또한 기병의 조달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동맹국의 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한니발은 이 승리로 인해 로마 동맹도시가 배반하기를 기대했으나, 동맹도시의 약속은 그대로 지켜져 충분한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적지에서 보급에 대한 어려움을 겪던 한니발은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비옥하고 카르타고 본국과도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이탈리아 남부로 공격방향을 바꾸었다
칸나에 전투당시 사용한 전술
칸나에 전투당시 한니발은 로마의 주력 부대를 포위 섬멸하였는데, 이는 포위섬멸전의 교과서적 예라 할 수 있어서 모든 사관학교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전투이기도 하다. 로마의 집정관 바로는 우세한 병력을 살려 주력인 중장보병으로 적 주력을 분쇄하는 교과서적 진형을 펼쳤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군 보병을 상대로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경보병과 주력인 중장보병으로 정면에서 지연전을 펼치면서 적 주력을 끌어들이고 동시에 우세한 기병대를 이용하여 로마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기병을 빠른 시간 안에 물리치는 전술을 구상하였다. 예상대로 로마군 기병의 2배를 넘는 강력한 좌익 기병이 로마군 우익 기병을 분쇄하고, 대등한 수효였던 우익 기병도 로마군 좌익 기병을 부수는 사이 정면의 용병대와 중장보병이 로마군 보병 주력을 효과적으로 잡아두게 되었다. 양익으로 펼쳐진 용병대를 패주의 신호로 읽고 예비인 트리아리까지 투입한 로마군에 대해, 단지 양쪽으로 기동했을 뿐인 경보병부대와, 로마군 기병을 분쇄한 좌우익 기병대로 구성된 포위진을 형성한 카르타고군은 애초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위섬멸전을 통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후 경과
다만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전쟁의지를 꺾지 못했기 때문에, 한니발은 이후에도 이탈리아 반도를 계속 돌아다니며 로마의 동맹국을 괴롭혔다. 로마의 동맹국들을 카르타고 편으로 돌려 로마를 고립시키는 의도였으며, 실제로 이탈리아 남부 대부분을 휘하에 넣기도 하였으나 끝내 로마의 항복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한니발은 16년간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을 끝맺지 못하고 아프리카 본국으로 돌아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원정군과 자마에서 대결한다.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프리카누스 라는 호칭을 받은 스키피오와의 마지막 회전인 자마전투로 그는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고 이것은 결정적으로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잡는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개인적으로 한니발이 초기에 전개한 전쟁 방식은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로마의 허를 찔러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진군해 적의 허를 찌르고 기병이 부족한 로마 중무장 보병을 기동성이 뛰어난 누디미아 기병으로 기습해 전술로 활용하는 등.. 당시 기병은 양성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고대에는 등자가 없기 때문에 말에 올라타서 활이나 창을 쏠때 다리로 버티고 있지 않으면 이러한 무기를 쓰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기병은 더더욱 양성하기가 어려웠다..
칸나에 전투를 통해 로마를 멋지게 무찔렀지만 그것으로 로마는 결정적으로 무너지지는 않았다.. 지배를 받는데 익숙한 오리텐트나 이집트 카르타고의 백성들과는 다르게 로마를 구성하는 에트루리아인이나 삼니움 족 그리스 인들은 로마와의 오랜 전쟁을 통해 흡수 동화되고 로마와 동맹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로마를 이탈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로마는 수도로만 기능이 집중되는 나라도 아니었다..
전투에서는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결국에는 전쟁에는 패배하고 그 자신은 독을 마시고 자살하게 된다.. 희대의 전술가 였지만 정국을 살펴보는 관점에서는 조금 모자랐다는 생각이 드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자마전투는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전술을 답습해 똑같은 방식으로 로마군이 승리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했다. 여기서 스피키오는 로마군에 장검 대신 에스파냐의 단검을 도입한다..
이후 카르타고는 이류 국가 신세가 되어 명목만을 유지한다.. 마케도니아를 그리스 사태로 인해 멸망시키고 그리스 역시 속주로 삼은 로마는 패권주의적 로마로 갈것을 천명하고 카르타고에게 수도를 내륙지방으로 옮길 것을 권하는 최후통첩을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해 결국 멸망 당한다..
지중해는 마레 노스트룸(우리 바다)가 된 것이다..2차 포에니 전쟁인 한니발 전쟁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130년 이라는 기간동안 ㅖ은 기간동안에 로마인이 지중해를 제패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한니발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굴복시켜 지중해 서부의 패권자가 되었을 때부터 헤아리면 로마가 지중해 전체를 제패하는 데 걸린 시간은 70년도 안된다.매우 놀랍고 대단한 현상인 것이다.
결국 한니발이 얼마나 로마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로마를 궤멸시키고자 했지만 어느 누구보다 로마를 도와주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하지만 로마는 이 전쟁 이후 치르는 대가를 겪게 되고 패권자가 된 로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카르타고 함락시 스피키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눈물을 흘리면서 로마 역시 언젠가는 똑같은 순간을 맞이할것이라는 비애감을 안고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핵토르의 말을 입에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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